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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해] 강림후(3-1) - " 큰길과 산울타리로 나가서 " / 총회선교주일 / 서재경 목사

관리자 2021-06-10 (목) 22:52 3년전 1488  

본문) 호 2:14~23, 고전 1:18~25, 눅 14:15~24


오늘은 선교주일입니다. 우리는 ‘교회’하면 무엇을 떠올립니까? 십자가 종탑이 있는 건물, 예배당이지요. 그러나 ‘교회’는 곧 ‘선교’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라는 말 자체가 ‘건물’이 아니라 ‘사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모인 사람들이 곧 교회, 에클레시아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곧 소명이 없다면, 그리고 그 소명을 따르는 사람들이 없다면, 아무리 크고 웅장한 건물이 있다 할지라도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선교의 핵심은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는 누가복음에서 ‘큰 잔치의 비유’를 함께 읽었습니다. 누가복음은 선교의 복음서라 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회개와 구원의 역사, 곧 복음을 모든 민족에게 전파할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복음이 이스라엘을 넘어 모든 민족에게 이르는, 땅끝까지 이르는 전망을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큰 잔치의 비유’는 바로 그 선교의 전망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과 함께 음식을 먹던 한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때 어떤 바리새파 사람의 집에서 음식을 먹고 있었지요. 비록 안식일이기는 하지만(1절), 바리새파 중에서도 지도자급인 데다가, 상에 앉는 자리도 격조를 따진 듯하니(7절), 음식도 그런대로 괜찮았을 것입니다. 이런 세상 잔치도 먹을 만한데, 하나님 나라에서 먹는 잔치는 얼마나 대단하겠느냐, 하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잔치보다 제삿밥이라고, 잔치에서 먹는 ‘음식’에 마음을 두고 있네요.

이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큰 잔치의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는 사람들을 초대하였지요. 시간이 되어 종들을 보내, 준비가 다 되었으니 잔치에 오시라고 정중하게 청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같이 핑계를 대며 거절합니다. 밭을 샀기 때문에 못 간다는 사람, 겨릿소를 다섯 쌍이나 사서 어쩔 수 없다는 사람, 장가를 가서 갈 수 없다는 사람, 정말 가지가지였지요. 어떻게 되었을까요? 기껏 잔칫상을 다 차려놓았는데, 초대받은 사람이 아무도 오지 않았으니,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주인은 노하여서 종들에게, 어서 시내 거리와 골목으로 가서, 가난한 사람들과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주인의 명대로 했는데도 자리가 남았지요. 그러자 주인은 종들에게 큰길과 산울타리로 나가서 사람들을 강권해서라도 자리를 채우라고 말합니다.

이 비유, 뭘 말하는 것일까요? 그렇지요. 이 비유는 복음이 이스라엘을 넘어서 이방인에게로 가는 과정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잔치에 처음 초대받은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잔치에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거부하자, 가난하고 병든 자들이, 죄인들이 초대받게 되었습니다. 그것으로도 자리를 채우지 못하자 이번에는 큰길을 넘어 산울타리까지, 곧 이방인까지 잔치에 초대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복음이 이방인에게 이르는 과정을 이야기한 것과 비슷한 얘기지요. 

예수님은 이야기를 끝맺으시면서, ‘초대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서는 아무도 나의 잔치를 맛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의 잔치에,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먼저 초대받았던 사람들이지요. 그 사람들은 스스로 초대를 거부했기 때문에 잔치를 맛볼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왜 초대를 스스로 거부했던 것일까요? 첫 사람은 밭을 샀다고, 밭에 가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밭을 산다는 것은 참 중대한 일이지요. 두 번째 사람은 소를 샀다고 했습니다. 소를 사도 겨릿소를 다섯 쌍이나 샀으니, 열 마리입니다. 예전에 농촌을 생각하면, 소 한 마리만 있어도 대견한데, 열 마리니 얼마나 대단합니까? 잔치에 가면 소는 누가 보겠습니까? 세 번째 사람은 장가를 갔다고 했습니다. 일생일대의 인륜지대사지요. 장가를 가면 군대 소집도 연기해 줍니다. 참 중요한 일이지요. 그 중요하고 필수적인 일들, 밭을 사고 소를 사고 아내를 얻는 중대사가 그들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초대를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아주 오래전에, 호세아를 떠난 고멜이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호세아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뜻이니까, 하나님의 구원을 떠났다고 할 수 있지요. 고멜은 왜 호세아를 떠났을까요? 고멜은 무엇을 따라간 것일까요? 고멜은 자신이 정부들을 따라간 이유를 이렇게 밝힙니다. “나는 나의 정부들을 따라가겠다. 그들이 나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대고, 내가 입을 털옷과 모시옷, 내가 쓸 기름과 내가 마실 술을 댄다.”(호 1:5) 

무슨 말입니까? 먹을 것과 마실 것, 입을 털옷과 모시옷, 그리고 기름과 술은 생활에 꼭 필요한 것들입니다. ‘큰 잔치의 비유’에서 사람들은 ‘밭을 사고 소를 사고 장가를 가느라고’ 잔치를 거절했지요. 사람들이 밭을 사고 소를 사고 장가가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그게 다 잘 먹고 잘 마시고, 잘 입고 즐겁게 잘살자는 것이지요. 고멜이 따라갔던 먹고 마실 것과 입을 옷과 기름과 술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우리의 일상을 위해, 우리의 생활에 꼭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명을 위한 것들입니다. 없어서는 참 중요한 것들이지요.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삶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우리의 존재를, 우리의 생명을 지배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따라간 것, 금과 은을 바알의 우상으로 만든 것(호 1:8), 그것이 바로 고멜의 죄요 이스라엘의 죄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받아 읽은 호세아서 본문은, 하나님께서 다시 고멜/이스라엘을 회복하시겠다고 다짐하시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구원하시기 위해 어디로 데려가십니까? ‘빈 들’입니다. 그런데 ‘빈 들’은 어떤 곳일까요? 말 그대로 빈 곳이지요. 먹고 마실 것이 없고, 털옷과 모시옷이 없고, 기름과 술도 없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먹고 입고 마실 것을,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따라갔던 이스라엘을 빈 들로 꾀어내시고, 고통스러운 아골 광야에서 희망의 문을 열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빈 들에 가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어떻게 하시겠다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고멜/이스라엘에게, 너는 나를 ‘나의 남편’이라고 부르고, 다시는 ‘나의 주인’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놀랍고 신비로운 관계가 회복됩니다. 하나님을 ‘나의 주인’이라고 부르는 ‘주종관계’가 아니라, ‘나의 낭군’이라고 부르는 부부의 관계로,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는 관계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특히 ‘나의 주인’이라고 부를 때, 이 ‘주인’ ‘소유주’라는 말이 바로 ‘바알’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바알의 정체가 여지없이 드러납니다. 바알이란 무엇입니까? 바알은 먹고 마시고 입고 즐기는 것을 주는 神 같지만, 실상은 소유를 미끼로 인간을 지배하고 조종하는 우상입니다. 바알은 권력과 돈과 명예와 쾌락을 통해서 인간을 노예화하는 우상입니다. 그런데 가장 사악하고 참람한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바알이라 부르고 바알처럼 섬기는 우상숭배입니다. “너는 나를 다시는 ‘나의 주인’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듭해서 이렇게 다짐하십니다. “그때 내가 너를 영원히 아내로 맞아들이고, 너에게 정의와 공평으로 대하고, 너에게 변함없는 사랑과 긍휼을 보여주고, 너를 아내로 삼겠다. 내가 너에게 성실한 마음으로 너와 결혼하겠다. 그러면 너는 나 야훼를 바로 알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회복/구원되고 나면, 하나님의 언약은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벌레에게까지 이어집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땅과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 사이에, 먹거리들과 사람 사이에 화해와 소통이 이루어집니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이 다시 긍휼하신 하나님의 백성으로 온전하게 회복됩니다.


오늘 우리는 고린도전서의 말씀을 함께 읽었지요. 고린도는 사도 바울이 선교했던 그리스의 주요 도시입니다. 아주 번성한 도시였는데, 특히 그리스의 이름난 신들을 모신 거대하고 웅장한 신전들이 많았습니다. 이 화려하고 번창한 고린도에 선교하려면 무엇이 가장 필요할까요? 특히 철학과 ‘지혜’를 즐겨 자랑하는 고린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빈틈없이 수립한 선교 계획이 필요하고, 그 계획을 잘 뒷받침해 줄 선교기금도 확보해야겠지요. 그리스 신들의 신전 못지않은 아름다운 성전도 지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고린도에 보낸 편지를 보면, 바울에게는 그 어떤 그럴듯한 선교 기획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니지요. 바울의 선교는 참으로 역설적이고 파격적이기까지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바울은 웅장하게 돌로 짓는 성전이 아니라, 사람이 각각 지체로 연결되는 그리스도의 몸 성전을 설계합니다. 잘 다듬어 치장한 신의 우상을 가장 높이 돋보이는 심장부에 안치하는 그리스식 신전이 아니지요. 그리스도를 맨 아래 모퉁잇돌로 놓고 이어지는 성전, 가장 약한 지체를 가장 중요하고 돋보이게 하는 성전입니다. 성령이 거하는 몸의 성전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는 성령의 성전을 짓기 위해서는 무엇이 중요할까요? 그 핵심적인 원칙이 있다면 그게 무엇일까요? 어리석음입니다. 바울은 ‘지혜’의 도시 고린도에서 그리스도의 몸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무엇보다 ‘어리석음’을 내세웠습니다. 하나님은 매혹적인 선전 광고가 아니라, ‘어리석게 들리는 설교’를 통해서 믿는 사람을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데 필요한 것은 인간의 지혜와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다만 십자가의 어리석음과 십자가의 무능뿐이다, 이것이 바울의 확고한 생각입니다. 지혜의 도시 고린도에서 바울은 그 정반대의 길을 갔습니다. 그 길은 탄탄대로로 승승장구하는 성공의 길이 아니라, 어리석고 무능한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변변한 성전 하나 건축하지 않았지요. 그러나 바울은 그곳에 그리스도의 사람들을 세워갔습니다.


‘큰 잔치 비유’에서 예수님께 질문했던 사람은 잔치에서 먹는 ‘음식’에 주목했지만, 예수님은 잔치에 참석하는 ‘사람’에 초점을 두셨습니다. 잔치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음식보다 사람이라는 말이지요. 마찬가지로 교회에서 그리고 선교에서 중요한 것도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에서 돌로 지은 신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지체로 한 몸을 이루는 ‘그리스도의 사람’을 세우려 했습니다. 선교란 사람을 세우는 것이며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한국 교회는 역사상 유례없는 성장을 해냈다고, 선교의 기적을 이루어냈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 교회의 상황은 어떠할까요? 아니 한국 교회의 내일은 어떤 모습일까요? 『한국교회 미래 시나리오』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보면, 2045년, 그러니까 앞으로 또 한 세대가 지난 후에 우리나라 인구 5천 2백만 명 중에서 기독교인은 161만 7655명으로 약 3% 정도가 될 것이랍니다. 이거 괴담에 불과한 것일까요? 어쨌거나 지금 교회가 위기에 빠졌다는 것은, 요즘 누구나 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이런 위기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무엇 때문일까요? 세계에서 가장 크고 웅장한 성전을 가졌다는 한국 교회가 어떻게 그렇게 몰락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그렇게 몰락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일찍이 이스라엘 백성이 그렇게 멸망했었지요. 그리고 이스라엘이 망했을 때, 호세아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이 망한 것은 성전이 작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즐길 것’만을 좇아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바알이라 부르고 바알처럼 섬겼기 때문이지요. 오늘 우리가 읽은 큰 잔치의 비유에서도, 첫 번째로 초대받은 사람들은 ‘밭과 소와 결혼’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거절했습니다. 그들의 소유 때문에 스스로 하나님 나라 잔치를 거부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먹을 것과 입을 것과 마실 것’ 그리고 ‘밭과 소와 결혼’은 오늘 우리의 언어로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경제’라고 부르는 것, 그것이 아닐까요? 오늘도 사람들은 ‘경제지상주의’라는 맘몬숭배에 빠져서, 바알을 따르고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거부하는 게 아닐까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빈들로 나가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하란을 떠났듯이,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나 시내 광야로 나갔듯이, 빈들로 나가야 합니다. 거기서 다시 하나님의 긍휼하신 사랑을, 그 애틋한 사랑을 기억해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고, 하늘과 땅과 땅의 먹거리들과 다시 화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탐욕으로 사는 바알의 노예가 아니라 다만 은총으로 사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배워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의 잔략과 술수로 세워지고 성장하는 게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지혜로,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통해 세워진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바알의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살도록,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맛보며 살도록, 우리가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따라 살도록, 성령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인도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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