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갈 6:1~10, 미 7:18~20, 요 7:53~8:11
예수님이 성전에 계실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모여들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끌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이런 여자를 돌로 쳐서 죽이라고 했소. 그런데 당신은 이 일에 대해 뭐라고 하겠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자의 행위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서 물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성서와 율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백성들이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주는 위치에 있었고 그러한 권위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간음한 사람은 죽여야 한다는 것을 그들의 입으로 말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음모를 훤히 알고 계신 예수님은 몰아붙이는 그들 앞에서 태연한 침묵으로 응수하며 땅에 무엇인가를 쓰고 있습니다. 아마 그 자리에서 그들을 호통 치며 그들의 거짓을 까발리며 응수했더라면, 그 자리에서 돌에 맞아 죽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결정을 다그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일어나서 그들에게 대답합니다. “너희 가운데 죄가 없는(죄의 욕망이 없다)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리고 또다시 침묵과 함께 그들을 반대하여 무엇인가를 쓰고(어느 누구에 대한 반대의 기록을 쓰다) 있습니다.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그들 각자의 죄목을” 썼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땅에 쓴 글은 “네 죄를 네가 알렷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파멸시키려던 그들 모두가 나이 많은 이로부터 시작하여 돌아갔습니다. 마침내 예수님만 남았으며, 그 여자는 그대로 서 있습니다. 예수님이 여자에게 말합니다.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어서 돌아가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말라.”
이 이야기(사건)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이 많습니다. 예수님, 많은 백성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 간음하다가 잡혀온 여인입니다. 여러분은 이야기를 읽고 들으면서 ‘나는 누구에 해당할까’ 하고 생각해 보셨나요? 한 부류의 사람이 아니더라도 각각의 상황과 형편에 따라서 중복해서 적용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이 이야기에서 더 많은 성찰의 주제를 찾기 위해서는 등장인물별로 분류하여 나에게 대입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사람들인데, 그들은 이 사건을 일으킨 당사자들입니다. 그들의 목적은 예수님의 흠을 잡아 고소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는 목적이 너무 커서 잘못된 근거를 가지고 오거나 그 근거를 조작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간음은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간음을 했다면 상대가 있었을 텐데, 남자는 어디 가고 사회적 약자로 그들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여자만 끌고 왔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직무상 무자비한 감독과 같이 사람들을 감시하고 법률상의 어떠한 과실이나 탈선에도 눈을 부라리고 조금이라도 위반 사항이 있을 때에는 가차 없이 잔인한 형벌로 임하는 그러한 권한을 부여받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위가 단지 형벌이나 유죄 선고를 부과하는 것으로 생각할 뿐, 자신들의 직무가 죄인들을 구하는 의무를 지고 있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율법을 너무나 잘 안다고 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악의 뿌리를 뽑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흠을 잡기 위해 연약한 여자를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을 파멸시키고 죽여야 한다는 생각뿐, 가련한 여자의 수치나 생명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들은 이 여자를 전혀 한 인간으로 보고 있지 않으며, 그들에게 있어서 이 여자는 예수님에 대한 송사를 공식화하기 위한 도구, 그들의 음모를 성사시키기 위한 단순한 인질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여자는 이름도 인격도 없는 수단으로 취급되었습니다. 하물며 이 여자의 생명은 그들에게 그리 대수롭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벌인 이번 사건은 “네 죄를 네가 알렷다!”라고 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의 생명을 위협하고, 그 수단으로 끌려온 여인의 생명도 위협하는 것이었습니다. 인간과 생명이 수단으로 사물화 되었습니다. 우리의 현실에는 이용당하는 생명과 사람의 권리나 사회의 가치는 아랑곳하지 않고, 권력자들의 이익과 의지만을 관철시키려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지금 우리의 관계, 우리의 사회 가운데도 여전히 약자들은 더욱 착취당하고, 그 생명을 담보로 살아가야만 하는 현실을 보게 됩니다.
둘째는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부터 예수님 주변에 몰려들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멀리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온 사람들이거나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꼭 있는 장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신기하게 듣다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말에 따라서 사건에 가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어떻게 판단할지를 유심히 보고 있습니다. 그들 중에 더러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을 비난하면서 죽이려 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더러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과 한 마음이 되어 예수님을 잡으려 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너희 가운데 죄가 없는(죄의 욕망이 없다)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라고 말하고, 또다시 침묵과 함께 그들을 반대하여 무엇인가를 쓰고 있을 때, 그들은 모두가 나이 많은 이로부터 시작하여 돌아갔습니다. 많은 백성들과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 모가 돌아가고 예수님과 여인만 남았습니다. 돌아가는 순서를 말하는 데, “나이가 많은 이로부터 시작하여”라고 합니다. 이 짧은 구절은 어떤 사회나 공동체에서 어른들의 지혜와 연륜을 긍정하면서도 어른들의 책임과 역할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른이나 선임자들이 더 바르게 판단하고 행동할 때에 다른 사람들이 따를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경험과 연륜은 옳게 생각할 수 있는 지혜의 근거도 되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새파 사람들처럼 사용한다면 선입견이나 아집이 되어 다른 생명들을 위태롭게 할 수도 있습니다.
셋째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 의해서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자의 죄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간음입니까? 그리고 음모를 꾸미는 자들과 함께 한 것입니까? 혹은 그들에게 이용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죄라면 죄일 수 있겠죠. 예수님이 여자에게 말합니다.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어서 돌아가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말라.”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는 것은 죄를 너무나 쉽게 용서하신 것도 아니고, 심판을 포기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법적 용어로 말하면, 집행유예입니다. 단순한 용서가 아닙니다. 인간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미래의 길을 열어 두고 죄 없는 생활을 향해 도전하라는 경고입니다. “이제 가서 철두철미하게 너의 인생을 전환시켜라. 더 이상 죄의 굴레에서 헤매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의 현실성이 아니라 인간의 가능성에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그 여자가 과거에 무엇이었고 어떤 일을 했느냐가 아니라 그 여자가 어떻게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를 주의 깊게 바라보지만 동시에 인간을 믿고 인간에게 주려고 한 것을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음모와 예수님의 사랑은 너무나 다릅니다.
우리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에 있어서 가장 빠지기 쉬운 일반적인 과오는 남에게는 어떤 표준을 요구하면서도 자기 스스로는 그것을 행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우리들은 때때로 자기 자신에게서도 분명히 엿볼 수 있는 그러한 과오를 남에게서 볼 때 그 사람을 비판하려 합니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것만으로 비판할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한다면 먼저 그 대상에 대한 따뜻한 동정과 그의 가능성을 바탕으로 한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무작정 나무라고 궁지에 모는 것이 아니라 그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길과 여건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가장 오래된 사본들에는 이 사건(7:53-8:11)이 없습니다. 사본에 따라서는 본문이 7:36 다음에 이어지기도 하고, 21:25 다음에 이어지기도 합니다. 명목상으로는 신성을 모독한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는 당시의 지배자들의 현실을 폭로하는 본문의 이야기가 후대에 추가되었고, 게다가 예수님을 잡으려고 행동하는 상황 속에 본문을 배치한 것은 요한 공동체가 지배자들의 억압을 회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대처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출교의 위협(9:22)이나 죽임의 음모(11:57)에 주눅 들지 않고 대면하겠다는 의미입니다. 한편으로 용서에 대해서 생각한다면 아마도 이 사건이 요한 공동체에서도 뜨거운 감자였을 것입니다. 쿰란공동체나 엣세네파와 같이 엄격할 규율과 서열을 강조하는 공동체에서 구체적인 잘못에 대한 용서를 말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선임자와 후임자의 서열과 책임과 의무를 강조하는 내용이 이 사건 속에 들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이 본문에서 깨달을 수 있는 용서와 충고와 자기성찰에 대하여 갈라디아서 본문은 직접적으로 말합니다. “1 형제자매 여러분, 어떤 사람이 어떤 죄에 빠진 일이 드러나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사람인 여러분은 온유한 마음으로 그런 사람을 바로잡아 주고, 자기 스스로를 살펴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2 여러분은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3 어떤 사람이 아무것도 아니면서 무엇이 된 것처럼 생각하면, 그는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4 각 사람은 자기 일을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자기에게는 자랑거리가 있더라도, 남에게까지 자랑할 것은 없을 것입니다. 5 사람은 각각 자기 몫의 짐을 져야 합니다. 6 말씀을 배우는 사람은 가르치는 사람과 모든 좋은 것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7 자기를 속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조롱을 받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둘 것입니다. 8 자기 육체에다 심는 사람은 육체에서 썩을 것을 거두고, 성령에다 심는 사람은 성령에게서 영생을 거둘 것입니다. 9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지쳐서 넘어지지 아니하면, 때가 이를 때에 거두게 될 것입니다. 10 그러므로 기회가 있는 동안에,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합시다. 특히 믿음의 식구들에게는 더욱 그렇게 합시다.”
지금 여러분은 어느 구절이 마음에 와 닿습니까? 한 구절 한 구절을 마음에 깊이 새기며 묵상하면 우리의 삶은 더 넓고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특히 이 모든 것을 “기회가 있는 동안에” 하라고 합니다. 만날 수 있을 때에, 살아 있는 동안에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하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라고 했지만 특히 “믿음의 식구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합니다. 믿음의 식구들뿐만 아니라 가족에게 기회가 있는 동안에 선한 일을 합시다. 때때로 우리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식구들이니까 소홀하기 쉽습니다. 관계가 조금 멀리 있는 다른 사람들이 욕을 하는 것은 그런대로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족이 조금 서운하게 하면 더 크게 느껴집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가정과 가족 구성원들에게 더욱 잘 하려고 애써야겠지요. 저도 더 나이가 들어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두 아들과 아내에게 존경받는 사람이 되는 소박한 꿈을 갖고 있습니다. 잘 될지 모르겠지만,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한다는 것은 완전한 사람이 되라는 말이죠. 어렵지만 기회가 있는 동안에 노력은 하며 살아야겠지요. 또한 이제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하느님이 만드신 자연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 있는 만물에게도 선한 일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번주일은 환경주일입니다. 요즘에는 기후 변화(climate change)라는 용어보다는 기후 위기(climate crisis) 혹은 기후 붕괴(climate breakdown)라는 용어를 저절로 사용하게 됩니다. 기후 위기의 징후는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폭염과 한파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증가했고, 산불도 자주 발생합니다. 고농도 미세먼지가 우리 삶을 괴롭힙니다. 푸른 하늘을 보면 마치 선물을 받은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만큼 우리 하늘이 흐려 있다는 말입니다. 물 부족 사태가 벌어지고, 국경을 넘나드는 전염병이 우리 삶을 위협합니다. 핵발전소의 위험이 시시각각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위기를 이간의 삶과 문명이 초래한 것입니다. 인간의 편리를 위해 생산되는 플라스틱이 우리 삶을 위협함은 물론이고 바다 생물들의 대량 폐사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창조주로 고백하는 기독교인들은 정치인들에게 온실가스감축에 노력할 것을 요구해야 하고, 생태계의 건강함을 회복하도록 하는 일에 그들의 역량을 발휘해줄 것을 요청해야 합니다. 아직 기회가 있는 동안에 우리의 삶과 사회 전반의 의식 변화를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입니다. 함께 예수님을 닮아가기 위해 모인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옳은 것을 행하려고 애쓰는 우리들입니다. 자기의 일을 살피면서 서로 남의 짐을 져 주면서 함께 갑시다. 하느님 나라의 좋은 것을 심고 아름답게 자랄 수 있도록 좋은 환경을 만들면서 거둘 때를 기다립시다. 모든 생명에게, 모든 사람에게, 특히 믿음의 식구들에게 선하고 유익한 일을 하면서도 낙심하지 맙시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지쳐서 넘어지려 한다면 서로 일으켜주면서 함께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