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 52:7~10, 고전 9:13~18, 눅 10:1~16
1) 기쁜 소식을 기다림
코로나 19로 힘들고 갑갑한 생활을 벌써 1년 반 가까이 이어오고 있습니다. 주변에 코로나 불루 우울증을 겪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고 집에서 텔레비전만으로 외부 소식을 얻는 분들이 상당 수 있습니다. 특히 그동안 교회 출석을 못하시는 분들 중에 그런 분들이 계시는 것 같습니다. 빨리 백신접종하고 문밖으로 나오시길 바라겠습니다. 교회 집회도 아직 사회적 거리두기 1.5단계 탓에 한꺼번에 다 모이지 못하고 좌석 정원의 30%만 모일 수 있어서 옹색하게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더더구나 공동식사나 친교 모임과 구역예배 등은 생각할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속히 이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하며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문을 박차고 나와 걱정 없이 악수도 하고, 포옹도 하고, 함께 힘차게 찬송하며 예배하고, 음식을 나누며 성도의 교제를 나눌 날이 속히 오길 위해 기도합시다.
2) 구원의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 자들
이사야 52장은 오랜 바벨론 포로 생활에 지쳐있는 사람들에게 전해준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아직 어둠은 짙게 깔려있고 구원의 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있는데 이사야 선지자는 야훼 하나님의 구원의 소식을 전해줄 사자(使者)의 발자국 소리를 듣습니다. “좋은 소식을 전파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7절) 예루살렘의 회복의 메시지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현실의 어려움에 전전긍긍하며 어둠 속을 헤맬 때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의 서광(曙光)을 볼 수 있는 열린 눈으로 희망을 보고,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습니다. 험한 산을 넘으면서도 구원의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는 ‘전령(傳令)’의 발이 참으로 아름답게 보입니다. 성문에서 파수꾼들이 전령의 다가옴을 보고 외칩니다. “너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아 기쁜 소리를 내어 함께 노래할지어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고 예루살렘을 구속하셨음이라”(9절)
지금 우리 교회는 모두 힘들어 할 때 지쳐있는 사람들에게 이사야처럼 희망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희망의 근거는 7절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아직은 눈에 보이는 어떤 가시적인 일들이 드러나지 않았어도 하나님이 다스리심을 믿음으로 어둠 속에서도 희망을 말할 수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했습니다.(히11:6)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습니다. 그 하나님이 지금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에 여기에 근거해서 우리는 구원의 희망을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어려운 때 우리 교회는 무엇을 선포하고 있습니까?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선하신 뜻을 갖고 지금 이 세상을 통치하십니다. 그래서 지금 조금 힘들어도 우리는 하나님이 통치하시기 때문에 구원의 희망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산을 넘는 아름다운 발걸음을 멈출 수 없습니다.
3) 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말씀은 바울 사도의 ‘사도권’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해명 글’ 성격을 갖습니다. 바울을 비난하는 사람들 중에는 바울의 ‘사도성’을 의심했습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직접 받은 제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야기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사실을 그의 서신 곳곳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한 것임을 여러 곳에서 주장합니다.(로1:1, 고전1:1, 고후1:1 등)
그럼에도 바울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바울이 다른 사도들처럼 사례를 받지 않고 자비량으로 사역하는 것을 들어서 바울이 사도의 자격을 온전히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 아니냐고 하며 사도의 권위를 문제 삼았습니다. 고린도후서 10장, 11장 등에서는 바울의 사도성에 대한 문제를 강한 어조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늘 본분 고린도전서 9장에서 자신이 사도로서 자신의 권리를 사용할 수 있지만 이 권리를 다 쓰지 않은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라”(12절)고 말하며 자신의 입장을 밝힙니다. 바울은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권리를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포기한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에 조금이라도 누를 끼치지 않게 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있음에도 복음전파에 지장이 된다면 얼마든지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를 자기가 교회에서 주는 사례를 가지고 생활할 수 있음에도 그 권리를 포기하고 천막을 제조하는 일을 하면서 생계문제를 해결하가면서 복음 전파에 생명을 걸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우리가 오늘 바울 사도의 말에서 주목할 말씀은 자신이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고 한 17절입니다. 사명(使命)은 목숨을 걸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그런 일이 아닙니다. 상황과 여건이 허락하면 하고, 그런 상황이 안 되면 안 해도 되는 일이 아닙니다. 목숨을 걸고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해야 하는 일입니다. 바울은 실제로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복음 전도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이 소중한 복음 전파를 위해서 무엇을 포기하고 내려놓았습니까? 목숨 걸고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까? 바울 사도는 아주 절박했는데 우리 모두는 절박하지 않습니다. 바울 사도는 절실했는데 우리 모두는 그렇게 절실하지 않습니다. 바울 사도는 18절에서 자신이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이 주실 상급을 위해서 자신의 권리를 다 쓰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상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를 위해 어떤 것을 포기했느냐 하는 말입니다.
4) 아무 것도 갖지 말라
복음서 본문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복음 전파를 위해 파송하신데 이어 또 다른 70인을 짝지어 파송하시면서 주신 ‘파송사’입니다. 예수님은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을 보내주소서 하라고 하시며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은 안타까운 심정을 피력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4, 5절)고 당부하셨습니다. 이어서 어느 집이나 동네에 가든지 영접해주면 거기 머물고 주는 것을 먹고 만일 영접하지 않으면 거기서 나와서 발에 묻은 먼지까지 떨어버리며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온줄 알라고 선포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전도자들에게 다분히 종말론적 삶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아무 것도 의지하지 말고 오로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처분만을 기다리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하나님이 책임져주신다는 약속이기도합니다.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할 말씀은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이나 아무 것도 갖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까? 하나님이 알아서 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주기도에서 일용할 양식만을 구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도 그렇게 사셨고, 많은 사도들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보다 세상의 것들에 너무 많은 관심들을 두고 마음을 뺏기고 있습니다. 본질적인 것보다 비본질적이고 부차적인 것에 우리 마음을 뺏기고 있습니다. 어떤 집에 살며, 어떤 옷을 입으며, 어떤 것을 먹는가 하는 등 아주 부차적인 것에 많이 마음을 두고 있고 교회당을 어떻게 치장하고 교회가 어떤 차를 굴리고 하는 사치스러운 생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주님은 마음이 급하신데 우리는 너무 여유를 부리고 있습니다.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갑시다. 다시 우리 믿음을 새롭게 세웁시다.
5) 맺음
힘들게 살아오면서 버텨온 우리 이웃들을 향해 구원의 기쁜 소식을 이사야처럼 외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지금 이 위기가 교회에는 좋은 기회입니다. 어려워하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감싸 안고 하늘의 위로를 전해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 교회는 바울 사도처럼 자신이 누릴 것들을 포기하고 비워가며 희생과 헌신으로 오로지 하나님나라 확장을 위해 매진합시다. 그러면 우리 주님께 모든 것 맡기고 오직 하나님 바라보며 갑시다. 내일은 주님이 책임져주실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