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미가 4:1-4, 계시록 19:1-10, 마태 25:31-46
지난 화요일(7월 23일)은 고 노회찬 의원의 서거 일주기였습니다. 정의가 강같이 흐르는 세상을 원했던 생전의 그의 언변은 달변이었습니다. 가히 촌철살인이라 할 수 있는 비유로 쉽고도 재미난 연설을 하였습니다. 그의 연설은 말만 풍성한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삶이 함께 녹아 있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먼저 간 그를 못내 아쉬워하였습니다. 2012년 10월 21일, 정의당 대표를 수락하면서 한 그의 연설은 아직까지도 우리의 가슴을 울립니다.
구로구 가로수 공원을 출발해서 강남을 거쳐 개포동으로 가는 6411번 버스 이야기입니다. 새벽 4시에 출발하는 첫 버스가 몇 정거장 가지 않아서 만석이 되고 마는데, 누가 이 새벽 버스를 가득 채우는 것입니까? 그들은 강남의 빌딩을 청소하는 아주머니들이었습니다.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서 5시 반까지 출근하여 빌딩을 청소하는데, 정작 빌딩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이들의 존재를 모릅니다. 내가 근무하는 이 자리가 6411번 첫 버스를 만석으로 채우는 아주머니들에 의해서 깨끗하게 청소되고 정돈되는지 아무도 무릅니다. 박봉을 받으며 새벽을 깨우는 그들은 태어날 때 받은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지 아니하고 그냥 미화원 아주머니로 불리 울 뿐입니다.
그래서 노 의원은 그들을 투명인간이라 명명하였습니다. 존재하되, 그 존재를 우리가 느끼지 못하며 살아가기에 투명인간이라 불렀던 것입니다. 그러나 노 의원은 투명인간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습니다. 자신이 대표를 맡은 정의당조차도 고단한 삶을 이어가는 그들이 고통을 호소할 때 정작 가까이 있지 못했기에 스스로 투명정당이었음을 반성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제 가까이서 그들의 삶의 냄새를 맡을 수 있고,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손을 잡을 수 있는, 투명인간을 위한 당이 되자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본문을 읽으면서 예수님의 말씀이 오버랩 됩니다. 종말에 영원한 생명을 얻을 자는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마 25:40) 선을 베푼 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내가 삶을 살아가고 있는 현장인 “여기”에, 함께 존재하고 있는 “지극히 작은 자”는 곧 투명인간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병들고, 나그네 된 자였습니다. 또한 무슨 연유로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지 몰라도 영어의 몸이 되어 창살 안에 갇힌 자조차도 투명인간에 포함하였습니다. 그들에게 다가가서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나누어 주고 그리고 옥중으로 찾아가 참담한 영혼을 살펴보는 자, 그가 곧 영생을 얻을 자라고 합니다.(마 25:35-40)
중요한 것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예수님에게 한 것이요(마 25:40), 그 하나에게도 하지 아니한 것은 곧 예수님에게 하지 않은 것(마 25:45)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예수님은 투명인간으로 명명되어진 지극히 작은 자의 삶 속에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다고 십자가에 금을 입히고, 하늘을 찌르는 높은 첨탑으로 성전을 쌓아올리고 그리고 그곳에 황금을 쌓아두는 행위는 결코 예수님을 위한 삶이 아닐 것입니다. 인간의 예수님을 위한 삶은 타자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타자 그는 곧 투명인간이요, 지극히 작은 자입니다. 둘도 아닌 하나에게라도 가슴을 여는 진실된 마음으로 다가가서 마시게 하고 먹여주고 입혀주고 찾아가 위로해 준다면 그에게는 영생의 상급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일찍이 선지자 미가는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세상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어 다시는 칼과 창으로 전쟁을 연습하지 않는”(미 4:3) 평화로운 세상이라고 하였습니다. 칼과 창으로 약자를 수탈하는 것이 아니라, 칼과 창을 녹여 보습과 낫을 만들어 그것으로 경작하고 추수하여 주리고 헐벗은 자들을 먹이고 살리는 세상을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그 세상을 완성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품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의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첫 걸음이 되기에 주께서는 그들 중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종말을 혼인잔치로 비유합니다.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은 아내 될 자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였는데, 그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계 19:8)이라고 합니다. 혼인잔치 곧 천국잔치에 청함을 받은 성도는 옳은 행실의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백성인 성도는 예수를 구원의 주로 믿고 고백한 자인데, 그 믿음의 고백은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는 성화의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은 옷의 화려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옳은 행실”을 말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오늘 첫 본문인 마태복음에서 살펴본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일”입니다.
깨끗해서 투명한 것이 아니라, 약자에 대한 무관심과 차별로 인해 “투명”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밖에 없는 오늘의 현실은 여전히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감히 성도라고 불릴 수 없었던 추하고 욕된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백성으로 인침을 받았으니, 성도된 우리는 패역한 시대의 요구에 “옳은 행실”로 응답해야 할 것입니다. 바라기는 주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주를 영접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