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슥 4:1-14, 고전 12:1-11, 눅 17:5-10
■ 들어가는 이야기
올 여름은 아주 얌전하게 지나고 있습니다. 장마도 심술궂지 않고 폭염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그래도 힘든 계절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도 수고가 많으셨지요? 그런 가운데서도 이렇게 기쁜 마음으로 주님 앞에 찾아오신 여러분 모두를 환영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로해주시기를, 여러분의 삶에 항상 생기가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미약한 시작
금 수저 물고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평범한 가정에서, 아니 오히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납니다. 시작이 신통치 않습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안에서는 시작은 미약하지만 끝은 창대한 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개업한 지 얼마 안 된 가게에 가보면 이런 문구가 있는 것을 가끔 볼 수 있습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개역성경 욥기 8:7 말씀입니다. 굉장히 힘이 납니다. 코딱지만 한 구멍가게로 시작했지만 앞으로 큰 기업으로 성장하게 되기를 바란다는 뜻이겠지요. 그런데 사실은 이게 썩 기분 좋은 말은 아닙니다.
욥이란 사람 아시지요. 얼마나 정직하고 바른 사람입니까? 그런데 까닭 없이 시련을 당합니다. 재산을 다 잃었습니다. 자식도 다 잃었습니다. 아내까지 등을 돌렸습니다. 몸에 병까지 얻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친구들이 찾아왔습니다. 꼴이 너무나 처참해서 친구들이 입을 다물지 못합니다. 그때 빌닷이라는 친구가 한 말이 이 말입니다. 야, 아무리 봐도 네가 잘못한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께서 너를 이렇게 버리실 리가 없지 않으냐, 이제라도 네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께 매달려 봐, 그러면 하나님께서 봐주실지 모르잖아. 지금 네 꼬라지는 이렇게 형편없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그러면서 이 말을 했습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이건 격려가 아니라 비아냥거림에 가깝습니다. 약 올리는 말이에요. 나는 죄가 없다, 나는 떳떳하다, 내 말을 바위에 새겨 두어라, 나중에 누구 말이 맞는가 보자, 이렇게 주장하는 욥에게 할 소리는 아니지요. 우리가 성경구절을 인용할 때는 앞뒤 사정을 잘 살피는 것이 좋습니다. 정작, 시작이 미약하다고 무시하지 마라, 하면서 강력하게 힘을 주는 말씀은 따로 있습니다. 스가랴서 4:10입니다. “시작이 미약하다고 비웃는 자가 누구냐? 스룹바벨이 돌로 된 측량추를 손에 잡으면,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기뻐할 것이다.”
■ 겨자씨의 기적
스룹바벨이 누구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 갔다가 7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올 무렵 유다 지방의 총독을 지냈던 사람입니다. 그 즈음 예루살렘은 폐허 그 자체였습니다. 남은 것이라고는 돌과 잡초뿐이었습니다. 거기다가 예루살렘 성을 쌓겠다는 거예요. 성전을 짓겠다는 거예요. 돈이 있습니까, 그렇다고 인력이 풍부합니까? 가당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스룹바벨을 보고 모두 미쳤다고 했습니다. 그때 스가랴 예언자가 한 말이 이겁니다. “시작이 미약하다고 비웃는 자가 누구냐?” 시작이 미약하다고, 현재 상황이 좋지 않다고 실망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기적은 언제나 준비되어 있습니다.
시작은 미약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열악하지만, 우리는 기적의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나 열고 들어갈 수 있다면, 그것은 기적의 문이 아닙니다. 기적의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열쇠가 있어야 합니다. 그 열쇠가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중요한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청했지요(누가복음서 17:4). “선생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그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6).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뽕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기어라’ 하면, 그대로 될 것이다.” 엄청나게 큰 믿음이 아니어도 됩니다. 겨자씨만한 작은 믿음만 있어도 됩니다. 글쎄요, 뽕나무가 바다에 심기어서 무슨 선한 결과가 나올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깨알만한 믿음만 있으면 말도 안 되는 일이 현실에서 일어납니다.
■ 오직 나의 영으로만
우리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를 말하지요. 성부 하나님은 전지전능 무소부재하신 분이지만 우리가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습니다.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을 도무지 가늠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꿈같은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사람과 똑 같이 생긴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성자 예수님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부활하신 이후에 승천하셨지요. 우리 곁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습니까? 이런 때를 대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바빌로니아에서 돌아온 스룹바벨이 성전을 다시 짓겠다고 했을 때 사람들이 비웃었지요. 그래서 스가랴 예언자가 호통을 치지 않았습니까? “시작이 미약하다고 비웃는 자가 누구냐?”
그 스가랴가 설명합니다(스가랴서 4:6). “힘으로도 되지 않고, 권력으로도 되지 않으며, 오직 나의 영으로만 될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은 우리 주변에서 보는 교회당이 아닙니다. 어마어마하게 큰 공사입니다. 그걸 힘으로 한다고요? 땅도 폐허에 인구도 듬성듬성 되는 유다 땅에 맨땅에 헤딩하러 돌아온 스룹바벨에게 무슨 힘이 있습니까? 그걸 권력으로 한다고요? 남의 나라에 끌려갔다가 천신만고 끝에 대국의 허락을 받고 총독 자리 하나 겨우 꿰차고 온 스룹바벨에게 무슨 권력이 있습니까? 힘으로 될 일이 아니에요. 권력으로 될 일도 아닙니다. 그럼 무엇으로 됩니까?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성령의 능력이란 이런 겁니다.
■ 맺는 이야기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에 초대교회 사람들이 성령을 받았습니다. 엄청난 일이 벌어졌습니다. 일자무식 촌사람들이 외국어를 유창하게 합니다. 평생 일어서지도 못했던 지체장애인이 벌떡벌떡 일어납니다. 마귀들이 픽픽 나자빠집니다. 이처럼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성령의 능력을 ‘은사’(恩賜)라고 하는데요, 성령의 은사는 병 고치는 은사, 말씀의 은사, 예언의 은사, 방언의 은사, 통역의 은사, 영을 분별하는 은사 등등 많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그 은사를 자기의 ‘재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병 고치는 것, 좋지요. 성령의 능력으로 사업이나 공부에 성공하는 것, 그것도 좋습니다. 시작은 미약하지만, 성령의 능력으로 창대하게 되는 것,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성령의 은사 곧 성령의 능력으로 기적을 이루는 데는 대원칙이 있습니다(고린도전서 12:1).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 주시는 것은 공동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나 혼자만의 유익이 아니라 우리의 유익, 공동의 유익을 위하는 일일 때, 겨자씨만한 믿음은 엄청난 기적을 만들어냅니다. 공동의 유익을 위하여, 믿음으로 기적을 창출해서, 시작이 미약하다고 비웃는 사람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