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출 32:1-4, 딤전 6:6-19, 눅 16:1-13
누가복음 15장에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같이 어울린다고 불평한데 대해 하신 말씀이 모여있습니다. 잃은 양을 찾는 일, 잃어버린 동전을 찾는 일, 그리고 잃었던 아들을 되찾는 일로 비유하시면서,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더 기뻐하신다고 알려주셨습니다. 16장에 와서는 비유의 주제가 바뀝니다. 연이어 재물에 관한 말씀을 하시는데,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누가복음의 기자는 이 청지기의 비유를 재물에 대한 말씀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예수님의 말씀과 교회의 이해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들이 있습니다. 예전 성경의 난제해설에서도 이 문제를 다루었지만, 오늘 다시 이 청지기의 비유를 다양한 각도에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다른 본문의 말씀과 연결해서 재물에 대한 우리 생각을 다시 정립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청지기는 서양의 부유한 가정에서 집안 일 전체를 관리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애굽에 팔려갔던 요셉도 그곳에서 신임을 얻어 집사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집사는 그 집안의 재산을 다루는 일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인물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이 청지기는 별로 신실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주인의 재산을 탕진한다는 소문이 들렸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그를 불러 시시비비를 따졌습니다. 변명할 길이 없게 된 청지기는 꾀를 냅니다. 자기의 운명은 그 집에서 쫓겨나는 것입니다. 아직 그 때를 대비할 시간이 있으니, 이제 그는 어떻게 그 때를 대비할지 생각했습니다. 그리고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불러와서 빚을 탕감해주기 시작했습니다. 후일에 자기가 쫓겨났을 때, 이들이 자기를 맞아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모습을 두고 주인이 칭찬했습니다. 그가 자기의 앞날에 대해 슬기롭게 대처했다는 것입니다. 비유는 여기까지 입니다.
이미 주인의 재산을 탕진했고, 또다시 주인이 받을 수 있는 빚의 규모까지 줄여버렸는데 칭찬이라니 납득이 잘 안됩니다. 그런데 비유로 하시는 말씀의 한 가지 초점에 집중하자면 예수님은 불의한 청지기의 슬기로운 대처를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8절 하반절에 예수님께서 설명하시기를,세상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살아가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했습니다. 그가 한 일이 의로운 일이든지 불의한 일이든지 그것을 따지기 이전에, 자기 앞날을 준비하는 것에는 지혜롭다는 뜻이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들은 빛의 자녀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우리가 맞이할 마지막 날 그 날을 슬기롭게 준비해야 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임하였다’ 하고 예수님이 선포하셨을 때에는, 종말론적 삶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심판이 영영 오지 않을 것처럼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준비하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그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도 마치 불의한 청지기가 자기 앞날을 준비하듯이 우리가 맞을 내일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말이 얼마나 가까운지도 모르고 살아가던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불의한 종 만큼이라도 슬기롭게 준비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나중에 믿고, 나중에 헌신하면 되지 하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주인의 불호령이 언제 떨어질 지 모르는 급박한 상황과 같습니다. 임박한 종말 앞에서 한시도 놓치지 말고 주님을 따르는 지혜로운 종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어떻게 종말을 준비할까요? 예수님께서는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서,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우리를 영원한 처소로 맞아들일 수 있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어렵습니다. 불의한 재물이 무엇인지, 아니면 재물 자체가 불의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게다가 그 재물이 없어진다고 해도 친구들은 우리를 영원한 처소로 맞아들일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방식으로 자기의 앞날을 예비한다 하지만 성도들은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습니다. 우리가 의지할 것은 친구가 아니라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현대어성경은 이 말씀을 뒤집어서 해석해 놓았습니다. ‘어디,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 보아라. 그가 너를 영원한 처소로 맞아들일 수 있을 것 같으냐?’헬라어 원문에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는 어떤 단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단히 창의적인 해석이긴 합니다. 결론적으로 성도는 세상 친구들을 의지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만을 의지하라는 반어적인 말씀으로 받아들일 일입니다.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이 큰 일에도 충실하다 하는 말씀이 이어지면서, 이제 이 비유는 어떻게 종말을 준비하는가 하는 데에서 충실한 종이 되라는 주제로 전환되었습니다. 남의 재산을 다루는 청지기 일조차 제대로 성실하게 수행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복음을 맡은 자로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하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복을 받기 위해서는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성실한 청지기로 살아야 합니다. 특별히 재물을 다루는 일에서 지혜로워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재물에 충실하다는 것은 마치 달란트 비유에서 더 많은 이익을 남기는 것과 같이 더 많은 이윤을 남기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달란트비유도 잘못 이해한 것일 뿐만 아니라 충실하다는 말도 오해한 것입니다. 재물을 축적해서 권력의 도구로 삼거나 그 무게에 짓눌려 사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돕고 살리는데 사용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물질의 축복을 주신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되게 하고,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13절은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 대해 마지막으로 덮여진 해석입니다. 앞에까지는 누가 혼자만 알고 있던 내용인데, 이 13절은 다른 복음서에도 등장하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초대교회에는 이미 재물 자체에 대한 입장이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하셨는데(마태19:23), 이 역시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뜻과 같습니다. 애초에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는 종말에 대해 준비하라는 것이었는데, 이렇게 재물 자체를 경원시하는 데에까지 해석이 발전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서 재물에 대한 해석에 초점을 맞춥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하신 말씀에 그 자리에 있던 바리새인들이 비웃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사람들(φιλάργυρος)이라고 성경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 생각에 돈은 권력을 가져다주는 도구였습니다. 돈은 명예를 주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사람들에게서 존경을 받는 것은 다 돈 때문이었습니다. 돈은 그들이 축복받은 사람들이라는 증거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돈은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들에게서 높이 평가받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는 혐오스러운 것이다’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신 것입니다. 돈이 결코 그들이 의로운 사람이라는 증거가 되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이들은 돈으로 자기의 불의함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돈 때문에 높임을 받는 것을 즐거워하면서, 그 돈이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데 사용되도록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달란트를 땅에 묻은 것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말씀하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재물은 사람의 눈을 가리고 욕심에 빠지게 합니다. 하나님이 필요 없기 때문에 믿음에서 떠나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돈을 사랑하는 것(φιλαργυρία, love of silver)이 모든 악의 뿌리라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분명하게 지적하기를, 이 세상의 부자들이 돈 때문에 교만해지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라고 했습니다. 돈이 악의 뿌리가 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출애굽기의 장면을 생각해 보십시오. 거기에 돈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사람들의 속 마음을 살펴보면 저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모세가 산으로 올라간 뒤, 백성들은 당장 불안해졌습니다. 아론에게로 와서 자기들을 인도할 신을 만들어달라고 했습니다. 아론은 사람들에게서 금붙이를 모았습니다. 그 금을 녹여 거푸집에 부었습니다. 그렇게 금송아지가 만들어졌습니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이스라엘아! 이 신이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희의 신이다’ 하고 소리쳤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금송아지 자체가 신의 형상이 아니라 신상을 받치는 제단이라고도 말합니다. 어떻든지 가시적인 무엇인가를 앞에 두고 그것으로 소망을 삼으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합한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금송아지가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습니다.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는 현실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제사를 드린 뒤 먹고 마시다가 흥청거리며 뛰어놀았다고 했습니다. 이미 송아지가 하나님을 대신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찾는 것 한 가지 입니다. 돈이 있든지 없든지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병든 종을 고치기 위해 예수님을 찾았던 백부장은 이방인이면서도 유대인 사회에 많은 돈을 기부해서 좋은 평을 받았습니다. 유대인 원로들이 대신 예수님께서 도와주시기를 부탁할 정도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겸손한 모습으로 예수님을 간절히 찾았습니다. 예수님을 그 백부장에게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보지 못했다 말하시면서 칭찬했습니다. 세상 어떤 것도 하나님을 대신 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지혜로운 사람은 아무리 돈이 많아도 결코 하나님을 놓지 않습니다.
사실 이 모든 것을 우리가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돈이 없음으로 해서 느끼게 되는 돈의 존재감이 너무 크기 때문에 우리는 쉽게 현혹됩니다. 돈이 많은 사람들이 유혹에 빠지는 것 이상으로, 돈이 없는 사람들 또한 심리적으로 또 현실적으로 어려움에 빠집니다. 그래서 속으로는 바리새인들처럼 비웃는 것입니다. ‘모르는 말씀 하지 마십시오. 돈 없으면 인간성도 다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분명하게 판단하십시오. 돈이 있어서 인격이 고결한 것입니까? 돈이 있어서 가정이 화목합니까? 돈이 있어서 교회가 부흥합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꾸만 돈을 하나님의 위치에까지 격상시켜서 하나님과 돈 사이에 어떤 선택을 해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애초에 돈은 사람을 위한 도구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권면하기를 ‘선을 행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아낌없이 베풀고, 즐겨 나누어주라’고 했습니다. 돈은 우리 모두가 맞이할 수밖에 없는 ‘앞날을 위해 든든한 기초’를 쌓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불의한 재물이라 할지라도 선한 일에 사용하면 되는 것이 아니냐고 묻지 마십시오. 불의한 재물은 재물을 쫓아가는 인생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돈을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참된 생명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일에 방해가 되는 모든 악의 뿌리를 잘라야 합니다. 영어에 RADICAL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과격한, 철저한, 근본적인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단어의 어원을 살펴보면 뿌리를 뽑는다는 데서 나왔습니다. 악의 뿌리를 뽑듯이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 그것 만이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거룩한 청지기로 서는 길입니다. 참된 생명을 주시려고 부르시는 주님의 부르심에 신실하게 달려가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