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 32:9~18, 요 16:16~24, 행 1:12~26
옛날 페르시아의 어떤 왕이 즉위하기 전에 나라의 모든 현자를 불러모았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한 가지 숙제를 냈습니다. 왕위에 오르게 되면 왕의 반지를 끼게 되지요. 그 왕의 반지에 새길 한마디 말을 찾아내라는 것입니다. 제왕의 반지에는 어떤 말을 새겨야 좋을까요? 왕은 어렵고 고통스러울 때 위로받고 힘을 얻을 수 있는 말, 그리고 반대로 아주 편안하고 즐거울 때 더욱 삼가고 겸손하게 하는 말, 그런 ‘지혜의 말’을 찾으라고 했습니다. 이거 정말 어려운 숙제지요. 더구나 어떻게 하루 만에 그런 말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왕의 명령이니 어쩔 수 없지요. 현자들은 밤새도록 머리를 맞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왕의 반지에 한 글귀를 새겨서 왕에게 올렸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왕은 아주 흡족해서 현자들에게 큰 상을 내렸습니다. 그 글귀가 무엇이지요? “이 또한 지나가리라!” 바로 이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명한 말이지요.
왕뿐 아니라 사람은 누구나 세상에 살면서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을 겪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힘든 일을 만났을 때 ‘이 또한 지나가리라’ 생각하면, 그래도 참고 견딜 만하겠지요. 반대로 우리가 살다 보면 즐겁고 뿌듯한 일도 생깁니다. 그런데 이럴 때일수록 더욱 조심해야 하지요. 그럴 때도 ‘이 또한 지나가리라’ 생각하면, 삼가고 조심해서 크게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참 좋은 말입니다. 우리에게 이 지혜의 말을 새길 왕의 반지는 없지만, 너무 힘들 때, 그리고 너무 잘 나간다 싶을 때도, 한 번쯤은 꺼내 볼 수 있도록 이 말을 마음에 담아두었으면 좋겠습니다.
페르시아 왕의 반지에는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고 새겼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의 마음 반지에는 어떤 말을 새기면 좋을까요? 특히 어렵고 고통스러울 때 무슨 말을 기억하면 좋겠습니까? 물론 우리에게는 우리를 위로하고 힘을 북돋워 주며, 우리가 넘어지지 않도록 든든히 붙잡아주는 많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문구를 무슨 부적처럼 사용하고 거기 기대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도 않지요. 그렇지만 그래도, 오늘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한마디 말을 좀 톺아보고 마음에 새겨보려 합니다. 오늘 우리가 받은 요한복음 본문에 있는 ‘조금 있으면’이라는 이 한마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본문에는 이 ‘조금 있으면’이라는 말이 자그마치 일곱 번이나 반복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볼 것이다” 하고 말씀을 꺼내셨지요. 그런데 제자들은 이 말씀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도대체 ‘조금 있으면’이라는 말씀이 무슨 뜻일까? 우리는 그가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모르겠다” 하고 말했지요. ‘조금 있으면’ 이 말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우선 먼저, 여기서 ‘조금 있으면’이라고 번역한 그리스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조금’은 그리스 말로 미크론(μικρον)입니다. 아주 극히 작다는 뜻이지요. 이 미크론은 거리를 나타내는 단위로 사용하는데, 1미크론은 0.001mm입니다. 사람의 눈으로는 식별할 수 없는 아주 짧은 거리입니다. 이걸 시간으로 치면, ‘잠깐’ ‘찰나’라고 할 수 있겠지요. 물론 예수님이 말씀하신 ‘조금 있으면’은 수치로 정확하게 계산해 낼 수 있는 시간은 아닙니다. 이 시간은 물리적 시간이라기보다 ‘의미’의 시간입니다. 아주 긴급하고 너무도 절박한 시간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시점과 상황입니다. 요한복음은 14장에서 16장까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간곡하게 당부하시는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그 바로 직전 13장에는 가룟 유다의 배신과 베드로의 부인 예고가 있지요. 그리고 바로 뒤 17장부터는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와 체포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그러니까 14장에서 16장에 이르는 상당히 긴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의 배반과 예수님의 체포 사이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아주 절박한 심정으로 마지막 당부하는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이를테면 세상을 떠나면서 남기는 마지막 유언과 같은 애틋하고 절절한 말씀입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예수님은 배반당하여 잡히시고 십자가 고난을 받으시고 돌아가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떠나가시고 악하고 험한 세상에 제자들만 남을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떠나시면 어떻게 될까요? 악하고 험한 세상에 남은 제자들은 어려움을 당하겠지요. 세상은 제자들을 미워하고 제자들은 박해를 당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스스로 힘든 일을 견뎌낼 수 있고 악과 싸워 이길 수 있는 단단히 여문 사람들일까요? 아니지요. 똑똑하다는 유다는 스승을 비열하게 배반했고, 단단하다는 베드로도 비겁하게 스승을 부인할 것입니다. 어려움이 닥쳐오자마자 나머지 제자들도 모두 바람에 흩날리는 검불처럼 흩어질 것입니다. 제자들은 불안하고 위태하고 유약합니다. 예수님은 이토록 불안한 제자들을 걱정하시며 애틋한 마음으로 간곡하게 마지막 당부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무슨 말씀입니까? 이제 곧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당하실 것이다, 예수님은 아버지께로 갈 것이다, 그 말씀입니다. 그러니 당황하지 말라는 말씀이지요. 그렇게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시면 제자들에게도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 닥쳐온다는 것입니다. ‘조금 있으면’ 곧 고난의 때가 옵니다. 슬퍼하고 절망하고 애통할 때가 옵니다. 그런데 그때,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조금 있으면, 비록 견디기 어렵고 너무 고통스럽지만, 그러나, ‘조금 있으면’ 그 고통의 때 또한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조금 있으면’ 인내하며 기다리면 예수님을 다시 볼 것입니다. 애통의 시간이 끝나면 기쁨의 때가 찾아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의 때에, 슬픔과 애통의 때에 기억해야 합니다. ‘조금 있으면’ 이 말씀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조금 있으면’ 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시고, 악한 세상에 남은 제자들은 고통받고 박해받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고난을 견뎌내고 이겨내야 합니다. ‘조금 있으면’ 그 고난은 끝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당하는 그 고통은 무엇일까요? 고통이란 단지 빨리 끝내고 지나가야 할 덧없는 것에 불과할까요? 고통이란 아무런 뜻도 의미도 없는 것일까요?
오늘 우리는 구약성서에서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함께 받아 읽었습니다. 이사야는 그저 평온하게 아무 걱정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 참 이상한 말을 합니다.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걱정거리 하나 없이 마냥 편안하게 산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사야는 안일하게 걱정 없이 사는 여인들에게 몸부림치고 몸서리치라고 말합니다. 그 몸에 두르고 걸친 옷을 맨살이 드러나게 벗어버리고, 거친 베로 허리를 두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베옷을 입고 몸부림치며 몸서리치고, 가슴을 치고 슬피 울며 통곡하라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아무 걱정 없이 안일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정말 대차게 경고합니다. ‘조금 있으면’ ‘일 년도 채 못되어서’ 폭삭 망한다고 막말을 합니다. 밭농사와 포도 농사도 망쳐서 가시덤불과 찔레나무가 자라고, 든든한 요새는 파괴되고, 붐비던 도성은 텅 비고, 망대와 탑이 돌무더기가 되어서 들짐승들의 놀이터가 될 것이라고 저주합니다. 이거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뭐가 문제일까요? 이사야가 마음이 너무 비틀리고 꼬여서 남 잘되는 꼴을 못 보는 사람이라서 그런 걸까요? 아닙니다. 그게 아닙니다. 문제는 정의입니다.
정의롭지 않은 재물을 가지고 아무 걱정 없이 사는 것, 그것이 문제입니다. 불의하고 악한 돈으로 모르쇠 안일하게 사는 것, 그것이 죄악입니다. 몸부림치고 몸서리치고 맨살에 거친 베를 두르고, 가슴을 치고 또 치며 울어야 할 죄악이 있습니다. 불의한 재물로 세상 편안하게 사는 죄,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 죄악의 옷을 빨랫줄처럼 둘러 걸치고, 끔찍한 죄악의 침상에 누워서 도무지 걱정할 줄 모르고 세상 편안하게 누리는 죄입니다. 이사야는 그런 자들에게 말합니다. 그들은 일 년도 채 못 되어서, ‘조금 있으면’ 무너지고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안일하게 사는 자들에게도 구원의 길이 있을까요? 그렇게 안일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살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몸부림치고 슬퍼하며 울부짖는 길입니다. 스스로 고통으로 내려가는 길뿐입니다. 이사야는 ‘조금 있으면’ 곧 닥쳐올 이스라엘의 파멸을 내다보면서, 걱정을 모르고 안일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영혼의 슬픔을 도무지 모르는 좀비 같은 사람들에게, 차라리 몸부림치고 몸서리치고 가슴을 치며 슬피 울라고 호소했습니다. 차라리 고통으로 온몸을 내던지라고 외쳤습니다. 그들이 슬피 울며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다시 하나님의 영을 내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애통하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제자로 사는 것은 어쩌면 애통하는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걱정 없이 안일하게 살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지신 것처럼 우리도 이 세상에서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갑니다.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사는 우리는 악한 세상을 보며 근심하고 걱정하고 슬퍼하며 애통합니다. 물론 우리가 슬퍼한다고 해서 우리의 슬픔으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그러나 우리의 슬픔과 고통은 아무 의미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슬픔으로 우리의 영혼을 지킬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의 고통은 생명의 고통이요 해산의 진통이라 하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슬퍼하지만, 그러나 ‘조금 있으면’ 우리는 기뻐할 것이고, 우리의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을 것입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부활절 일곱째 주일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40일 만에 하늘로 오르셨지요.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세상에서 예수의 증인으로 살아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의 증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그 십자가 고난의 길을 따라가는 것이지요. 제자들은 배신한 가룟 유다를 대신하여 맛디아를 뽑아서 열두 제자의 수를 채웠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영을 내려주시면, 그들은 다시 일어나 예수의 증인으로 세상에 나아갈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자들은 어떻게 고난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을 이겨낼 수 있겠습니까? ‘조금 있으면’ 예수님을 뵐 것이라는 약속과 희망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혹독한 박해를 당하면서도 그 고통이 해산의 진통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조금 있으면’ 이 한마디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위로와 희망의 말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비록 우리가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을 당할 때도 ‘조금 있으면’ 이 말씀을 기억하고 이겨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악하고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예수의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보혜사 성령께서 함께하시며 지켜 주실 것입니다. ‘조금 있으면’ 우리가 주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근심은 크고 놀라운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