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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해] 부활절(4-1) - " 와서 조반을 먹으라" / 오정석 목사

관리자 2023-04-25 (화) 14:35 1년전 685  

본문) 21:1~14, 63:7~14, 13:26~35

 

오늘은 부활절 네 번째주일입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찬찬히 살펴보면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에 나타나셔서, 부활의 소망과 기쁨, 그리고 사명과 책임을 다시금 불러 일으켜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의 복음서 본문인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왜 요한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세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라며 그 횟수를 기록해 놓았을까요?

먼저, 첫 번째와 두 번째 제자들에게 오셨을 때를 기록한 요한복음 20장의 말씀을 다시 보면, 두 번 다 사명과 연관된 이야기였습니다.

첫 번째 오셨을 때에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성령을 받으라. 그리고 죄의 문제를 해결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두 번째 오셨을 때에는, 주로 도마와 대화를 나누시면서,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더 복되다고 하시면서, 부활의 믿음이 바탕이 되는 사명 감당을 말씀하셨습니다.

, 이렇게 두 번씩이나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으로 확인한 제자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그간 동고동락했던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관계를 생각할 때, 예상할 수 있는 제자들의 모습은, 기뻐하고 또 기뻐하며 더할 나위 없이 감격해야 합니다.

 

그런데, 과연 제자들은 어땠을까요?

1절 말씀을 봅시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첫 번째와 두 번째는 만남의 장소는 예루살렘이었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 번째 만난 장소는 디베랴 호수입니다. 디베랴 호수는 갈릴리 호수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육체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두 번씩이나 만난 후에, 7명의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그들의 고향인 갈릴리로 갔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들은 도대체 왜 육체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또 사명을 감당하라는 간곡한 당부까지 받았는데, 왜 이를 거부하고 어부로 돌아가려 했을까요?

성경 안에는 더 이상 아무런 언급이 없기 때문에 그 이유를 찾아낸다는 것은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영성의 경험에서 보면 그 이유가 명확해집니다. 영성의 경험에서 얻어지는 중요한 결과 중에 하나가 자기 내면 성찰입니다. 내면 성찰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빛이 내면을 비추어서 거울로 얼굴을 보듯이 자기 내면을 봄으로써 가능해집니다. 평소에는 자기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거룩한 빛에 자신을 비추어 보는 영성을 경험하면, 자신의 본성과 악마의 본성이 똑같다는 것을 보고 알게 되고 소스라치게 놀라게 됩니다.

자신의 내면 속에서 가장 큰 죄인, 가장 큰 악마적인 본성을 보고 나면 비로소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자신을 긍정하던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되고, 자포자기와는 다른 자기 부정을 하게 되며, 결국 자기 신뢰나 공로를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진심으로 신뢰하는 상태가 됩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육체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이 경이롭고 다시 만남을 기뻐했으나, 동시에 예수님의 모습은 제자들에게 마치 거룩한 거울처럼 자기 자신을 보게 했습니다.

분명히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죽기까지 예수님을 따를 수 있다며 자신만만했고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자 욕심을 냈습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야 비로소 자기 자신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됩니다. 자신들이 무슨 소리를 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이쯤되니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제자들은 감히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고, 그간의 행동들이 너무도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 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할까요?

3절에서 베드로가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라고 한 말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자신의 내면을 성찰한 자로써, 예수님의 제자는커녕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서 어부가 되는 수밖에 달리 할 게 없다는 자기 부정의 표현인 셈입니다.

베드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다른 제자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고 나선 것은, 베드로와 같은 경험, 즉 자기 내면 성찰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7명의 제자들은 자기 내면 성찰을 통한 자기 부정의 마음을 가지고 수년 전에 버리고 떠났던 그물을 챙겨 고기잡이를 다시 시작합니다. 그런데, 배를 저어 고기가 있을 만한 곳을 찾아다니며 그물을 던졌지만 밤새도록 빈 그물이었습니다.

누구보다 갈릴리 호수에서의 그물질에 자신 있기에, 언제든 어부로 돌아가서 고기를 잡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새벽까지 빈 그물을 들어 올리면서 제자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또 한 번의 자기 부정이 일어납니다. 고기는 언제든지 잡을 수 있다는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달으며, 두 번째 자기 부정을 경험합니다.

 

이 때에, 어디선가 그들의 마음을 찌르는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예수님의 이 말씀이 제자들에게는 고기는 언제든지 잡을 수 있느냐? 어부는 자신이 있느냐?”라는 뜻으로 들렸습니다.

그리고 이구동성으로 대답합니다. “없나이다.” 이 대답은, 잘못 생각했습니다. 고기잡이, 어부, 우리는 그 어느 것에도 자격이 없습니다. 완전 초보, 완전 자기 부정의 대답이었습니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다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6절입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텅 비어있는 배와 텅 비어있는 그물과 함께 철저히 자기 부정, 완전한 초보의 텅 빈 마음에 이 어둠 속의 음성은 크고 강하게 울립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뭔가에 이끌리듯이 그물을 던집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텅 비었던 그물 속에 물고기가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 상황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물을 던지라는 하나님의 음성은 아무 때나 들려오지 않습니다. 자기 부정, 그것도 완전한 자기 부정에 도달할 때에 들려옵니다.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죠.

 

갑자기 일어난 일에 어리둥절해진 제자들은 몇 년 전 어부 생활을 접고 예수님을 따를 때 비슷한 경험(5:1~11)이 있어서 음성의 주인공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찾아오셨다는 것을 직감하자 베드로는 겉옷을 찾아 두르고 바다로 뛰어 들어 헤엄쳐 먼저 바닷가로 갔고, 그 뒤를 이어서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 주변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가보니, 육체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숯불과 숯불 위에 생선과 떡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밤을 새워 그물을 던진 제자들,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린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무슨 특별한 영적인 은혜가 아닙니다. 만선(滿船), 언 몸을 녹일 온기, 정성이 담긴 따뜻한 조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혼자서 여덟 명이 둘러앉을 만한 숯불을 직접 만드는 수고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혼자서 밤새 중노동에 시달린 장정 일곱 명이 배부르게 먹을 양의 떡과 생선을 구해서 먹기 좋게 미리 구워놓는 수고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아마 제자들이 평생 잊지 못할 예수님의 말씀을 한 구절 찾는다면 이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런 조반상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누구 한 사람 감히 떡과 생선을 가져다 먹을 수도 얼굴을 들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떡과 생선을 일일이 손에 쥐어 주시며 먹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세 번째 나타나심, 이것은 제자들을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시는 삼고초려였습니다. 오셔서 먹이십니다. 이보다 더한 설교, 이보다 더한 가르침, 이보다 더한 당부, 이보다 더한 것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어떤 자들인지, 하나님께서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 사랑 만큼 얼마나 기대를 하시는지, 그 기대와 바람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 구구절절 선포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절대로 거짓을 행하지 않는 자녀라고 하실 만큼 하나님의 무한한 신뢰를 한 몸에 받는 이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환난에 함께하셨고, 그들을 회복시키시고, 구원하시고자 끊임없이 사자(使者)들을 보내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사자(使者)로 보냄을 받은 선지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이후에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배신하고 반역했고, 마침내 이스라엘이 절망과 패망의 길에 접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친히 찾아오셔서 기회를 주셨을 때에, 자신들의 내면을 성찰하고, 자기 부정을 통해서 다시금 옛적 모세의 때를 기억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시내산 계약을 회상하고, 그 계약 공동체의 정체성을 회복하고자 했고, 마침내 하나님의 영이 그들을 평안의 길로 인도하시고, 그들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다시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철저히 자기 성찰을 통해서 자기를 부정하고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자들을 지금도 기다리십니다.

 

바울은 오늘 서신서 말씀인 사도행전에서 육체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서 비시디아 안디옥에 있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말씀을 전합니다.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구원읨 말씀은, 오늘 요한복음에서 제자들이 경험한 예수님을 그대로 전하고 있습니다.

, 삼고초려하시는 예수님, 자기 내면의 성찰을 통해서 자신이 곧 악마와 같은 존재라는 자기 부정을 하는 자들에게 기회를 주시는 예수님, 그 제자들을 찾아가셔서 친히 숯불을 피우시고, 생선과 떡을 구해서 준비하셔서 먹이시는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시는 예수님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이 예수님은,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시는시편 2편의 기록처럼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무엇보다 하나님의 일을 대행하는 분이시라는 것도 확실하게 전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러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이, 자신들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을 향해 삼고초려하고, 다시 기회를 주고, 자신의 것을 내어서 세상을 먹이는 사명자로 살아가는 증인이라는 이야기도 전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날의 교회는 이러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삼고초려의 사랑과 기회주심을 믿는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먼저 받은 하나님의 사랑과 기회 주심을 세상에 전파하는 통로요, 증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활절 네 번째 주일에, 방황하고 있는 우리를, 갈 길 모르는 교회 공동체를 세 번째 찾아오셔서, 다시금 사랑으로 위로로, 격려로, 그리고 깨우침으로 새롭게 하셔서, 먹이심으로 받은 사랑과 구원의 은총을 세상을 먹임으로 제대로 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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