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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해] 부활절(4-2) - " 삶에 이르는 죽음 " / 정상시 목사

관리자 2021-04-23 (금) 09:10 2년전 514  

본문) 욥 33:14-18, 23-28, 요 11:17-44, 고전 15:51-58


‘죽음에 이르는 병’, 덴마크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1848년에 쓴 책입니다.  그 책 서문은 요한복음11장 나사로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그 100년 후, ‘삶에 이르는 병’이라는 책이 한국에서 나옵니다. 한국 구약신학의 아브라함으로 불리는 고 김정준 박사(전 한국신학대 학장)의 책입니다. 그는 ‘관에서 나온 사나이’로 불립니다. 폐병 말기, 마산 결핵 요양소 죽음 병동에서 기적으로 살아납니다. 그가 이런 고백의 글을 남깁니다. "전에 내가 생각하기를 은혜가 시련보다 좋은 것이라고, 은혜를 간구하여 이것을 내가 가지기를 원하였고 내게 있는 시련은 이것이 없어지기를 빌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니 은혜만이 은혜가 아니고 시련도 은혜입니다“ 그는 후에 저명한 구약학 학자가 됩니다. 그 계기는 바로 결핵 요양소 생활이었습니다. 죽음 병동에서 매일 성경을 읽었는데 특히 시편을 애독하였고 시편 전편을 암송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후에 시편연구로 신학박사(엔디버러 대)가 되는 씨가 됩니다. 고난의 저주도 있지만 고난의 유익(시119:71)이 되기도 합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도 있고 삶에 이르는 병도 있습니다. 죽음도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도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느니라.....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서 지금도 말하느니라”(히11:4) 의인은 죽지만 말을 합니다. ‘말하는 죽음’입니다. 기억되고 증언되는 죽음입니다. 세월호 희생자들 죽음이 그렇습니다.  세월호 사건 7주년, 안산 4.16 기억교실을 다녀왔습니다. 그들은 죽었지만 말하고 있었습니다. 살아있었습니다. 죽음만 생각하는 것, 진정한 기억이 아닙니다. 그들의 증언을 듣는 것이 진정한 기억입니다. 기억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트라우마에 시달리다 자살한 사람도 있지만 트라우마를 이기고 다른 이웃의 눈물을 닦아 주는 새로운 삶을 사는 세월호 부모들도 있습니다. 죽음, 끝이 아닙니다. 시작입니다.      


선한 능력으로


어떻게 어떤 사람에겐 죽음이 끝이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죽음이 시작이 될까요? 삶에 이르는 죽음이 될까요? 어떻게 어떤 사람에게는 고난이 정금을 만드는 풀무가 될까요? 임마누엘 은혜의 옷을 입고 사느냐? 여부입니다. 그 임마누엘 능력의 가죽 옷을 입을 때 죽음 가시도 찌르지 못합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15:55) 그 은혜의 옷, 예복을 입고 잔치에 참석할 수 있습니다. 자기 옷 자랑하려고 예복을 입지 않으면 잔치에서 쫓겨납니다(마22:11-13) 자기 의(義) 옷을 벗고 하나님의 의(義)의 옷을 입는 것이 세상을 이기는 비결입니다. 

  

히틀러 나치에 저항하다 순교한 본회퍼 목사가 죽음을 앞두고 쓴 옥중 시, ‘선한 능력으로’라는 시입니다. “그 선한 힘에 고요히 감싸여 그 놀라운 평화를 누리며/ 나 그대들과 함께 걸어가네 나 그대들과 한 해를 여네/지나간 허물 어둠의 날들이 무겁게 내 영혼 짓 눌러도/오 주여 우릴 외면치 마시고 약속의 구원을 이루소서/그 선한 힘이 우릴 감싸시니 믿음으로 일어날 일 기대하네” 후에 지그프리트 피에츠라는 작곡가가 곡을 붙였습니다. 감동적인 노래입니다. ‘선한 능력’ 바로 임마누엘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 능력의 전신갑주를 입을 때 사탄의 불화살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욥은 동방의 의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통해서 비로소 하나님의 의를 깨닫습니다. 자신의 허물과 약함을 깨닫습니다. 바울도 바리새인으로 자기 의로 살았습니다. 자기 의(義)의 옷 자랑, 스펙 자랑했습니다. 그럴수록 점점 자신은 작아지고 초라해지고 절망에 빠져 들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절규했습니다. 그 절망의 늪에 빠졌을 때, 부활 예수께서 오셔서 주었습니다. 회개하고 거듭났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7:25) 바울의 회개, ‘삶에 이르는 죽음’입니다.   


베다니 마을,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 세 남매, 예수께서 사랑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요11:5) 예수 사랑의 옷을 입고 살았습니다. 베다니, ’슬픔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예루살렘 변방 달동네였습니다. 예수께서 그 마을에 자주 유하셨습니다. 그런데 베다니 마을, 나사로가 죽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절망이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물론 온 마을이 애통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오셨습니다.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11:33-35). 예수께서 오셔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말씀하시고 위로도 설교도 없었습니다. 그냥 비통해 하셨고 우셨습니다. 베다니는 마을 사람들도 함께 울었습니다(요11:33).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4) 특별히 예수와 함께 애통하는 자, 복이 있습니다. 고난도 예수와 함께, 예수 안에서 겪을 때 유익이 됩니다. 정금 같은 존재가 됩니다. 죽음조차도 새로운 시작이 됩니다.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는 복이 있도다”(계14:13) 바로 임마누엘 능력, 그 선한 능력 안에 사는 자는 죽어도 삽니다. 믿으시길 바랍니다.


거기서 나오라


나사로의 죽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상황에서 너도 울고 나도 울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도 울고 온 마을이 울음 바다였습니다. 예수께서도 우셨습니다. 비통과 슬픔의 바다였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계속 우시지 않으셨습니다. 눈을 들어 우러러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1:41-42) 그리고 외쳤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 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요11:44) 거기서 나오라! 나사로를 향해서만 하신 말씀 아닙니다. 베다니 마을 사람들, 그리고 슬픔과 절망의 늪에 빠져있던 마르다와 마리아를 향해서 외치신 말씀입니다. 아니 오늘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해방공동체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집트 종살이하던 히브리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거기서 나오라’ 그 부르심을 받고 응답하여 나온 백성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람을 불러내셨습니다. 교회도 불려나온 백성들입니다. 교회(Ekklesia), ‘밖으로 나온 사람들’라는 뜻입니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18:4) 예수께서 ‘나사로야 나오라’ 큰 소리로 부르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음성은 사라지지 않고 지금도 울립니다. ‘나사로’가 누구입니까? 나사로만이 나사로가 아닙니다. 나사로 죽음으로 비통에 젖어 있는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함께 울고 있던 베다니 마을 사람들, 죽음의 현실을 살고 있는 나사로들 많습니다. 7년 전 304명 세월호 희생자들, 그리고 그들의 죽음을 슬퍼하며 비통에 젖어 있던 사람들, 나사로들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그 비탄의 무덤에서 불러내셨습니다. ‘거기서 나오라’ 그리고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무덤에 갇혀 살고 있습니다. 죽음의 삶을 삽니다. 거기서 나와야 합니다. 세월호 사건을 기억하는 것, 비탄에 젖어 있는 것 아닙니다. 그 비탄의 무덤에서 나와서 해방 은총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묶인 사람들, 갇힌 사람들을 풀어놓아 다니게 해야 합니다. 세월호 희생자들도 풀어놓아 다니게 해야 합니다. 그들이 말하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세월호 기억법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베다니 사람들 함께 슬퍼하고 함께 울었으나 슬픔의 무덤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의 무덤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를 믿었습니다. 나사로가 말하게 하고 풀어주어 다니게 하였습니다.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히11:4). 우리는 죽음의 현실을 마땅히 슬퍼해야 하나 그 슬픔에 머물러 있을 일 아닙니다. 다윗은 “나의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시30:11)라고 노래했습니다. 성령께서 연약한 우리를 도우십니다. 슬픔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슬픔의 집, 베다니 마을 사람들, 임마누엘의 은혜로 슬픔의 무덤에서 나와서 해방과 환희 춤을 출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믿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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