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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해] 부활절(1-1) - " 부활 신앙의 걸림돌 " / 신솔문 목사

관리자 2020-04-08 (수) 14:19 1년전 1365  

본문) 출 15:13~21, 고전 15:20~28, 요 20:1~10


 1.


잊혀진 말 중의 하나가 ”예행연습“(豫行演習)입니다. ”리허설“이라는 말에 밀렸지요. 제가 종종 예행연습해보는 것은 임종입니다. 오래 전에 임종을 앞둔 고령의 권사님 곁에서 겪은 일입니다. 지병으로 인해 상당히 힘들어하셨는데요. 제가 찬송가를 불러드리니 평온해하시는 것이 역력했습니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찬송이었습니다.


내 주와 맺은 언약은 / 영 불변하시니

그 나라 가기까지는 / 늘 보호하시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 나 주님만 따라가리


전혀 경험해본 적이 없는 새로운 길을 가면서 그 권사님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만약 성도 여러분이 그러한 상황이라면 어떤 마음일까요? 권사님께서는 제 찬송가를 들으시면서 속으로 따라 하셨고 그 과정에서 주님의 위로하심을 경험한 것으로 보입니다. 저의 임종 예행연습은 찬송가가 아니라 이미지입니다. 제 아이가 공수여단에서 군복무할 때 얻어졌지요. 임종 직전의 마음은 아마도 캄캄한 밤에 고공의 비행기에서 미지의 세계로 강하를 해야 하는데, 그런 경험이 전혀 없는 일반인의 심정일 겁니다. 그러나 큰 걱정은 하지 않습니다. 비행기 안을 보니 영적 세계의 고수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안고 강하하려고 준비하고 계시니까요. 곧 그리스도 품 안에 안겨 성령의 바람을 타고 하나님의 대지(大地)에 안착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이 부활주일이라 성도 여러분들은 한 가지 궁금한 점을 문득 떠올리실 것 같습니다. 저의 예행연습 속에서 ”우리의 부활“은 어디에 있는가라고요. 하나님의 대지에 안착하는 것이 ”영화(榮化)된 존재로 하나님의 임재 속에 있는 것“을 비유한다고 할 때, 낙원이나 천국과 함께 부활은 이러한 하나님 임재의 한 국면(phase)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부활 국면이 낙원이나 천국 국면과 다른 점은 낙원이나 천국이 ‘저 세상’ 차원이라면 부활 국면은 ‘이 세상’의 최종 정리와 관련되었다는 점이지요. 인간의 역사를 어영부영 끝내는 것이 아니라 정식으로 매듭짓겠다는 하나님의 계획이 부활 국면에 담겨있습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으로 ”산 자와 죽은 자에 대한 심판“과 ”몸이 다시 사는 것“을 고백하는 것은 이러한 하나님 계획이 들어 있는 역사철학적 전망(展望)을 펼쳐보는 행위인 셈입니다.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고전 15:24~26)


이러한 부활 국면에 대한 스케치와 전망이 있는 말씀이 오늘 고린도전서 본문입니다.


2.


당사자를 기준으로 하고 논의(論議)를 성도에 국한할 때 부활에는 ”예수님의 부활“과 ”성도들의 부활“이 있습니다. 만일 성도들의 부활을 인정하지 않거나 이것을 예수님 부활과 다른 방식으로 이해한다면 미래의 부활 국면은 필요 없게 되고 사후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훨씬 단순해질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교인 중에 이런 생각을 하는 자들이 있었고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을 통해 이러한 생각을 바로 잡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11절의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에서 확인되듯이 1절에서 11절까지는 교인들과 사도 바울이 공통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쟁점을 언급한 내용이 아닙니다. 4절의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를 보면 일단 이들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사도 바울이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은 인정하지만 다른 사람에게서 발생하는 (예수님 방식과 같은) 부활은 인정하지 않는” 일부 고린도 교인들의 주장입니다. 12절~19절에서 사도 바울은 귀류법으로 이들을 설득합니다. 만약 그대들이 어떤 것을 주장하면 그대들에게서 앞뒤가 안 맞는 것이 나타나므로 그 주장을 버리라고 설득하는 방식입니다.


사도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을 인정하지 않았을 때 도출되는 귀결을 연쇄 논법으로 나열하는데요. 일련의 연결 고리 중 관건이 되는 것은 “만일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부활도 없다”는 조건문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죽은 사람의 부활도 없다“고 전반부와 후반부를 자리바꿈해도 무방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양자(兩者)가 함께 간다는 것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주장의 근거가 오늘 봉독한 말씀에 나오는데요, 간단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죽은 사람의 부활을 개시(開始)하는 첫 열매이고(20절) 차례대로 다른 열매가 이어진다(23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 때문에 다른 사람의 부활을 부정하는 것, 다시 말해서 이어지는 열매를 부정하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첫 열매를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고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인정하는 그대들에게 자가당착이 되니 그대들은 죽은 사람의 부활을 인정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15장 말씀을 세심하게 읽으면 흥미로운 점 하나가 드러납니다. 막연한 예상과 달리, 논의의 강조점이 예수님 부활에 있지 않습니다. 기정사실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방점이 예수님의 부활과 같은 일이 자신들에게서도 일어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2:18의 사람들처럼 몸의 부활이라는 예수님의 부활을 특수한 사례로 여기고 성도들의 부활(”일반적인“ 부활)은 다른 방식으로 설명해도 될 것 같은데, 왜 본문은 일반적인 부활을 받아들이라고 역설(力說)하고 있을까요? 한편으로는 죽은 사람의 부활이 신앙의 진리이기 때문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일반적인 부활을 강조하는 것이 예수님 부활 신앙을 지켜내고 성도들이 예수님 부활 신앙을 잘 수용하도록 돕는 목회적 조치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33절에서 일반적인 부활을 부정하는 것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는 악한 동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학자들은 실제로 일부 고린도 교인들이 일반적인 부활을 인정하지 않다가 예수님의 몸의 부활도 부정하지 않았을까 추정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부활을 인정하는 것의 중요성은 알겠는데, 문제는 사람들이 이것을 수용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예수님의 부활을 두고 시비가 많습니다. 하물며 일반적인 부활은 어떻겠습니까? 이러한 어려움은 신자나 비신자를 가리지 않습니다. 예수님 부활에 대한 것이든 일반적인 부활에 대한 것이든, 이러한 부활 신앙을 방해하는 걸림돌은 무엇일까요? 정확한 진단이 35절에 나옵니다.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우리 몸에 관한 경험을 가지고 부활을 판단해볼 때 부활이 가능한 것 같지 않다는 입장이 담긴 질문입니다. 우리 몸에 대한 경험이 부활 신앙의 걸림돌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대학 강의실 풍경 하나가 떠오릅니다. 강의 내용이 난해하긴 했지만 교수님 생각에 학생들이 기대만큼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질문들을 받으면서 자세히 설명을 해도 해결된 느낌이 없습니다. 그러던 차에 한 학생의 질문 속에서 학생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발견합니다. 기본적인 개념에서 혼동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교수님에게서 이런 말이 절로 나오지요. ”애고, 그래서 그랬구나!“ 36절의 ”어리석은 자여!“가 이런 마음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지닌 몸(신체, 육의 몸, 혼의 몸, 자연적인 몸)을 기준으로 부활의 몸(부활체, 영의 몸, 성령의 몸)을 판단하려고 하니 부활의 몸이 이해되지 않고 결국 부활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30센티 잣대를 가지고 하늘의 높이를 재려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고린도전서는 A.D. 50년대 중반에 기록된 책입니다. 비교적 이른 시기에 부활 신앙을 잘 수용하기 위한 처방이 제시되어 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이 처방은 초대 교인들 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들에게도 유효합니다. 먼저 우리의 신체를 가지고 부활의 가능성을 판단하는 걸림돌을 치우고 부활의 신비성(神祕性)을 인정하십시오. 그랬을 때 예수님의 부활은 물론 일반적인 부활을 진심으로 수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부활 신앙에 내재된 강력한 힘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 부활은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의의를 밝혀주는 조명(照明) 역할을 합니다. 힘이 센 자가 수모와 고통 속에서도 힘을 쓰지 않고 인내한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예수님 부활을 진심으로 수용하게 되었을 때 제자들은 비로소 예수님 십자가의 영적 가치를 깨닫고 깊은 신앙의 세계로 진입하게 되지요.


3.


오늘 요한복음 본문에서도 부활에 대한 이러한 접근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봉독한 말씀에 나오는 ”빈 무덤“과 ”예수님 부활“의 증거관계는 어느 정도일까요? 사실 강력하지 않습니다. 무덤 입구를 막는 돌이 옮겨진 것을 본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 부활보다는 시신 탈취를 떠올립니다. 베드로와 요한 역시 예수님의 시신을 감싼 세마포와 수건이 가지런히 놓여있는 것을 보고서 시신 탈취의 가능성만 낮춘 것으로 보입니다. 고린도전서에서 지적된 것처럼 제자들도 부활에 대한 판단을 인간 신체를 기준으로 하고 접근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제자들이 부활을 확신하게 된 것은 이러한 간접 증거 수집을 통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증거 자체인 부활의 예수님이 찾아와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도마 역시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뵙고 믿게 되었지요. 그렇다면 부활 신앙을 지니기 위해서 우리에게도 예수님이 찾아오셔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다른 접근을 요구하셨습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 증거를 넘어선 신앙의 비약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말씀처럼 인간의 신체를 기준으로 판단하는 사고 습관을 내려놓고 부활의 신비성을 인정하는 겸손함을 지닐 때 부활 신앙의 지평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출애굽기에서 예수 십자가가 “유월절 속량”이라면 부활은 “홍해 사건”입니다. 모세와 미리암과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사건의 역사를 찬양한 것처럼, 성도 여러분도 부활절기에 부활의 예수님께 그러한 찬양을 드리시길 소망합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셔서 우리로 하여금 부활의 역사에 참여하게 하신 예수님을 찬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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