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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4-2) - " 참 아버지와 아들, 부부가 되는 길 " / 어버이, 5.18광주민주화운동기념 / 김진수 목사 > 부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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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해] 부활절(4-2) - " 참 아버지와 아들, 부부가 되는 길 " / 어버이, 5.18광주민주화운동기념 / 김진수 목사

관리자 2019-05-11 (토) 09:34 4년전 3159  

본문) 사 25:1-9, 고후4:7-18, 요5:19-29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동영상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딕(Dick)’, 아들은 ‘릭(Rick)’입니다. 아들 ‘릭’은 태어날 때 탯줄이 목을 감아 산소공급이 중단되었고 이로 인해 뇌성마비, 경련성전신마비가 왔습니다. 평생 혼자 움직이지도 말하지도 못하고 살아야 합니다. 8개월쯤 되었을 때 의사가 말했습니다. “포기하십시오! 식물인간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을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아들 ‘릭’이 자라서 처음으로 컴퓨터로 쓴 단어는 “RUN! 달리다, 달리고 싶다!”였습니다. 아버지는 직장을 그만두고 아들과 함께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들이 15세 되었을 때, 아들을 휠체어에 태우고 8Km 자선달리기 대회에 처음으로 참가해서 끝에서 두 번째로 들어 온 날, 아들이 말했습니다. “난생 처음 제 몸의 장애가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1981년 첫 출전한 풀코스 마라톤대회에서는 1/4지점에서 포기했지만 다음해 다시 도전, 42.195Km를 완주했고 4년 뒤, 아들의 오랜 꿈이었던 철인 삼종 경기에 출전합니다. 수영도 할 줄 모르고, 6세 이후로는 자전거를 타본 적이 없는 아버지가 “미친 짓”이란 말을 들으며 장애인 아들과 함께 경기에 나섰습니다. 아버지는 허리에 고무보트를 묶고 3.9Km를 헤엄치고, 아들을 태운 자전거로 180.2Km의 용암지대를 달리고 아들이 탄 휠체어를 밀며 42.195Km를 완주했습니다. 아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버지가 끌어주는 보트나 자전거에 누워있는 것뿐 이었습니다. 아들이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없었다면 할 수 없었어요!” 아버지가 대답했습니다. “네가 없었으면 아버지는 하지 않았단다.” 아버지와 아들은 철인삼종경기 6회 완주했고, 마라톤 완주 64회, 단축 철인삼종경기 206회, 달리기와 자전거로 6,000Km 미 대륙횡단까지 마쳤습니다. 그 후에 아들이 컴퓨터로 쓴 글은 빌4:13절이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참 아버지가 되는 법(사25:1-9)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우리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어버이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주일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이 날, 이 땅에서 참 어버이가 되는 삶이 무엇인지를 되물어야 합니다.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드는 첩경은 이 땅의 아버지들이 아버지다운 아버지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청소년들이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 때문에 방황하고 아파합니다. 꿈을 꾸어야 할 젊은이들이 아버지와의 단절된 관계 때문에 깊은 절망에 빠져있습니다. 우리는 비교적 좋은 아버지가 아니라 참 좋은 아버지가 되어야 합니다. 

 

참 아버지의 본은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아담 이후로 인간은 늘 아버지 하나님의 통치를 떠나 자신의 욕망대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를 떠난 사람들은 반드시 그들보다 더 강한 세력의 노예가 되고 포로가 되었습니다. 자유와 기쁨을 잃고 죄와 사망과 어둠의 권세에게 붙들려 삽니다. 그러나 우리가 집중해서 살펴야 할 것은 참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어둠가운데, 죄와 사망의 권세아래 살고 있는 우리를 다시 회복시키시고 우리를 다시 하나님의 자녀, 그의 백성으로 구원하시는 방법에 대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참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오늘 구약본문에서 이사야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요 그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우상숭배와 더러운 죄악에서 벗어나도록 “강하고 포악한(사25장 3절)” 바벨론을 엄한 회초리로 사용했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이스라엘이란 큰 나무의 밑동을 아예 잘라버리셨다는 것입니다. 초강력 충격요법입니다.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은 그의 자녀 이스라엘을 잠시 바벨론의 포로로 두셨지만 더 놀랍게도 이 어마어마한 나라를 한 순간에 무너뜨리시고 그 성읍을 “돌무더기(사25장 2절)”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돌무더기 속에서 그의 사랑하는 자녀 이스라엘을 건져내십니다.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의 밑동을 잘라버리신 아픔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사랑을 보이신 것입니다. 어머니는 그렇게 못합니다. 아들을 감싸고 눈물 흘리시며 상처를 싸매시지요! 이런 일은 아버지가 할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버지십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모든 일은 갑자기 일어난 일, 충동적으로 하신 일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이 오래 전부터 이스라엘을 새롭게 하시기 위해 계획하셨던 일이었고 그 계획에 따라 하나씩 성실하게 이루어 오신 일이었습니다. “주는 기사를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1절)” 감격이지요! 이게 아버지 사랑입니다.

 

충격요법 하면 떠오르는 일이 있습니다. 제가 한신에 다닐 때 일입니다. 아마 1973년 쯤 일어난 일이지요. 당시 한신은 “프락치 사건”으로 뒤숭숭했습니다. 유신정부에 항거하며 시위를 준비할 때마다 우리의 정보가 바로 새나가는 것입니다. 서로를 의심했습니다. 정보부 미스터 공과, 북부서 최 형사 등과 가까이 지내는 사람을 우선 의심했고 우리 모의에 슬쩍 슬쩍 빠지는 사람을 지목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채플시간에 고 김정준 학장님이 설교를 하다가 교기(校旗) 앞으로 가셨습니다. 모두가 웬일인가 긴장했죠. 그런데 그의 손에는 날카로운 면도칼이 쥐어져 있었습니다. 학장님은 지체 없이 그 성스러운 교기를 들고 날카로운 칼로 그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숨조차 쉴 수 없을 만큼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순간 교기는 지울 수 없는 큰 상처를 입고 말았지요. 그날 학장님이 하신 말씀을 어떻게 잊겠습니까? “이 교기처럼, 지금 우리 학교는 서로 불신하고 의심하는 큰 상처가운데 있습니다. 우리는 외부적인 악에도 대항해야 하지만 우리 안에 있는 이 상처를 먼저 치유해야만 합니다.” 

 

학생징계를 요구하는 정부에 대항하여 모든 교수들의 불복종을 상징하는 “교수 삭발” 사건과  함께 이 “교기훼손(?) 사건”은 한신이 외부적인 불의에 대해 얼마나 강력하게 정의를 내세웠으며 또한 내부적으로 조그만 죄악과 불신에 대해 얼마나 엄격하게 대처했는지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남아있습니다. 아버지 교수님들, 그리고 아버지 학장님은 우리에게 부드러운 친밀한 사랑과 함께 충격적이고 강력한 모습을 통해 그의 제자들을 정의로운 아들들로 올곧게 키워내셨습니다.

 

참 아들이 되는 법(요5:19-29)

 

어버이 주일에 우리가 참 아버지가 되는 것에 관심을 갖는 만큼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참 아버지와 함께 참 아들이 되는 일입니다. 드물지만 아무리 아버지가 선해도 악한 아들이 나올 수 있고 아무리 악한 아버지라도 그 아래서 선한 아들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가 되려면 참다운 아버지와 함께 참된 아들이 세워져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서른여덟 해를 앓아누운 사람입니다. 목숨만 부지하고 있지 사실은 이미 죽은 자입니다. 마지막 소망을 가지고 베데스다 연못에 왔지만 물이 언제 동할지도 모르고, 더구나 맨 먼저 들어갈 가능성이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 사실 아무 소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를 고쳐주셨습니다(1-18절). 놀라운 기적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쳤다고 난리입니다. 이미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는데, 죽은 자 살아나고 병든 자가 치유되었는데, 이미 참 안식이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었는데 하나님 아버지의 구원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지금 이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들은 여전히 율법만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자는 이미 영생을 얻었습니다. 이미 심판에서 구원받았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는데 지금이 그 때라는 것입니다(25절). 예수님이 계신 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거기에 영생이 있고 부활이 있으며 구원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게는 늘 이 본문을 읽을 때마다 드는 다소 엉뚱한 질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왜 주님은 단 한 사람만 고치셨을까? 라는 질문입니다. 예수께는 전능하신 능력이 있지요! 저 같으면 그곳에 있는 모두를 단번에 고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 한 사람만입니까? 모릅니다,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해 보입니다. 아들 예수는 항상, 언제나 아버지와 함께했다는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19절)” 왜 한사람만인가? 그 속 내용은 모르지만 분명한 사실은 아들은 아버지가 시작한 곳에서 시작하고 아버지가 손 놓는 곳에서 함께 손을 놓았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가 일한 만큼, 아버지가 행하신 것 만 큼만 하신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을 임의로 사용하지 않고 아버지의 뜻에 제한시키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아들사이의 관계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답게 사는 것은 모두 가 놀랄만한 큰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릭’처럼 아버지의 몸에 연결된 고무보트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지요! 아버지의 자전거에 연결된 좌석에 앉아있는 것이지요! 아버지 하나님이 이끄시는 데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얼마나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보다 앞서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보다 앞서가는 것이 죄요 먼저 가는 것이 불의가 아니겠습니까? 

 

동시에 우리가 우리의 아버지에게 참 아들이 되는 방법 또한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든지 자의적으로 하지 않고 늘 아버지께 묻고 상의해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효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아버지 하나님 안에 있는 아버지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참 아버지이신 하나님 안에 있는 아버지께 순종하고 하나님 아버지를 떠난 아버지에게는 오히려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함으로 우리의 아버지가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는 아버지가 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께, 또한 육신의 아버지께 참 아들이 되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참 신부가 되는 법(고후4:7-18)

 

어버이 주일에 또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관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부부관계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 된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떤 부부관계를 가져야 합니까? 

 

성도는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입니다. 부활하신 분, 보배이신 예수님을 질그릇인 우리 속에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성도요 하나님의 자녀이며 권세 자들입니다. 우리에게 자격이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의 권세와 능력이 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낮아질수록, 우리가 죽을수록, 우리가 낡아질수록 우리는 더욱 영광스럽고, 존귀하며, 능력 있는 자가 됩니다. 우리가 고난 받을수록 우리는 영광스러우며, 낮아질수록 높아지며 버릴수록 부요해지고, 천해질수록 존귀해 집니다(7-18절). 아! 놀라운 그리스도인의 신비여! 우리가 죽을수록 예수생명은 충만해집니다. 우리 육신을 죽일수록, 주님을 위해 희생하고 버릴수록, 낮아지고 섬길수록 우리는 보다 존귀한 자가 됩니다. 

 

참 부부의 본은 예수님과 그의 신부인 교회입니다.(엡5:30-32) 남편은 신랑 예수께서 신부인 교회를 위해 자신의 몸을 주시고 죽기까지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들은 신부인 교회가 우리 주님의 말씀에 복종하듯이 복종하는 것입니다. 아내가 복종한 만큼 남편의 사랑은 크고 존귀해질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희생한 것만큼 기쁨으로 순종하고 복종할 것입니다. 어버이주일에 참 아버지, 참 아들, 참 부부가 되는 복이 넘치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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