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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2-1) - " 위로부터 나지 않으면 " / 서재경 목사 > 부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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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해] 부활절(2-1) - " 위로부터 나지 않으면 " / 서재경 목사

관리자 2019-04-25 (목) 15:59 2년전 2291  

본문) 에스겔 11:14-20; 로마서 6:3-14; 요한복음 3:1-15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니고데모가 예수께 말하였다. “사람이 늙었는데, 그가 어떻게 태어날 수 있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요한복음 3:3-4)

 

반복이냐 변화냐?

어떤 사람이 도박에 빠졌습니다. 한 번 도박에 중독되면 빠져나오기가 그렇게 힘들다지요. 그래도 다행히 이 사람은 가족 앞에서 앞으로 다시는 이 손으로 도박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며, 오른손을 끊었습니다. 정말 대단한 개과천선의 결의지요. 이 정도면 믿을 만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느 날 이 사람이 다시 도박장에 갔습니다. 그래서 찾아가 보니까, 이 사람, 왼손으로 도박을 하고 있었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맹세를 지켰다고 우겼다지요. 좀 살다보면, 사람이 변한다는 것이 정말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절절이 깨닫게 됩니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 말, 그게 그냥 하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이 많이 변한 듯한데, 그게 오른손으로 도박을 하다가 왼손으로 도박을 하는 꼴이라면, 얼마나 맥 빠지고 실망스럽습니까? 그 왼손마저 끊으면, 그 다음에는 발가락으로 한다지요?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신앙은 초지일관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또한 변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회개로 시작하지요. 회개는 변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바뀌고 그 생각이 바뀌고 그 삶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냥 그 껍데기만 변장하는 게 아니라 그 근본이 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거듭 변하여 마침내 성화에 이르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나지 않으면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왜 밤일까요? 또 니고데모는 어떤 사람입니까? 니고데모는 바리새파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유대 사람의 지도자였습니다. 그야말로 자타가 공인하는 연륜과 덕망을 갖춘 명망가였습니다. 그의 이름 ‘니고데모’도 이겼다는 뜻의 ‘니코스’와 사람이라는 뜻의 ‘데모스’를 합친 형태입니다. 승리한 사람, 성공한 사람, 완성된 사람이라는 뜻이겠지요.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이제 겨우 서른 남짓한 젊은이지요. 더구나 성전숙청 사건이 터진 직후에 사적으로 예수를 만난다는 것은 너무도 위험한 일입니다. 그래서 그는 밤을 타서 홀로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이미 완성된 사람, 이미 성공한 사람입니다. 아니, 이미 완성되고 성공하고 지도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요. 어른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무엇이 필요할까요?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해 줄 수 있을까요? 바로 그렇게 스스로 어른이라고 생각하는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아멘으로, 아멘으로!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말씀이지요. 정말 깊이 새겨들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누가 새겨들어야 할까요? ‘누구든지’입니다. 누구나 새겨야 할 말씀, 바로 내가 새기고 또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특히 어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더욱 새겨들어야 합니다.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무슨 말씀일까요? 니고데모도 이 말씀을 잘 이해할 수 없었나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이렇게 반문했지요. “사람이 늙었는데, 그가 어떻게 태어날 수 있습니까?” 맞는 말입니다. 다 크다 못해 이미 늙었는데, 무슨 수로 다시 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사람은 두 번 태어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난다’고 하셨을 때, 그 말은 두 번 반복해서 난다는 말이 아닙니다. ‘두 번’ ‘다시’라는 말은 ‘δευτερον’이지요. 여기서 ‘다시 난다’고 번역한 그리스 말 ‘ανωϴεν’은 ‘위로부터’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위로부터’입니다. 다시 난다는 것은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난다는 뜻이 아니라, 질적인 변화를 말합니다. 덧없는 윤회가 아니라 완전한 전환입니다. 아래로부터 난 것이 육으로 난 것이라면, 위로부터 나는 것은 성령으로 나는 것입니다. 사람이 육으로 나고 또 나고 백 번을 다시 난다고 해도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위로부터 나야 합니다. 영으로 나야 합니다. 

 

새 마음과 새 영을 받아

에스겔은 바벨론에서 노예처럼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예언자였습니다. 기원전 587년에 탄탄했던 예루살렘 성과 웅장한 성전은 참담하게 무너져 버렸고, 백성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지요. 에스겔에게, 그리고 유배되어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루살렘이 무너진 것은 참으로 절망스럽고 곤혹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언제까지나 그들을 든든히 지켜 줄 것 같았던 예루살렘 성벽이 어찌 그리 허망하게 무너질 수 있다는 말입니까? 어찌하여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의 성전이 그렇게 참담하게 허물어진다는 말입니까? 이제는 무엇이 그들을 지켜주고, 무엇이 그들을 이끌어줄 수 있을까요?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실까요?

이렇게 절망하는 백성들에게, 에스겔은 예루살렘이 무너진 이유를 성찰하여 밝혀 줍니다. 예루살렘 성벽과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이미 예루살렘 성전에서 떠났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 해괴한 우상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그 백성이 예루살렘을 포악하고 악독한 일을 꾸미는 도성으로 만들었고,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을 삶는 가마솥으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성과 성전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허무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방 땅에 잡혀 와서 포로생활을 해야 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에스겔은 고통과 절망에 빠진 백성들에게 다시 하나님의 약속을 전해 줍니다. 비록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졌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배되어 비참하게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을 찾아오셔서, 그곳에서 그들의 ‘성소’가 되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약속입니다. 돌로 만든 집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 자신이 친히 ‘성소’가 되어주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암담하고 고통스러운 이방 땅으로 찾아오셔서, 그들을 다시 모으시고 그들을 지켜주신다, 그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스라엘 백성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따랐던 그 역겨운 우상을 버려야 합니다. 그들의 마음으로 돌이키고 그들의 삶을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마음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영을 받아서, 돌 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살 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율례를 따르고,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다시 온전히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예루살렘 안에 산다고 해서 이스라엘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드나든다고 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이방 땅에 유배되어 산다고 해도, 하나님의 영을 품고 사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불의의 무기로부터 의의 무기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받지요. 우리는 세례 받은 사람을 ‘입교인’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이 세례란 무엇일까요? 바울은 세례를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는 것은,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가 다시는 죄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할 뿐 아니라, 또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도 연합합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함을 통하여 우리가 죄로부터 해방되었다면,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다시 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죄에 매여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살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새 생명 안에 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죄에 매여 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몸을, 우리의 삶을 죄에게 맡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지체를 ‘불의의 무기’가 아니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전적으로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율법 아래 사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은혜 안에 살아갑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오늘, 부활절 둘째 주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심으로써 우리도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죄의 종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 또한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저 낡은 삶을 반복해서 사는 게 아니라, 참되고 영원한 새 생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아래로부터’가 아니라 ‘위로부터’ 다시 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새 마음, 새 영을 모시고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불의의 무기’가 아니라 ‘의의 무기’입니다. 

십자가의 은혜와 부활의 능력이 우리 안에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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