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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해] 부활절(1-3) - " 죽은 무덤이 산 예수를 봉할 수는 없다 " / 김진수 목사

관리자 2019-04-19 (금) 13:25 5년전 3335  

본문) 욥19:23-27/ 고전15:1-11/ 막15:42-16:8

 

역사는 단순히 지나간 사실(Historie)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이 함유하고 있는 의미, 즉 사실에 대한 해석(Geschichte)입니다. 그러나 개별적이고 단편적인 역사를 하나로 이어가며 전체를 관통하여 하나하나로 완성하고 성취해 가는 역사가 있습니다. 소위 구속사라고 일컫는 이 역사(Heilsgeschichte)는 창조주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람과 온 우주만물과 함께 이루어 가시는 거룩한 역사입니다. 그리고 이 역사의 정점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 그 아들을 통해 이루신 “부활 사건”이 자리하고 있고 이 역사의 마지막에는 마침내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이루어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정의와 평화, 사랑의 통치가 실현되는 “예수 재림의 사건”이 있을 것입니다. 이 “부활 사건”의 빛 아래서 역사의 시작도, 현재도, 그 종말도 그 본 모습을 나타내 보입니다. 이 “부활의 사건”을 통해서만이 이 세속역사의 매듭이 풀리고 우리 삶 속에 가시처럼 박혀있는 한이 풀리고 인간의 운명적인 죽음과 슬픔과 절망의 결박을 풀어 헤칠 수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극복할 수 없는 장벽들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 풀리지 않고 있는 문제 중의 하나가 바로 ‘세월호 사건’입니다. 

 

세월호 사건으로 불리는 이 어두운 역사의 결박

 

5년 전에 일어난 ‘세월호 사건’은 어쩌다 한 번 일어난 단순한 해상사고가 아니라 우리 역사에 반복적으로 나타났던 어두운 결박입니다. 잊을만하면 또 나타나서 우리 역사에서 사랑과 정의와 평화와 자유를 송두리째 빼앗고 우리를 절망에 빠뜨리고 소망을 무너뜨리는 세력의 계략입니다. 이 역사를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손에서 빼앗아 어둠의 권세에게로 돌리려 하는 무서운 대적의 흉계입니다.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우리 현대사에도 이 어두운 결박의 흔적이 얼룩져 있습니다. 여순사건이 그렇고, 제주 4.3사건을 통해서도 나타났습니다. 4.19를 통해, 5.18 광주의 저 씻을 수 없는 아픔을 통해서도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불의한 어둠의 세력이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허물과 죄악을 감추고 역사의 진실을 숨기고 끝없이 왜곡하고 거짓으로 덮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허물을 죄 없는 사람에게 전가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의 아픔과 절망과 그 가슴에 쌓인 한은 5년이 지난 지금도 진행 중입니다. 아직도 사고의 이유가 정확하게 제대로 시원하게 밝혀진 적이 없습니다. 왜 구조 가능했던 충분한 시간을 허비했는지, 왜 저 죄 없는 어린 학생들을 구조하지 않았는지 납득할 만한 이유를 듣지 못하고 있고 그 사고의 책임자들과 신속한 구조를 방기한 사람들의 죄를 제대로 묻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정치인들은 이 역사의 어둠의 결박을 진지하게 풀려고 노력하는 대신 여태껏 정쟁으로 시간을 허비해 놓고는 아직도 세월호냐? 유족들은 아이들 팔아서 그만 장사해라, 세월호 징글징글하다 그만 우려먹으라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산 예수를 무덤이 봉할 수 없다(막15:42-16:8)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우리 역사에서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사건입니다. 제사장들,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은 예수를 제거하고 싶었습니다. 예수가 성전을 시장으로 삼아 막대한 이득을 올리는 자신들의 독점적 권한을 뒤집어엎었고, 로마의 폭정으로 가난과 질병과 고통 속에 있는 백성들은 다 니들 죄 때문이라고 외면하고 로마에 협력하여 로마가 보장해 주는 권한으로 만족하고 있는 자신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공격하는 예수가 눈에 가시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죽여야 자신들이 의인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는 자신들의 더러운 죄를 은폐하기 위해 예수에게 죄를 뒤집어 씌어 죽인 형틀입니다. 돌로 쳐 죽일 만한 죄를 찾을 수 없었던 유대인 지도자들이 예수를 따르는 많은 무리들의 저항을 피하기 위해 로마황제에게 항거하는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으로 고소했고 빌라도를 압박하여 로마의 형틀에 죽게 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에게서 십자가에 죽일만한 죄를 발견하지 못했지만 유대인 지도자들과 동원된 무리들의 요구를 거절할 경우 큰 소요가 일어나 자칫 더 큰 정치적 타격을 입을 것을 두려워 한 나머지 악하고 더러운 정치적 거래를 손을 씻으며 승인했습니다. 죄인들이 서로의 죄와 허물을 덮고자 서로 손을 잡았고 역사적으로 가장 거짓되고 추악한 거래를 통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했습니다. 그리고 죽은 시체를 무덤에 장사하고 그 무덤의 문을 성인 스무 사람쯤 동원해야 열 수 있는 무거운 돌로 덮었습니다. 그리고 봉인했고 로마병사로 하여금 무덤을 지키게 했습니다. 거짓과 탐욕으로 진실을 무덤에 묻고 봉한 것입니다. 죄의 능력 만세! 거짓 세력 만세!

 

그러나 오늘 마가복음 본문은 상상할 수 없는 너무 놀라운 일을 경험한 증인들의 증언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에게 청하여 분명이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무덤에 장사했습니다. 그리고 큰 돌로 그 입구를 막고 봉했습니다. 그 무덤을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유심히 보고 다음날 향유를 부으러 가면서 저 큰 무덤 문을 누가 열어줄 것인가를 염려했습니다. 그런데 그 무덤 문이 열렸고 무덤 안은 비어있었습니다.(막15:42-16:8) 산 예수를 무덤이 봉할 수는 없습니다. 죽음이 삼켰다고 죽음보다 강한 분이 죽는 게 아닙니다. 무덤에 봉해졌다고 진실이 봉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거짓과 죄의 세력은 삼일천하입니다. 오래 못갑니다. 예수의 시체가 부패하여 세포분열이 이미 시작되었을 때, 모든 것이 끝났다고 할 때, 참 생명을 삼킨 죽음이 무너졌고 진실을 가둔 거짓의 무덤은 열렸습니다. 예수 부활은 물론 인류를 절망으로 몰아넣는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입니다. 그러나 더 있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동시에 온갖 거짓에 대한 진실의 승리이기도 합니다. 죄악의 세력들이 손을 맞잡고 진실을 죽이고 매장하고 그 입구를 아무리 큰 돌로 막아도 진실은 막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의 부활을 통해 진실의 승리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습니다. 더 이상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합니다. 죄악은 덮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손등으로 하늘을 못 가립니다. 부활의 소망을 믿는 사람들은 마침내 진리가 거짓의 문을 열고 나오는 날이 이 역사가운데 일어난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심판 받아야 할 죄(욥19:23-27)

 

많은 세월호 유족들이 교회로부터 큰 상처를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다니던 교회에서 이제 그만 세월호 이야기를 덮자고 했다는 겁니다. 그 영혼들은 천국에 갔으니, 그들은 하나님의 품에서 위로를 받고 있으니 부모들도 일상으로 돌아가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 아이들은 부활의 날에 그 모든 아픔을 넘어 영광스러운 새 몸을 입을 것이니 더 이상 아무도 탓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서하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교회가 할 수 있는 바른 사랑일까요?

 

욥은 억울한 고난을 당했습니다. 이 고난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 원인을 모르고 이유를 모릅니다. 그래서 욥은 갑절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절친했던 친구들이 위로 차 찾아와서 그의 아픔과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습니다. “네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경건한 척 하지만 “숨겨져 있는 죄”를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유 없는 고난을 주시지 않기 때문에 네가 이 고난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회개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욥은 자신이 완전한 의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압니다. 다만 나를 비난하는 너희보다 내가 더 악해서 받는 고난이 아니라는 점을 누누이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친구들은 몇 번이고 거듭해서 다만 네 죄악을 회개하라 다그칩니다. 몸은 점점 죽음에 가까워 갑니다. 이대로 죽을 것 같습니다. 그가 마지막처럼, 죽음 앞에서 절규합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25절) 욥이 피를 토하듯 외칩니다. 내 대속자 내 아픔을 알아주고 나를 대변해 주실 분, 시시비비를 가려주실 분을 뵙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죽더라도 하나님을 뵙겠다”(26절) 시시비비를 가리겠다는 것입니다. 누가 옳고 그른지를 끝까지 따져보겠다는 것입니다. 이 억울한 고난을 풀지 않고는 죽을 수 없고, 내가 죽더라도 하나님 앞에 서서 그 분을 만나 뵙고 끝까지 이 억울함을 풀고 말겠다는 것입니다. 세월호 가족의 절규와 욥의 절규가 막 겹쳐서 다가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욥은 부활의 은총을 절규하듯 소망합니다.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26절) 우리 성경은 “육체 밖에서”로 되어있는 부분을 다른 대부분의 성경은 “육체 안에서”로 번역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킹 제임스 번역본, 새 번역, 라틴어 성경의 프랑스어 번역판 등) 루터는 25-26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내 구속자가 살아계셔서 이후에 나를 땅에서부터 깨우실 것을 내가 아노라 또 그 후에 내 가죽이 나를 둘러싸고 내가 내 육체 안에서 하나님을 보리라”(독일성서공회 해설 성경) 억울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욥에게 있어서 부활은 포기할 수 없는 유일한 믿음이었고 포기할 수 없는 소망이었습니다. 부활에 대한 소망이 없었다면 아마도 욥은 더 이상 그의 삶을 지탱할 이유가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부활사건은 하나님이 이루신 가장 놀라운 사건이지만 반드시 이 역사 안에서 이루어져야만 할 일입니다. 

 

심판 없는 부활은 거짓부활, 사이비 부활입니다. 십자가는 죄 사함 이전에 이루어진 죄의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시지 않습니다. 반드시 죄를 심판하십니다.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은 죄를 벌하시고 심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고난의 쓴 잔을 남김없이 받으셨습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역사상 가장 저주받은 죽음, 가장 큰 고통을 수반하는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완전한 죽음, 3일간 무덤에 갇혀서 지옥까지 내려가시는 죽음, 하나님이 외면하시는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우리 죄를 대신하여 당하신 죽음에서 하나님은 예수를 건져내사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죄에 대한 심판 없는 부활은 거짓입니다. 참으로 우리 사회가 거듭나고 건강한 사회가 되는 첩경은 죄를 숨기거나 덮는 것이 아니라 죄를 드러내고 미워하고 심판하여 잘라내고 참으로 회개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죄의 용서는 죄의 회개 다음에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이니까요!

 

십자가 없는 부활(고전15:1-11)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합니다. 고린도교인들은 예수의 부활생명에 참여하고 있다고 확신했으며(롬6:1-8, 골2:12) 성령 안에서 모든 것을 지금 다 누리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령 안에서의 성도들의 삶이 이 땅에서 아무리 아름다워도 여전히 고난의 현실 가운데 있으며 장차 주님 재림의 날에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 비하면 맛보기에 불과하다고 말씀합니다.(고후5:5, 엡1:13-14)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하나님의 모든 풍성함을 이미 다 누리고 있으며 특히 성령의 은사(방언)는 자신들이 천사와 같은 존재임을 나타내는 표시로 여겼습니다. “부활은 이미 성취되고 지나갔다”(딤후2:18)고 생각했습니다. 이미 다 승리했다고 여기는 “승리주의적 번영신앙”은 항상 십자가를 상실하고 현세의 성공에 취하기 쉽습니다. 모든 것이 성령 안에서 다 성취되었으니 더 이상 실패와 고난은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미 부활을 믿는 고린도교회에 참 부활이 무엇인지를 가르칩니다. 무엇보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참 부활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면서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고전15:3-4절) 옛사람이 죽지 않으면 새 피조물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죽어야 부활하고 낮아져야 영광에 들어갑니다. 이웃의 고통에 진정으로 함께하지 않는 십자가는 거짓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이웃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하고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요 부활입니다. 나 홀로 부활은 부활이 아닙니다. 부활은 공동체적입니다. 온 우주적 부활이요 모든 믿는 자들이 먼저 부활하고 새 예루살렘에서 모두가 함께하는 나라가 이루어 질 것입니다.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천국 소망으로 그만 울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고통을 감싸주고 함께 울고 함께 아파해야 합니다. 

 

<성령과 트라우마>(한국기독교연구소)의 저자 셸리 램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죽음의 상징 성금요일, 생명의 상징 부활주일 사이에 낀 토요일은 '죽음과 삶의 사이'입니다. 이 날은 두 날 사이에 낀 의미 없는 ‘중간’이 아니라 성령이 고통 속에 있는 우리와 함께한다는 것입니다.”(Shelly Ram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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