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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해] 부활절(5-1) - "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 / 최병학 목사

관리자 2018-04-24 (화) 00:42 6년전 2697  

본문) - 요15:1-11, 아2:8-17, 롬8:1-11

 

이충렬 감독의 <워낭소리>(2008)라는 독립영화가 있습니다. 경북 봉화 산골에 사는 최원균 할아버지와 나이 많은 일소와의 마지막 몇 년을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소의 평균 수명은 15년인데, 이 소는 나이가 40입니다. 할아버지와 함께 30년을 동고동락 한 것입니다. 영화를 보다보면 할아버지와 소의 관계는 주인과 가축 그 이상입니다. 영화 중반부를 넘어가, 귀가 잘 안 들리고 다리가 불편해도 소 먹일 풀을 베기 위해 매일 산을 오르는 할아버지나, 또 제대로 서있지도 못하면서도 할아버지가 고삐를 잡아당기면 쟁기를 끄는 소의 모습을 보면 할아버지가 소이고, 소가 곧 할아버지로 느껴집니다. 그래서 소가 죽었을 때 할아버지는 소를 땅에 묻어두고 비석에 이렇게 써 놓았습니다. “말 못하는 짐승이라도 나한테는 이 소가 사람보다 나아요.”

 

오늘 신약의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당신을 포도나무로, 하나님 아버지를 포도원의 농부로, 우리들을 포도나무의 가지로 비유하십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요15:1).” 따라서 예수님 안에 있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15:4).” 그렇습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다 이루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열매를 많이 맺게 되면 하나님께서도 영광을 받으실 것이고,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좀 더 나아가 사랑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15:9-10).” 이렇게 사랑 안에 거하면 예수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있어 우리의 삶에 기쁨이 넘친다는 것입니다. 부활절을 지내며 부활하신 주께서 이렇게 사랑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구약 아가서의 말씀 역시 이렇게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의 모습을 사랑의 언어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아2:10).” 사실 솔로몬 왕과 그를 사랑하는 술람미 여인의 사랑의 노래이지만, 예수님과 교회 혹은 성도들 간의 사랑 이야기로도 들립니다. 지금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습니다. 비둘기도 소리 내어 노래 부릅니다.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인가요? 사랑의 아름다움은 이렇게 눈이 부시게 감격스럽습니다. 

 

그러나 항상 사랑에는 방해물이 있기 마련,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가 사랑의 세레나데에 방해를 합니다. 사랑의 방해꾼 여우는 어떻게 사랑을 방해할까요? 아마도 간사한 혀로 사랑하는 사이를 이간질 시킬 것입니다. 그 예를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오셀로』에서 찾아볼까요? 사실 오셀로는 질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고지식한 오셀로 장군이 악당 이아고의 말에 넘어가 아내를 의심하고 질투를 이기지 못해 아내를 제 손으로 목 졸라 죽이는 치정 살인극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줄거리를 한번 볼까요? 주인공 오셀로는 베니스 공국에 고용된 무어인 장군입니다. 그 용맹함으로 인해 원로원의 신임을 얻습니다. 그리고 원로원 의원들은 오토만 터키인들의 공격에 대비하여 키프로스의 수비 책임자로 오셀로를 임명하게 됩니다. 그런데 원로원 의원인 브라반시오의 딸 데스데모나는 오셀로를 사모하여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오셀로와 결혼해 남편을 따라 부임지로 따라갑니다. 

 

사건은 오셀로의 기수인 이아고가 카시오에게 오셀로의 부관 자리를 빼앗긴 데 앙심을 품고 그들 모두를 파멸시킬 간교한 계획을 세우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오셀로는 이아고를 ‘정직한 이아고’라 부르며 절대 신용합니다. 그러나 결국 오셀로는 이아고의 계략에 빠져 아내 데스데모나가 부관 카시오와 부정을 저질렀다고 믿게 됩니다. 

 

『오셀로』에서는 모두 4사람이 죽습니다. 오셀로와 그 아내인 데스데모나, 로데리고(베니스의 신사), 이아고의 아내. 그런데 살해한 사람은 2사람입니다. 먼저 로데리고와 이아고의 아내를 죽인 이아고가 있고, 또 데스데모나와 자기 자신을 살해한 오셀로가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모든 살인의 진정한 원인은 뒤에서 범죄를 계획하고 사람들을 조종했던 이아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아고는 완벽한 살인 기술을 습득한 사람입니다. 그 기술은 ‘사람들의 정상적인 사회적 내성을 무너뜨리는 것’이자, ‘사람들 사이의 불화를 증폭시키는 방법’입니다. 최고의 기술이면서 동시에 가장 악랄한 기술인 것입니다. 

 

사랑스러운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란 누구일까요? 세 가지만 살펴보면 정확합니다. 첫째, 사람들의 정상적인 사회적 상식을 무너뜨리는 자, 둘째, 사람들 사이의 불화를 증폭시키는 자, 셋째,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자의 불행을 요구하는 자’입니다. 지금 세상은 여우와 같은 사랑의 방해꾼들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말씀에 순종하려는 성도들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국 사랑이 이깁니다.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기 때문(아2:16)’입니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사랑으로 속하였으며 포도나무와 가지처럼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워낭소리>의 할아버지와 소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그 의미가 가슴에 와 닿을 것입니다. 이것을 김상봉 교수는 ‘서로주체성’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서로주체성의 이념: 철학의 혁신을 위한 시론』 (도서출판길, 2007)에서 김상봉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와 내가 서로에게 배울 때, 나와 너는 서로를 모시고 섬기면서 서로 주체성 속에서 같은 주체가 된다. 서로 주체성이란 나와 내가 서로 같은 주체가 되는 것만큼 또한 서로 같은 객체가 된다.”

 

역사적 체험이 다른 공동체는 당연히 철학도 다릅니다. 사실 서양적 주체성은 편협하게도 자신과 동등하거나 자기보다 우월한 존재를 절대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이를 김상봉 교수는 ‘홀로주체성’, ‘나르시스적 주체성’이라고 말하며 이런 정신은 정복과 착취의 역사로 발현된다고 봅니다. 

 

따라서 김상봉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우월적 서양 철학은 보편성이 결여되었다. 만남과 연대를 통해 생성되는 서로주체성은 광주민주화운동에서 유례없는 구현을 이루었다. 광주항쟁은 타인의 고통에 목숨을 걸고 응답하려는 용기에 의해 촉발되고 지탱됐다. 당시 시민들이 이룩한 절대적 공동체는 세계사를 통틀어도 유례가 없는, 역사적 경험의 정점이다.” 

 

만남의 이념 위에 철학의 체계가 세워지기를 바라는 김상봉 교수의 서로주체성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근대적 주체론에 경종을 울린 것입니다. 김상봉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꺼이 남의 철학을 배우려는 겸손은 얼마나 고귀한 정신의 미덕인가? 하지만 만남과 배움이 자기의 정립이 아니라, 일면적인 자기상실을 낳을 뿐이라면, 그런 배움은 또 얼마나 비극적인 정신의 타락이겠는가? 그런데 이 땅에서 철학을 직업으로 삼은 자들이 보여준 철학은 그렇게 타락한 정신의 유희였다.”

 

하나님 나라는 직업 철학자들의 타락한 정신의 유희로는 이룰 수 없는 세상입니다. 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업적 신학자들의 타락한 영혼으로, 삯꾼 목자들의 거짓된 목회로, 허영과 세상의 성공을 쫓는 성도들의 삶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일구어 내 수 없는 것입니다. 현장과 강단의 서로상관성, 철학과 신학의 서로상관성, 삶과 말의 서로상관성으로 타자와의 서로주체성을 이룰 때 하나님 나라는 열릴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내 안에,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계실 때 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서신서 말씀인 로마서의 바울 사도의 이야기는 사랑으로 이기는 ‘승리의 선언’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사랑하는 여러분,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바울 사도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롬8:9-10).”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이 말씀처럼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죽을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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