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해] 부활절(7-1) - " 피의 땅에서, 평화를 구하라!" / 도시.농어촌 선교주일 / 이병일 목사
피의 땅에서 평화를 구하라.pdf
138.9K 2 1년전
본문) 사 32:9~18; 행 1:12~26; 요 16:16~24
지난 5월 18일(목)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늘에 오르셨다고 하는데, 아마도 여기에는 그 말을 문자 그대로 믿거나 그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처음교회 사람들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사도행전, 에베소서(1:20)와 히브리서(4:14)와 베드로전서(3:22), 그리고 사도신조에서 예수님이 부활한 후에 하늘로 올라갔다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간 것은 제자들을 남겨두고 떠나 가버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하는 상징은 우리가 하늘을 마시듯이, 보이지 않지만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심을 역설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묘사한 사도행전에서 예수님이 떠나가실 때에 제자들이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흰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이렇게 말합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하늘을 쳐다보면서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서 하늘로 올라가신 이 예수는,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을 너희가 본 그대로 오실 것이다.” 이는 부활한 예수님이 주신 사명을 기억하고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삶과 가르침을 통하여 함께 하신 예수님의 일을 계속하면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라는 말씀입니다. 모든 생명에게 기쁜 소식을 전할 때, 하늘에 오르사 하느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은 하늘과 같이 여전히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의 길을 따라 살려 하는 우리와 함께 일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 120여명이 다락방에 다시 모였을 때의 장면입니다. 그 무리들 중에는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함께 있습니다.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은 먼저 유다를 대신하여 부활의 증인이 될 사람을 뽑습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팔아넘긴 후에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자살했기 때문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유다가 목을 맨 나무가 박태기나무라고 합니다. 봄에 붉은 튀밥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꽃이 박태기나무 꽃입니다. 일부 지방에서는 밥티나무라고도 하고, 북한에서는 꽃봉오리가 구슬 같다 하여 구슬꽃나무라 하고, 그리스말로는 Cercis, 즉 칼처럼 생긴 꼬투리가 달린다 해서 칼집나무라고 부릅니다. 또한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가 이 나무에 목매어 죽은 나무라고 하여 유다나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나무 이름을 밝히지 않았고, 전승이 생겨난 것도 200년 정도밖에 되지 않으므로 그러려니 하면 됩니다. 프랑스 유다지방에 이 나무가 많아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 나무는 ‘더러운 죄인이 목 맨 나무’가 되었음을 너무 부끄러워 한 나머지 얼굴이 붉어졌고, 흰 꽃을 피우던 나무가 변하여 붉은 꽃과 붉은 가지를 가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아무튼 자연도 부끄러워한다는 생각이 이입되어 있습니다. 유다가 죽은 자리, 혹은 예수님을 배신하고 팔아 피 값으로 산 곳을 ‘하켈 드마(Hakel dema)-피밭’, ‘아겔다마(Akeldama)-피의 밭’, ‘하켈다마하(Haceldama)-피의 밭’이라고 합니다. 그 위치는 예루살렘 시온문 밖 힌놈 계곡이 끝나는 지점인 서남쪽에 있는 실로암 연못과 인접해 있습니다. 이 곳을 산 돈이 예수님의 피 값이라 하여 “피의 땅”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곳에 1874년 그리스 정교회 수녀원(St. Onuphrius)이 세워져 속죄와 기도의 장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아겔다마, 피의 땅은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곳곳에 있습니다. 불의한 돈으로 사들인 땅, 그리고 부정한 권력으로 지은 건물들, 가난한 사람들을 쫓아내고 지은 도시들, 노동자들의 노동뿐만 아니라 생명을 담보로 착취하여 이룬 기업들, 무고한 생명들의 희생으로 유지하려는 권력들. 이 모두가 아겔다마, 피의 땅입니다. 좀 더 엄격하게 말하면, 지금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이 아겔다마, 피의 땅에서 이룩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안일하고 평온한 듯이 걱정거리 없는 듯이 살고 있습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안일하고 걱정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심판을 선포합니다. 사람의 잘못으로 인하여 땅이 황패해 지고 농사를 망치게 되는 모습입니다. 밭농사와 포도농사를 망치고, 사람들이 살 던 곳에는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뒤덮게 됩니다. 사람들이 더 이상 살지 못하게 되는 것은 오히려 자연의 회복을 말하기도 합니다. 오늘에 비추어 말하면, 문명으로 이룬 모든 것이 파괴되고 무너져서 사람들이 살 수 없게 되는 상태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전기가 없이 며칠만 지나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전 세계에 있는 핵발전소와 핵무기는 지구 자체를 수십 번 폭파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전체가 아겔다마, 피의 땅이 되는 것을 막으려고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황패해져서 사람들이 살 수 없게 된 땅에서 다시 사람들이 살 수 있게 되는 것은 하느님이 자기의 영을 보내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고 50일 후에, 승천한 지 열흘 후에 하느님의 영이 제자들에게 내렸습니다. 하느님의 영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일하는 사람들을 연대하게 합니다. 사도행전에서 서로 소통하지 못하여 분쟁과 싸움이 일어나는 바벨탑 사건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면서 성령강림은 서로 하나 되게 하는 성령의 능력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성령은 서로 소통하게 하는 영, 텔레파시의 영, 하나 되게 하는 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양적인 언어로는 만물의 바탕이라고 할 수 있는 기(氣)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는 세상을 향해 불어오는 하느님의 입김으로서 하느님의 생명의 기운이며, 모든 생명이 생명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지니게 하는 바탕입니다. 하느님의 영, 거룩한 영을 받기 전에 제자들은 배반한 유다의 직분을 맡기기 위해서, 피의 땅에서 정의의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 일군을 뽑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제비뽑기는 이미 그 일을 감당하기에 충분한 사람을 뽑은 후에 마지막 단계에서 사용한 방법입니다. 제비뽑기를 하기 전에 그 대상자를 충분히 검토하고 선정해야 합니다. 무작위로, 아무나 되어도 좋다는 것이 아닙니다. “주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시는 동안에,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로부터 예수께서 우리를 떠나 하늘로 올라가신 날까지 늘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가운데서 한 사람을 뽑아서, 우리와 더불어 부활의 증인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행 1:21-22) 그렇게 선출된 사도는 맛디아(Matthias)입니다. 마티아는 당시 그리스 문화권에서 흔한 이름인 마티티아(Mttithiah: 야훼의 선물)의 약칭입니다. 열두 사도로 선출된 사실 이외에 그에 관해 알려진 바는 없으나, 후대 전설에 의하면 마티아는 예수가 파견하였던 72명의 제자(누가 10:1~12)가운데 하나라고 합니다. 마티아의 선출 이야기 외에 신약성서의 다른 어느 곳에도 마티아의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그의 이름으로 된 외경 복음서(Gospel of Matthias)가 있었다고 합니다. 열둘은 전통적으로 이스라엘을 나타내는 숫자이며, 열두 사도는 메시아적(的) 이스라엘의 종말론적인 대표자들입니다. 그들은 열두 지파를 상징하여 진정한 이스라엘의 기초가 될 사람들이기에 유다로 인해 생겨난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었습니다. 마티아를 뽑아서 열두 사도를 채운 것은 공동체를 온전하게 회복하여 하느님의 영을 받을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직무는 봉사하고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는, 광야에 공평이 자리 잡고, 기름진 땅에 의가 머물 것이다. 의의 열매는 평화요, 의의 결실은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다.”(이사야 32:17) 이 말씀이 더욱 간절하게 들리는 요즘입니다. 하느님의 영이 내려오면 공평과 정의가 이뤄질 것입니다. 정의의 열매는 평화와 편안과 안전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전체가 점점 더 누군가의 피 값으로 산 “피의 땅”으로 변해가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의 영을 먼저 받는 우리가 피의 땅에서 정의의 열매를 맺기 위해 나서야 합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의 큰 모토는 생명과 평화가 되었습니다. 이 평화는 살아 있는 모든 생명 혹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가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지 못합니다. 지금의 세상에서 자신의 평안과 행복은 어쩔 수 없이 다른 존재의 그것들을 침해하면서 얻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평화는 가까이는 자기 내적인 문제에서부터 멀리는 국가와 민족 간의 관계에 있어서까지 다양하고 방대하고 복잡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화에 대한 해결 혹은 대안을 모색함에 있어서 그 대상이 작은 것이든지 큰 일이든지 복잡하고 다차원적으로 고려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 우리는 자칫 갈망의 힘에 의해 허상을 좇아서 달음질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전능한 신의 능력이 개입하지 않는 한 평화를 이루는 일은 우리 인간에게 맡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화에 대하여 구조적으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 한국(남한)이라는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가 전 세계 혹은 주변 강대국들에게 밀접하게 얽혀 있는 경우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 설교문 분량이 초과하여, 첨부파일로 올렸습니다. 첨부파일을 보시면 전체 설교문을 보실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