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렘 23:1~4, 벧전 5:1~11, 요 21:15~19
오늘 구약의 말씀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고 자기 생각과 욕심대로 행동하다 결국 하나님의 백성을 고통 가운데로 몰아넣은 유다 왕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입니다. 이스라엘에게서 왕은 하나님의 대행자로서, 백성을 책임지는 목자와 같은 존재임을 성경은 분명히 증거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 목자 된 유다의 왕들이 그 주어진 책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여 그들에게 맡겨진 양 떼, 곧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의 포로로 잡혀가는 고난을 겪게 되었음을 지적합니다. 이에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준엄한 심판의 칼을 들어 하나님을 거역하고, 악을 행한 목자들에게 분명한 벌을 내리고, 징계할 것임을 선포합니다. 악한 목자에게 그에 합당한 보응을 하고, 선량한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다시 선한 목자를 세워 약속의 땅, 유다로 회복시킬 것임을 오늘 예레미야는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분열되고,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는 지금의 현실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보고 책임지도록 위임받은 목자(왕)의 잘못임을 분명히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는 목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한 지적이기도 합니다. 목자가 어떻게 역할을 하느냐에 따라 그에게 맡겨진 백성들의 삶도 180도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오늘 예레미야 선지자의 지적은 오늘날 하나님께 부름 받은 목자들을 향한 질책과 성찰의 소리이기도 합니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명의 중요성을 알고, 자신들의 행동이 초래할 결과에 대해 무거운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는 경고이자, 질책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오늘 복음서를 통해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고쳐 물으셨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불과 며칠 전 예수께서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예고하셨을 때 ‘절대로 그렇게 놔두지 않겠다’ 호언장담했던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장담하고 몇 시간 지나지도 않아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했습니다. 대제사장 무리들의 서슬 퍼런 위협이 베드로에게까지 미쳐오자 두려움에 사로 잡힌 나머지 예수는 자신과 상관없다고, 자신은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던 것입니다. 물론 새벽 닭 소리에 통곡하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후회하기는 했지만, 제자 베드로의 다짐과 결단이라는 것이 바람 앞의 촛불과 같이 연약하고 헛된 것이라는 점을 성경은 보여주었습니다. 물론 이는 베드로만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던 백성들이나 다른 제자들도 그 정도의 차이만 있었을 뿐 눈 앞에 칼이 들어오고, 생명의 위협을 받는 현실에서 그들의 선택은 부인이나 회피, 외면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그들에게 더 큰 혼란과 두려움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의 기쁨과 동시에 예수님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고, 부인했다는 죄책감이 공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가장 먼저 자신이 아끼고 사랑하셨던 제자들을 찾으셨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죄책감에 빠진 그들을 회복 시키고, 격려하여, 다시금 굳건한 믿음의 반석에 서도록 만들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세 번씩이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음을 증거합니다. 연약하고 부족한 제자들이 부활 신앙으로 다시 무장하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 그 사명을 다하도록 세심히 그들을 먹이시고, 돌보셨던 것입니다. 마치 유다 왕들이 잘못된 행실과 판단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파멸과 고통으로 몰아 넣자 새 목자를 예비하여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셨던 것처럼, 부족한 제자들에게 확고한 부활 신앙을 심어 주셔서 그들이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 위에서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도록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요한복음의 말씀은 제자 베드로와의 대화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십니다. 주목할 것은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반복적으로 물으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베드로가 과거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정말 분명한 부활 신앙으로 준비되었는지, 다시는 흔들리지 않고 주어진 사명에 집중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이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 했던 행동에 대한 질책이나, 추궁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다가와 먼저 그를 먹이시고, 회복시키셨기 때문입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피폐한 베드로를 아무말 없이 격려하고, 먹이심을 통해 그가 예수님이 아끼고 사랑하는 제자라는 사실을 먼저 확인시켜 주었던 것입니다. 그다음 그에게 확인하신 것이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준비되었느냐? 네가 주어진 양 떼를 끝까지 지킬 수 있느냐? 고쳐 물으셨던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물음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를 향한 물음이기도 합니다. 이 시대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할 일은 주변의 잘못을 찾고, 주변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먼저 상처받고 지친 영혼을 찾아, 어루만지고 회복시키는 일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상처받고, 아파하는 그들을 먼저 회복시킨 다음, 그들을 사명의 자리로, 헌신의 자리로 인도하는 것이 우리들의 책무라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세 번씩이나 방문하셨던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의 목적은 제자들을 질책하고, 비판하는 데 있지 않고, 그들이 겪은 아픔과 상처를 먼저 어루만져 주시고,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굶주린 그들을 먼저 먹이고 회복시키는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물음은 그 어떤 비판이나 질책보다 더 무서운 채찍이 되고 있음을 성경은 보여줍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고쳐 물으시는 예수님으로 인해 베드로는 근심했다 성경은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사랑하느냐? 라는 물음 안에 담긴 예수님의 마음을 베드로가 너무나 잘 알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베드로가 준비됐음을 확인한 예수님은 ‘내 양을 먹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성경은 장차 베드로와 제자들이 감당할 사명의 길이 결코 쉽지 않은 고난의 길이 될 것임을 분명히 증거합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이 나아가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이 세상 모든 백성을 돌보고 책임질 목자로, 사도로 선택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베드로전서는 박해와 고난의 때를 살아갔던 사도들의 현실을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은 초대교회 지도자와 성도들을 향한 권면입니다. 베드로전서는 교회를 향한 강한 박해를 배경으로 기록된 서신입니다. 이 가운데 오늘 말씀은 초대교회 지도자인 장로와 성도들에게 눈 앞에 놓인 고난과 시련에 구원의 길을 포기하지 말라 당부하며, 끝까지 믿음을 지켜 승리하라 권면합니다. 베드로전서 기자는 장로들을 향해 하나님께 성도들을 위임받은 목자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장로라는 지위는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직분임을 강조하면서, 맡겨진 성도들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원함으로 돌보며, 강권하지 말고 양무리의 본이 되라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장로들의 지도를 받는 성도들을 향해서는 교회의 지도자인 장로들의 가르침에 복종하고, 겸손히 서로를 아끼며 섬기라 권면합니다. 그러면서 장차 일어날 일에 대해서는 걱정과 염려는 주께 맡기고, 믿음을 굳건히 하여 담대히 맞서라 권면합니다. 다가오는 박해와 핍박 가운데 나타날 장로들과 성도들의 모든 노력은 하나님께서 기억하고, 칭찬하실 것임을 성경은 분명히 약속합니다.
이는 이 땅을 사는 모든 성도, 목자로 세움 받은 교회의 리더들을 향한 성경의 약속이고, 가르침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만족을 두고 주어진 현실에 헌신하고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챙기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직접 챙기실 것이요, 우리가 할 일은 주어진 사명에 충성하며, 주의 몸 된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진리가 살아있음을 세상에 드러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름 받은 성도의 본분이라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오늘 세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의 거룩한 대행자로 살아가는 우리를 향한 귀한 가르침이 됩니다. 오늘날 우리의 환경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보다 권력을 탐하기에 힘쓰고,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내기 보다는 부귀영화를 자랑하기에 바쁜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우리는 더 많은 이득을 위해, 더 큰 권력을 위해 진실을 외면하고 현실에 타협하며 살아갑니다. 마치 유다의 왕들의 다가오는 외세의 위협 앞에 하나님께 무릎 꿇고 회개하며, 하나님만을 의지하지 않고, 주변의 힘있는 외세를 의지하고, 바알을 찾아 하나님과 겸하여 예배했던 그 모습이 우리 안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로 내몰았던 자들의 위협 앞에 부인하고, 저주했던 베드로의 연약함이 우리 안에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물음은 우리의 가슴을 찌르는 비수가 되고, 아픔이기도 합니다.
그 가운데 오늘 세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 뜻 안에서 거룩하게 성별 받은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과 조건에 신경쓰지 말고, 최선을 다해 주 뜻대로 충성하고 헌신하라 명령합니다.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오직 하나님 말씀에 집중하며, 최선을 다해 부름받은 백성으로서, 목자로서의 사명에 충실하라 명령합니다. 그것이 우리들의 본분이요, 그것이 하나님의 칭찬을 사모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고자 하는 우리들의 자세임을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는 예수님의 물음이 귀에 쟁쟁한 오늘, 예수님을 사랑하는 만큼, 예수님처럼 세상을 품고, 세상의 본이 되며, 세상을 사랑하는 목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5월은 가정의 달이고, 사랑의 달이기도 합니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있고, 성년의 날, 스승의 날도 있습니다. 부부관계의 중요성을 일깨우기 위해 제정된 부부의 날이 있기도 합니다. 이 모든 날들의 바탕은 사랑입니다. 사랑의 기초 위에 각각의 대상에 대해 생각해 보자는 것이죠. 어린이 날에는 어린이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보호받아야 할 어린이의 인권에 대해 생각하고, 어버이 날에는 부모님에 대한 사랑을 기초로 자녀를 위해 희생하고, 애쓰신 부모님의 은혜를 기억하자는 것입니다. 스승의 날도, 부부의 날도 모두 각각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것의 기초가 되는 사랑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이요, 나보다는 상대를 우선 순위에 둔다는 것입니다. 그의 몸짓, 손짓, 눈짓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고, 그의 말 한마디도 흘려듣지 않고 집중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닮아가는 것이요, 차이를 좁혀가는 과정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물음은 네가 나를 닮고 있느냐? 너와 나의 차이가 좁혀 졌느냐?는 물음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닮고 따라야 할 분은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그 예수님이 먼저 우리 손을 잡아 주셨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 희생으로 우리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먼저 사랑해 주셨고, 예수님이 먼저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가 예수께 받은 사랑만큼 사랑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예수 닮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선한 목자되신 예수님을 따라 이 땅을 돌보고, 이 땅의 백성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거룩한 믿음의 목자들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