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 43:8~13, 행 10:34~43, 요 20:19~31
1. 구원자 하나님 (사 43:8~13)
구약 본문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선민의 나라가 멸망을 당하고 사라진 후,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어떻게 임하는가를 보여줍니다. 영원하리라던 다윗 왕가가 무너졌습니다. 제국으로 발돋움하는 듯했던 이스라엘은 속에서부터 썩어가고 있었는데요, 눈앞의 이익을 위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과 민족정신을 분열시킨 망국적 정치가 주요인이었습니다. 또한 백성에게 과도하게 부과하여 얻은 재정과 노동력으로 이룩한 국가의 부요함은, 백성의 고혈로 건설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유대왕국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적나라하게 기록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유대왕국의 국왕과 신민들이 하나같이 여호와신앙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세상적인 탐욕과 육신적인 정욕을 쫓아 마치 이방인처럼 제마음대로 살아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제사장나라로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셨지만, 저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의와 공의를 실행하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당장의 쾌락과 탐욕에 눈이 멀고 말았건 것이죠. 그로인해 하나님께서 더이상 보호하지 아니하시므로, 신바벨론제국 갈대아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은 점령되었고, 유대왕국은 지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나 구원의 날이 선포됩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을 이끌어내라”(사43:8). 폐허가 된 땅, 희망이 사라진 저들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알아야 했습니다.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43:11). 이제 하나님의 때가 임할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행 10:34~43)
그렇게 이방인처럼 살아감으로써 하나님 백성과 이방인을 구별할 수 없게 된 때, 고넬료라 하는 한 이방인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민으로 자부하던 저들의 눈이 열립니다.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10:34-35). -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 - 아멘. 베드로의 입을 통하여 우리는 오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고백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줄로 믿습니다.
죽었던 이스라엘을 살리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모든 백성, 만인에게 임하는 성령으로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함께 (10:38)을 읽으실까요?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이제 예수께 임했던 그 성령의 기름 부음이 제자들에게 임했습니다.
3. 성령을 받으라 (요 20:19~31)
부활하신 주님은 그날 저녁, 제자들이 모여 피신해 곳에 나타나셨습니다. 어느 누구도 문을 열지 않았음에도, 안으로 들어오신 주님을 보고, 귀신인가 하여 두려워하는 이제는 한 갓 초라한 겁쟁이가 돼버린 나약한 제자들이 애처롭기까지 합니다.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요20:20). - 그제서야 예수님을 알아보곤 안도하며 기뻐하는 제자들. 우리와 너무 닮아보입니다. 평소에 아무리 말씀을 보고 들어도 상황이 악화되면 믿음은 온데간데 없고, 걱정과 슬픔 두려움에 휩싸이는 저도 그러합니다.
아내가 아픈 것을 넘어서 암이라는 진단 앞에서 온갖 상상과 경우를 생각하면서 근심할 수 밖에 없었던 제 모습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20:21-22). - 아멘.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불러 넣으신 그 주님, 이미 우리에게도 오셨음을 믿습니다.
구원은 유대 왕국의 회복에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은 예수의 오심과 성령에 근거합니다. - 그런데 우리는 성령이라하면 불과 같은 뜨거운 것, 방언과 병고침과 같은 은사를 먼저 떠올리는 그릇된 전통에 사로잡혀있습니다. 본문대로라면 성령은 ‘하나님의 숨결’입니다. 그것은 선을 행하고 이루며,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이끄는 힘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성령과 관련하여 한 가지 현상에 집착합니다. 많은 교회들이 ‘성령충만’이라는 문자에 잠식되어 감정이 뜨거움. 마음의 열정이 증폭되는 것을 성령 충만으로 확신합니다.
그렇지만 성령의 근거는 감정에 있는 게 아니라, 전인격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성령은 잘됨과 성공과 같은 만사형통과 툭별한 은사를 갖게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게하는 힘이며, 선을 추구하며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며 희생하는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4. 성령 하나님
"성령이 넘치면 언제나 은혜로 얼굴이 환해요"라는 복음성가 가사가 대변하듯, 한국교회에서 성령은 지금 당장이라도 수백 명은 전도할 수 있을 것 같은 '충만함'을 선사하고, 어떤 근심도 걱정도 없는 상태로 만들어 주며, 늘 하나님을 찬송하고 덩실덩실 춤추게 하는 '넘치는 기쁨'을 공급해 주는 현상을 떠올립니다.
이러한 왜곡 때문에 사람들은 성령을 열성적으로 추종하면서, 그 성령이 내 삶에 어떤 '활력'과 '효용감'과 '만족'을 주는 것으로, 배고픔과 경작의 수고 없이 떡을 맛보는 것, 위험 상황을 직면하되 진짜 위험은 없는 것, 고통스러운 거절에 대한 불안 없이, 유명세와 권력을 누리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십자가 없이 면류관만 쓰는 삶을 향한 달콤한 선동으로, 기독교를 부와 권력과 명예의 수단으로 삼은 것입니다. 거룩한 영, 성령은 반복되는 일상의 아주 단순하고 소박한 순간에 깃들어 존재합니다. 성령이 깃든 사람은 절망스런 순간에도, 심지어 병들어 죽어 가는 순간에도 거룩한 영으로 충만 할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욥은 하나님의 대적으로부터 시험을 당하는 처참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을 하루하루 살아가도록 지탱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라고 (욥 27:3)을 통해 고백합니다 그는 삶과 죽음 양쪽에 한 발씩 걸친 상태에서, 생명을 가져다 주는 거룩한 영이, 실제로 어떻게 일하는지 그 현실을 똑바로 바라본 사람입니다.
다니엘은 거룩한 영으로 충만한 사람이 쉬이 갖게 되는 '특별하게 살아야 한다'는 야망으로부터 비켜 간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그가 페르시아의 고위직에 올라갔다는 것에 주목하지만, 정작 다니엘은 그런 지위를 얻기 위해 야망을 불태우거나 간구한 적이 없습니다. 그는 왕이 바뀌고 나라가 바뀌는 긴 시간 동안, 단순·소박한 삶을 하루하루 꾸준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를 향해 ‘거룩한 신의 영’(단 4:8)이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좋은 일만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성령은 우리를 '구렁텅이'로 내몰기도 하며, 우리를 고생 길로 몰아가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일을 겪는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이 광야에서 받는 유혹과 시험을 보여주는데, 특히 마가복음은 이 시험이 "하나님의 영이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막 1:12~13)면서 시작됐다고 말합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예수님을 광야의 수난 속으로 몰아넣었다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강한 카리스마를 소유한 긍정적인 삶을 기대하며 성령을 열렬히 추종하는 사람인가요? 그렇다면 먼저 자신을 되돌아보며 내 삶 구석구석에 하나님의 영이 실제로 어떻게 존재해 왔는지 생각해 보기를 당부합니다.
혹시 우리는 세간의 성령 '현상'에 집착하여 성령의 내주하심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령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감정적 흥분을 성령으로 여겨, 열정적인 분위기를 조장하는 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진정한 성령 충만은 우리의 도덕 수준을 높이며, 지성을 날카롭게 하고, 성화를 고양시키며, 타락해가는 시대를 애통하는 심정으로 바라보는 간절한 마음입니다. 성령은 어떤 ‘기운’이나 ‘능력’에 그치는 그 무엇이 아닌, 우리가 경배해야 할 하나님이시라는 점을 기억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