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 20:1~10 (출 15:13~21, 고전 15:20~28)
믿을 수 없는 일
예수님의 시신을 누군가 다른 곳으로 옮긴 것 같다는 막달라 마리아의 소식에 제자들은 소스라치게 놀란다. 아직 시신에 손을 댄다는 것은 들어본 적도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될 일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죄진 사형수라 해도 이미 처벌받은 시신에 손을 대지는 않는다. 예수님은 흉악범도 아니고 고귀한 선생님이 끔찍하게 십자가 처형을 받은 것도 가슴 아픈 일인데, 그 시신마저 누군가 옮긴 것 같다는 마리아의 소식은 제자들에게 청천벽력 같았다.
초대교회가 전한 복음의 핵심은 예수 부활이었다. 세상의 권력자들이 모함하여 부당하게 죽임당한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다는 것이 예수를 인정하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선포한 새로운 복음의 명확한 메시지였다. 그러나, 예수 부활의 증언이 처음부터 그냥 받아들여질 리가 없었다. 과학이 발달하지 않은 사회에서도 사람이 숨이라도 붙어 있는 것과 아주 숨이 끊어진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아무리 위독해도 실낱같은 숨이 붙어 있으면 가느다란 희망을 품지만, 숨이 넘어가면 그때는 모두 포기한다. 한번 넘어간 죽음은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다윗의 어린 아들이 죽을병에 걸리자 다윗은 식음을 전폐하고 모든 업무를 중단하고 슬퍼하며 아들을 살리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자 신하들이 저러다가 왕까지 잘못될까 봐 한걱정한다. 그러나 다윗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끝내 숨을 거둔다. 신하들은 이제 왕마저 상심하여 무슨 일을 벌일지 몰라 불안해하는데 정작 다윗은 아들이 죽자 다시 음식을 먹고 힘을 낸다. 사람의 목숨은 숨이 끊어지면 그다음에는 어떤 노력을 해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죽음은 그만큼 절대적이며 세상 어떤 것으로도 죽음을 넘어설 수 없다. 그런데 소수의 사람이 갑자기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고 떠들며 다닌다. 죽은 자가 부활하다니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결국, 예수를 죽인 이들은 반대의 소문을 퍼뜨렸다–제자들이 예수의 시신을 어디 다른 곳으로 옮겨놓고 부활했다고 거짓말하는 것이다! 지금 들어도 이런 해명이 훨씬 합리적이다. 죽음은 극복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빈 무덤을 본 마리아조차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것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달려와 무덤이 비어 있는데,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다른 곳으로 옮긴 것 같다고 전한다. 죽은 자의 부활은 예나 지금이나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불가능하기에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기독교 복음은 상식적으로 믿을 수 없는 내용을 전하기에 사람들이 받아들이기에 쉽지 않다.
역사상 가장 놀라운 일은 기독교 복음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생명력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동서고금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죽은 자의 부활, 그래서 믿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기독교가 지난 2천 년 동안 없어지지 않고 전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갔다는 점이야말로 기적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2. 빈 무덤 앞에서
헨리 태너, 무덤 앞의 두 제자, 130*106cm, 1906년,
시카고미술연구소
모두가 숨죽이고 있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그만큼 충격적이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은 깊은 한숨만 나오게 했다. 그런데도 한 사람은 두려운 새벽에 홀로 무덤을 찾았다. 중간에 어떤 일을 만날지, 무덤 돌은 어떻게 굴려야 할지, 시신을 보면 어찌해야 할지 아무 대책도 없이 그냥 길을 나서 무덤에 이르렀다. 원래 사랑은 대책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합리적이지 않은 것이 사랑이다. 그래서 사랑은 하는 것이 아니라 빠지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무덤을 찾을 생각조차 못하는 상황에서 마리아가 주님의 무덤에 간 것은 그만큼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에 대한 이 사랑이 우리 자신을 구원한다.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한 마리아는 너무 놀라서 그 길로 바로 되짚어와 베드로와 요한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놀라운 소식에 헐레벌떡 무덤에 다다른 두 제자가 무덤 앞에 서 있다. 세상으로부터 유폐된 채 어두운 죽음의 공간이어야 할 무덤은 이미 문이 열려 있었다. 더는 근접 못 할 닫힌 공간이 아니다. 도리어 빛은 죽음의 공간인 무덤 안으로부터 세상 밖으로 나오고 있다. 어디가 진짜 죽음의 공간이고 어디가 삶의 공간인가!
화가는 걸음이 느려 뒤늦게 도착했으나 먼저 무덤에 들어간 베드로를 앞에 그렸다. 그는 눈을 아래로 깔고는 심각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오른손을 심장에 대고 있다. 대제사장 집 뜰 안에서 벌어지는 재판을 지켜보며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던 잘못에 대해 참회하는 것일까. 이사야처럼 거룩한 경험 앞에서 환희보다는 두려움과 회개가 앞서는 모습이다.
더 젊어서 먼저 무덤에 이르렀지만, 무덤에는 들어가지 않다가 베드로가 들어간 다음에야 들어가 보고 믿은 요한이야말로 부활의 광채를 온 얼굴과 목 아래 가슴까지 받고 있다. 화가는 요한 중심의 요한복음 보도에 충실하게 장면을 그렸다. 요한은 눈을 크게 뜨고 빛이 나오는 무덤 쪽을 희망의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 이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부활을 본 요한의 선포를 통해 어두운 죽음의 역사가 새로운 생명의 역사로 전환될 것이다.
믿음은 누구나 믿을 수 있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다. 부활의 빛에 힘입어 내 인생과 역사의 현실을 새롭게 구성하는 것이다.
3. 믿는 자의 행복
무기징역을 사느니 차라리 사형이 나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형수와 무기징역은 하늘과 땅 차이다. 사형수는 언제 형이 집행될지 알지 못하는 불안 속에서 하루를 산다. 무기수는 언젠가 자신이 감형으로 다시 교도소 밖을 나갈 것이라는 희망 속에서 산다. 이 희망과 절망이 무기수와 사형수를 갈라놓는 결정적 틈이다.
예수님이 사형당해서 처참하게 죽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예수님만이 아니었다. 그를 향해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던 제자들의 꿈과 용기도 같이 끝장난 것이었다. 그래서 어떤 제자는 다시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고자 했고, 또 많은 제자는 삶의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두려움과 무기력증과 무의미성 속에 틀어박혀 있었다. 이들에게 세상은 더는 자신의 삶을 투신할 대상도 아니었고, 그저 두려운 압박이었다.
그런데 이 제자들이 변했다.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다는 소식, 주님의 시신은 옮겨진 것이 아니라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것이라는 소식을 믿게 되었을 때, 변한 것은 그들의 삶이었다.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을 가두고 억누를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이제 두려움과 절망과 무기력에 갇혀 있지 않고 넓은 세상으로 뛰쳐나왔다.
단단히 걸어 잠가두었던 문을 열었고, 눈동자에 다시 초점을 모았으며, 연약했던 다리에 힘을 주었고, 다부지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것은 수양이나 결단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믿음을 통해 된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순간, 달라지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몸이 아프고 병에 걸렸다고 포기하지 말자. 죽음보다 강한 병이 있던가? 주님은 병의 종착점인 죽음을 이기셨다. 나는 별 쓸모없는 삶이라고 자학하지 말자. 주님은 아무것도 아닌 나를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고 부활하셨다. 주님은 나를 너무나도 소중하게 여기신다. 나는 더는 능력이 없다고 실망하지 말자. 내 실력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주 사소한 정도지만 부활하신 주님이 나를 통해 이루시려는 일은 정말 거대한 계획이다. 부활하신 주님이 나를 위대한 계획으로 사용하시겠다는데 우리 스스로 자신을 깎아내린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것이다.
지난 2천 년 동안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은 수많은 사람이 새로운 인생과 역사를 만들었다. 어느 한 시대 어느 한 지역에 국한된 특수한 현상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누구나가 경험한 보편적인 현상이다. 곧 우리 모두에게도 이 은총은 열려 있다.
예나 지금이나 부활은 참으로 믿기 어려운 것이다. 예수님을 직접 따라다닌 제자들조차도 처음에는 믿지 못했던 일이다. 그러나 이 믿기 어려운 주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은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은총의 삶으로 변화된다. 베드로가 그랬고 요한이 그랬고 막달라 마리아가 그랬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는 베드로‧요한‧마리아가 믿은 그 부활 신앙을 통해 인생과 역사를 새롭게 창조하고 있다.
오늘 우리도 그 선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