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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7-2) - "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 / 도시농어촌선교주일 / 이순태 목사 > 부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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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해] 부활절(7-2) - "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 / 도시농어촌선교주일 / 이순태 목사

관리자 2020-05-21 (목) 21:33 4년전 1760  

본문) 이사야 32:9-18, 사도행전 1:12-26, 요한복음 16:16-24

 

1. ①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40일간 이 땅에 계신 후, 감람산에서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서 승천하셨다. 그러자 그곳에 있던 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다. 사도행전 1:15절을 보면 그때 모인 사람들 수가 약 120명이 된다. 그중에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를 제외한 열한 명의 사도들 모두 남자다. 예수님의 아우들도 참석을 했는데, 마태복음 13:55절을 보면 그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인데 이들 모두 남자다. 그 외에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제외하고는 모두 무명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위해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오실 때 예수님을 따라온 갈릴리 여자들이 많이 있었다. 그렇다면 마가의 다락방에 참석한 자들, 이름이 거론되지 않은 대다수가 이런 여성들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마가의 다락방은 예수님 승천 후 새 시대를 열어가는 핵심적인 공동체였다. 바로 그 모임에 대다수가 여성이었음을 감안할 때, 여성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초대교회의 여신도들은 복음 전파에 아주 큰 영향을 끼쳤다. 잠언 14:1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지혜로운 여인은 자기 집을 세우되 미련한 여인은 자기 손으로 그것을 허느니라” 여기서 집이란 가정을 의미할 수도 있고, 국가를 의미할 수도 있다. 즉 여자에 의해 가정과 국가가 바로 세워질 수도 있고, 허물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여성의 역할이 지대함을 보여주는 말씀이다. 그런데 역할이 크다는 것은 책임 또한 크다는 뜻이다. 

 

  ② 이사야 32:9절 이하에는 ‘안일한 여인들’ ‘염려 없는 여자들’을 향한 심판 예언이 들어 있다. 가정과 사회의 불의와 불공평에 무감각한 여인들로 인해 그 나라에 이제 재난이 올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수확할 열매가 없게 되고, 좋은 땅에서는 가시와 찔레가 자라고, 궁전은 버려지고, 뭇사람들이 오가던 성읍은 텅 비게 된다는 것이다. 즉 여성이 제 역할을 하지 않을 때 결국 나라가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만큼 여성의 역할과 책임이 크다. 

 

  오늘날 우리 정부와 종교 단체, 사회 단체는 저마다 개혁의 필요성을 부르짖고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 끼어 있는 부패와 무질서에서 아직도 눈에 띄는 여자들의 행태가 있다. 이른바 달갑지 않은 치맛바람, 복부인으로 불리는 자들이다. 자식을 맡은 교사의 마음을 돈 봉투로 흐려 놓은 장본인들 대부분 여자들이다. 비밀과외, 고액과외를 비롯해서 온 나라를 과외 지옥으로 만든 것도 여자들이다. 전 국토를 부동산 투기장으로 만든 자들도 대부분 여자들이다. 남의 자식의 생명을 담보로 해서 얻은 국가 안보는 누리면서도, 자기 자식은 군대에 보내지 않기 위해 불의한 방법으로 병역을 면제받게 하거나, 태어날 때부터 외국 국적을 취득하기 위해 원정 출산을 시도하는 이들도 여자이다. 이런 여자들의 이기주의, 자기중심주의가 만연될수록 가정과 나라는 심각한 어려움에 빠지게 된다. 

 

  ③ 그러면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까? 어떻게 해야 다시금 우리 가정과 나라가 새롭게 될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심령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 직접 나서신다. 이사야 32:15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여기게 되리라.” 위에서부어 오는 영, 곧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영을 통해서 세상은 새롭게 변화될 수 있다. 사람의 심령이 변화되니, 가정이 변화되고, 나라가 달라지게 된다. 공의와 화평이 가득한 사회가 된다. 그러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을 받기까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언제 하늘에서 영이 쏟아지나 쳐다만 보고 있어야 하는가? 

 

2. 

  ①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제자들은 놀라움 속에서 하늘을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자 천사가 나타나 말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이 말을 듣고 제자들은 어떻게 했는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다. 거기서 그들은 무엇을 했는가? 그들은 마음을 같이하여 오직 기도에 힘썼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곳은 감람산이었다. 감람나무가 많아 감람산이라 불리던 곳인데, 그곳에는 평소에 주님이 기도하시던 곳이 있었다. 바로 겟세마네 동산이다. 주님은 그곳에서의 기도를 통해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동력을 얻으셨다. 또한 기도하시던 바로 그 감람삼에서 하늘로 오르셨다. 그것을 경험한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은 합심하여 기도하는 것이었다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기도가 제자들에게 가장 우선적인 일이었을까? 

 

  ② 오늘 사도행전의 말씀에는 가룟 유다의 비참한 말로가 언급되어 있다. 사도행전 1:18절은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고 증언하고 있다. 그런데 마태복음 27:5절에 의하면 가룟 유다는 목 매어 죽었다. 이 둘을 종합하면 목매어 죽은 가룟 유다의 시신은 그대로 방치되었다가 목에 걸었던 줄이 끊어져 시신이 땅에 곤두박질치면서 배가 터져 창자가 흘러나온 것으로 보인다. 유다의 말로가 이토록 처참한 이유는 무엇일까? 

 

  유다의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제비뽑기를 하기 전에 제자들이 드린 기도에 이런 내용이 들어 있다.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여기서 “제 곳으로”라는 구절에서 ‘곳’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topos’이다. ‘장소, 자리’를 의미한다. 그런데 25절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라는 구절에서 ‘직무’로 번역된 헬라어가 또한 ‘topos’이다. 그렇다면 가룟 유다는 봉사와 사도의 자리에서 제 자리로 갔다는 말이 된다. 그것이 무슨 뜻인가? 가룟 유다는 주님을 따르는 자가 가야할 섬김의 길을 떠나 자신이 원하는 욕망의 길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은 30냥에 스승을 배신하고 진리를 떠났다. 그러나 자기의 욕망을 따르는 자의 결말은 무엇인가? 가룟 유다의 인생은 아겔다마, ‘피밭’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런데 다른 제자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따른 적이 없는가? 아니다. 그들 역시 욕망에 관한한 가룟 유다와 오십보, 백보이다. 다른 제자들 역시 예수님을 통해 출세하고픈 꿈을 꾸었다. 조용히 예수님께 부탁해서 좌의정, 우의정이 되려는 시도도 하였다. 제자들 간에 누가 크냐를 두고 싸움을 벌인 적도 있었다. 왜 그랬을까? 그렇게 서열이 정해지면 나중에 주님이 순서에 따라 사람을 쓸 것 아니냐 라는 생각 때문에 양보 없이 으뜸이 되고자 했다. 예수님 부활 후에 제자들은 “갈릴리에서 만나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갈릴리로 갔다. 그런데 그곳에서 바다를 보면서, 예수님을 기다리기 보다는 자신의 욕망대로 움직였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기까지 밤새내 헛그물질만 해댄 것이다. 제자들 모두 욕망의 길을 걸었고 욕망의 바다에 빠진 것이다. 

 

  ③ 인간은 그냥 내버려두면 자기 욕망을 따라 움직인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렇게 된다. 이런 인간의 행태를 바로 잡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바로 기도! 이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치열하게 기도하셨다. 곧 다가올 십자가를 내다보시고 심히 고민하며 슬퍼하셨다. 정말 할 수만 있다면 십자가를 피하고 싶은 것이 주님의 마음이었다. 그 기도가 얼마나 간절하였던지 주님의 얼굴에 흐르는 땀에서 피가 배어날 정도였다. 그런데 기도의 결과로 주님이 얻으신 응답은 무엇인가? 십자가의 죽음을 면하게 되셨는가? 아니다. 피땀을 흘리시면서 기도를 마치신 후,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46]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마 26:45-46). 주님은 의연한 모습으로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셨다. 즉 주님은 기도를 통해 힘과 용기를 얻으신 것이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가 원하는 기도의 내용을 고수하려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기도를 하면서 기도의 내용이 바뀌고 승화되는데 그 목적이 있다. 기도를 통해서 내 욕망의 자리에서 섬김의 자리로 자리 이동이 된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의 이끄심을 기꺼이 따르게 된다. 

 

3.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제자들이 이처럼 기도를 하게 된 동기에는 어떤 것이 있었을까? 무슨 일을 하기 전에 기도를 해야 더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기 몇 시간 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요 16:16). 제자들은 처음에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라는 말씀은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는 말씀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을 의미한다. 제자들은 주님의 죽음에 슬퍼하고 애통할 것이다. 그러나 그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신다고 말씀하신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주님은 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즉 여자가 아이를 낳는 해산의 고통이다. 해산의 고통은 온 몸, 온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 죽음의 고통이다. 그러나 그 고통을 평생 기억하면서 몸서리치는 여인은 없다. 왜 그런가? 해산을 통해서 얻은 생명 때문이다. 그처럼 고통 후에 큰 기쁨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해산 후 자녀를 얻은 기쁨이 크지만, 그 기쁨이 계속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태어난 아이가 자라면서 부모에게 고통과 근심을 주기도 한다. 부모를 슬프게도 만든다. 왜 그런가? 인간의 생명이 불완전하고 유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산 후 얻은 인간의 생명은 일시적 기쁨일 수는 있지만, 변함없는 영원한 기쁨은 아니다. 

 

  ② 그런데 주님은 요한복음 16:2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부활하신 주님으로 인해 얻게 되는 기쁨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 영원한 기쁨이다. 왜 그런가? 부활하신 주님의 생명은 한시적이고 불완전한 생명이 아니라 온전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주님은 요한복음 16: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좀 이상하다. 제자들이 지금까지 예수님에게 아무 것도 구하지 않았는가? 아니다. 많은 것을 구했다. 자기들의 뜻을 제시하면서 주님의 길을 막기도 하였고, 또 주님께 인사 청탁도 하였다. 그런데도 주님은 아무 것도 구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신다. 왜 그럴까? 우리가 주님께 구하고 또 구할 것은 가장 소중한 것, 곧 부활의 생명,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제자들은 이 생명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구하라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을 향하여 필요한 것들을 구하라는 말씀이다. 영원한 생명과 무관한 것들은 모두 죽음을 향한 도구일 뿐이다. 진정 주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가득 채워지고, 그 생명으로 세상을 살아갈 때, 세상 그 무엇도 줄 수 없는 기쁨의 삶을 우리는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구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구하라는 것이다. 

 

  ③ 지금 우리는 코로나19로 인해 어려운 터널을 지나가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영역이 보이지 않는 미물에 의해 얼어붙었다. 바로 이런 때 우리 믿는 자들은 무엇을 가장 먼저 해야 할까? 바로 기도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 승천 후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이 마음을 합하여 오직 기도하는 것이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우리는 새로운 변혁을 필요로 하는 기로에 서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사람의 몸만 파괴한 것이 아니라, 기존 세계질서의 주류적인 가치와 정서, 패권들을 해체시키고 있다. 미국 중심적 질서가 점차 그 힘을 잃어가고, 물질만능의 반공동체적 허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위기는 기회라는 말이 있다. 코로나의 위기를 천재일우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최근 우리나라의 위상은 많이 높아졌다. 한류와 K팝, 촛불로 상징되는 성숙한 시민 민주주의 , 붕준호 감독의 아카데미 수상, 그리고 코로나가 전 세계에 증명한 K방역의 우수성이 드러났다. 

 

  바로 이런 때에 우리 믿는 자들은 세계를 향하여 평화와 복음에 앞장서야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믿는 자들의 기도이다. 우리의 욕망이 아니라, 주님의 이끄심을 받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나라가 전 세계를 새롭게 하는 복음의 도구로 쓰임받을 수 있도록 기도하자! 주님이 이루실 것을 믿으며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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