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이사야
32:9-18, 사도행전
1:12-26, 요한복음
16:16-24
친구가 농담을 걸어왔습니다. 한 여대생이 생활이 궁핍해서 술집에 나가 일하기로 했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모두 그 학생을 나무랬습니다. 그런데
술집에서 일하는 한 아가씨가 공부를 해서 대학생이 되기로 결심했다 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일제히
그 아가씨를 칭찬했다 합니다. 조삼모사 처럼 형편은 똑같은데 사람들은 왜 이렇게 반응이 다른가 하고
친구는 질문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알콜 중독자 성도가 교회의 목사님에게 ‘목사님, 기도하다가 술을 조금 마셔도 괜찮을까요?’ 하고 질문했을 때는 질책을 받았다가, ‘그러면 술을 마시다가 기도하는
것은 괜찮겠지요?’ 하고 말했을 때는 ‘그건 안 될 이유가
없다’는 답을 들었다는 이야기를 생각나게 합니다.
방향성이 문제입니다. 부정적인 데서 긍정적인 쪽으로의 이동은 인정할 수 있지만, 그 반대는 안됩니다. 여기에다 이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함정은 두
발을 양쪽에 다 담그고 있어도 괜찮은 것처럼 여기게 만드는 점입니다. 정체가 아니라 이동이 전제되어
있는데, 그 점을 살짝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이 가지고 있는 약점도 이와 유사합니다. 마치 하나님 나라와 세속 세계 양쪽에 다 발을 디디고 서
있어도 되는 것처럼, 아니 인간은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하나님나라를 지향한다 할 때에는 엉덩이를 이 땅에 붙인 채로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남은 한 쪽 발 마저 옮겨놓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신앙이라 하겠습니다. 모든
면에서 변화를 요구 받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 인생이 한 걸음 더 하나님의 뜻에 가까이 다가서도록 믿음의 발걸음을 성큼 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자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라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구하면 모든
것을 더해 주시겠다고도 하셨고[마태복음 6:33], 구하면
주실 것이요, 찾으면 찾을 것이라고도 하셨습니다[마태복음 7:7]. 악한 아비라도 자식이 구하는 것을 주듯이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신다고 하셨습니다(마태복음 7:11).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건강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사업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부모님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자녀들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이스라엘 민족도 똑같이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 이름으로 구하지 않았다(요한복음 16:24)”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주실 것이다(23절)”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기억하고 그간 모든 기도의 말미에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하는 구절을 꼭 붙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이 말씀
따르는 것이 이상하지 않지만,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어땠을까요? 아마도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이라 할 것입니다. 성경 어디에 이런 말씀이 있나 반문할겁니다. 예수가 누구이길래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그의 이름으로 하겠느냐고 불경하다 할 것입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 구하는 것을 주실 때 “내 이름으로 주실 것이다” 라고 한 것은 더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말씀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에도 하나님은
당신 백성들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분명 “예수님의
이름으로”라는 문자 자체에 한정된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 이름으로 구하지 않았다’ 하신 말씀은 이름을
부르는 행위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이름으로’라는
말에 합당한 기도가 아니었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기도는 어떤 기도이겠습니까?
신명기 4:29 말씀에 “만일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그를 구하면 만나리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는
기도는 진실한 기도입니다. 또 역대하 7:14 말씀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찌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는 기도는 입술의 기도가 아니라 몸을 움직여 하나님께로 다가가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 역시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악한 마음과 욕심을 버리고 진실하게 드리는 기도, 스스로 돌이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려고 애쓰는 기도라야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릴 수 있는 기도입니다. 만약 우리의 삶이 이런 노력을 수반하지 못했다고 한다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지금까지
아무 것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지 못한 것이 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태복음 18:19)”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는 마음을 합하여 드리는 기도입니다. 갈등을 딛고 먼저 화해를 이루는 것이 진정한 기도입니다. 자기 마음의
한계를 이기고 서로를 위하는 기도가 참 기도입니다.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한1서 5:14)” 하고
사도가 말했을 때는, 이렇게 합심하여 드리는 기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기에 합당한 기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들어주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여러분의 기도가 반드시 응답 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
사도행전의 본문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떤 심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려 했는지 잘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가롯 유다가 빠져서 남은 제자는 11명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이들만으로도 얼마든지 활동할 수 있었을 겁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가진 사람이 12이 아니라 11인 것이 낫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굳이 12명을 채워야 할 이유를 찾기가 더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다녔던 그 때를 생각하며 제자들의 수를 맞추려 했습니다. 제비를 뽑아 맛디아를 선택했고, 그와 함께 부활의 증인으로 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이 장면에서 제자들은 모든 사사로운 감정을 뒤로하고, 오직
복음 증거만을 목표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한 것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함께 기도한 후에 행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의
형제들과도 함께 한 마음으로 기도에 힘썼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합심하여 드리는 기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는 실천적 결단과 행위로 발전합니다. 무기력하게
주저앉아 힘 빠진 음성으로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그 일을 위해 마음 모으고, 힘써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힘입니다.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들어주십니다. 성령으로 함께 하시고 용기를 주십니다. 일어설 힘을 주시고, 몸을 움직여 나아갈 수 있게 해 주십니다. 마음을 합했으니 함께 비전을 공유하고 소망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허망한
꿈이 아니라 실현 가능한 꿈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구하라, 받을
것이라” 약속하신 말씀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줄 굳게 믿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기도를 끝까지 놓지 않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물론 가시덤불과 같은 길을 지나야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가슴을 치라’고 거듭 말합니다. 이
안타까운 현실에 가슴을 치며 함께 아파하라는 것입니다. 잘못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에 더욱 가까이 나아오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저 높은 곳에서부터 다시
우리에게 영을 보내 주시면(이사야 32:15)” 반드시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의 열매인 평화를 누리게 하겠다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음을 기억하라고
선지자는 희망의 메시지를 거듭 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살아가는 이들은 “복이 있다’고 축복하고 있습니다.
해산의 진통이 두렵다고 해서 아이를 포기할 수는 없다 했습니다. 새 생명이 주는 기쁨은 이전의
고통을 기억나지 않게 하는 참으로 강력한 기쁨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할 때 우리는 먼저 갈등, 미움, 염려, 분노 같은
것들을 극복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어떤 어려움도 이 후에 누리게 될 평화와 기쁨을 포기하게 할 만한
것은 없습니다. 1cm+라는 책을 쓴 김은주 작가는 악마는 순간을 지배한다는 의미 있는 말을 했습니다. 순간의 분노, 순간의 오해, 순간의
욕망, 순간의 좌절, 순간의 유혹. 이 순간을 지배함으로써 악마는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과연
작가의 말대로 어쩌면 사람들은 이 순간을 다스리지 못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못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실 참으로 아름다운 약속을 믿는 자라면 진정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해야 할 것입니다.
28년 전에 하나님께서는 밀알 교회를 이 땅에 심으셨습니다.
있으나마나 한 또 하나의 교회를 무심하게 허락하신 것이 아닙니다. 맛디아를 뽑아 부활의
증인으로 일하게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귀한 사역자로 이 밀알교회 위에 친히 안수하신
것입니다. 이 공동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여러분이 기억할 것입니다. 또 앞으로 얼마나 큰 기대를 품고 계신지도 아실 겁니다. 이제 다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할 때입니다. 시절이 악하여 더더욱 절실하게 복음의 소식을 구하는 이 세상에 합심하여
나설 때입니다. 우리가 합심하여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의의 결실을 거두게 해 주실 것입니다. 물 댄 동산의 잎사귀가 푸른 나무처럼 그 가지를 뻗게 해주실 것입니다. 이
믿음 가지고 오늘을 이겨내십시오. 벅찬 내일을 꿈꾸십시오. 여러분
믿음의 가정과 우리 밀알교회 위에 무엇이든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