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렘 23:1~4, 벧전 5:1~11, 요 21:15~19
이번 주일이 어버이 주일이라, 평소 마음에 두었던 본문과 내용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여러 목회자들이 대체로 그렇게들 합니다. 오늘 어버이 주일에 주어진 세 본문은, 우리가 그동안 어린이날과 어버이날, 그리고 스승의 날이 있는 푸르고 드높은 5월에 어울릴 만한 그런 따뜻하고 감동적인 본문은 아니었습니다.
구약본문에 등장하는 임금으로 상징되는 ‘나쁜 목자’, 서신서 본문에는 장로로 대표되는 ‘당시 목회자들’, 마지막으로 복음서는 부활하신 예수로 말미암아 거듭난 베드로라는 ‘한 개인’에 이르기까지, 이 말씀은 오늘을 사는 곧 아비된 우리들과 부르심을 입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시는 권면이자 경고이며 동시에 약속된 축복의 말씀입니다.
이 자리는 종교와 정치가 한몸이던 시대의 머리된 ‘왕’, 교회가 시작된 이래로 목자로 여겨진 ‘목회자들’,만이 아니라, 이제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인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영광의 자리로 이끄는 축복의 시간되시기를 기대합니다.
1. <양떼를 흩어지게 하는 목자들>
구약 본문은 당시 왕, 임금들의 문제를 다룹니다. ‘화 있으리라’(렘23:1)로 시작되는 여호와의 말씀은, 악행을 일삼는 왕들의 횡포와 불의를 공개합니다. - 그들은 맡겨진 양떼를 돌보지 않고, 도리어 흩은 자들이었습니다. 오늘날 이 ‘양떼를 흩어지게 하는 목자들’은 누구에 해당할까요?
이 본문과 병렬을 이루는 에스겔 34장은, 이 나쁜 목자들의 구체적인 못된 짓을 공개합니다. ”양을 잡아 먹으며..양 떼는 먹이지 아니하며, 연약한 자를 강하게 하지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 주지 아니하며,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며, 포악으로 다스렸으므로...목자가 없으므로 흩어지고 흩어져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겔 34:3-5)
그런데 조금 이상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적하는 것은, 종교적인 측면이 아닙니다. 또한 그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새 왕을 약속합니다(5절). 그리고 이 새로운 왕은 정의와 공의를 행하므로, 선한 목자로 불리어 질 것이라 확증합니다.
2. <고난 당하는 목자들>
두번째 서신서 본문을 자세히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베드로가 남긴 이 편지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새 피조물이 된 교회의 장로들 당시에는 목사라는 호칭이 없었을 때였기 때문에 공동체의 장로라 불리었습니다. 그래서 감리교회는 지금도 목사라는 명칭보다는 장로들의 머리라는 의미로 감독이라 부릅니다,
벧전 5:1은 고난의 증인들을 위로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억지로 아니하며,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해 하지 아니하며, 기꺼이 하며,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아니하며 양무리의 본이 되는(2-3절) 사람들이었습니다.
초기교회의 아비로 불리우는 이들은,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고, 스스로 근신하며 마귀를 대적함에서 닥치는 고난을 기꺼이 감수하는, 하늘의 권능을 소유한 목자였으여 참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구약본문에 등장하는 그 왕들과는 반대편에 선 사람들입니다. 베드로 서신은 그들을 향해 예수님이 당한 고난의 증인이요, 하나님 나라 영광에 참여할 자로 선언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예수님의 복음을 따름으로 고난받는 목자상은, 현대 목회자들에게서는 사실상 찾아보기 매우 어렵습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돌아올 이득을 우선 계수하는 목사들, 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입으로만 주장하며, 삶으로는 부정하는 장로들을 대면하는 것에 휠씬 더 익숙합니다. 이제 우리는 악행을 거부하며 스스로 근신하는 아비들을 찾기 위해 대낮에 등불을 들어야 하는 현실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3.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목자들>
마침내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 21:15). 예로부터 이 본문의 주안점은, 사랑의 관한 세 가지 헬라어 용법에 주목했습니다. 아카페 필로스 에로스...그런데 여러분, 예수님께서 과연 헬라어를 사용하셨을까요? 예수님과 베드로가 외국어에 능통하여 제국의 언어인 헬라어를 주고받았을까요? 지금까지 해석된 내용에 집착했던 것은 아닐까요?
또 한가지. 복음서 본문에는 세 번의 강조 문장이 등장합니다. ”먹이라, 치라, 먹이라“ 많은 연구자들이 이 동사 변형에 중점을 두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주님의 생생한 워딩을 추적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사랑’이, 어떤 무엇과 비교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더 사랑하라’는 선언에서, ‘이 사람들 보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합니다’라는 자칫 맹목적이고 단순한 고백에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사랑의 실존입니다. 예수를 향한 사랑이 그리스도인의 일상에서 실제로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가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사랑하라’는 선언에서 ‘이 사람들 보다’라는 구체적인 대상과 견주는 믿음의 삶을 요구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먼저 ‘이 사람들보다’라 할 때, 그 자리에 있는 다른 제자들을 발견합니다. 3년이란 세월을 예수를 따라 함께 동고동락했던 동료입니다. 역경과 조롱과 더불어 환호와 높임을 받았던 무리, 곧 나라를 뒤 흔들 영광의 자리에 오르리라는 기대에 찼던 가족보다 더 가까웠던 무리, 그러나 죽임 당한 예수를 뒤로 하고 줄행랑을 친, 과거의 자리로 돌아가 다시 의기투합한 끈끈한 정을 나누고 있는, 바로 내 인생의 동지라 할 수 있는 그들입니다. - 여러분에게 이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거듭 물으시던 그 주님께서 오늘 여기 우리 앞에 서 계십니다.
4. <왕이요 장로요 목자인 어버이>
나와 친밀한 관계 속에서 내 사람들과 살아가는, 약자나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편이 되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야말로, 세상 앞에 무능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대국이 소국을 침략하지 않고, 강자가 약자를 겁탈하지 않고, 귀한 자가 천한 자를 능멸하지 않고, 다수가 소수를 해치지 않고, 지혜로운 자가 어리석은 자를 속이지 않고, 부자가 빈자에게 교만하지 않으며, 힘이 있는 자는 약자를 도와주고, 배움이 있는 자는 가르쳐주며, 있는 자는 나누어 주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교회의 일과 등치시켰습니다. 예배 출석, 헌금생활, 교회봉사, ...이런 일들이야 말로, 하나님의 일이라고 확신하면서, 이런 일들을 많이 하고, 많은 시간을 교회와 보내는 것이, 곧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다보니 믿음이 좋은 신앙이란 교회에만 붙어있어야 하는 줄로 압니다. 교회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관여하지도, 관심 갖지도 못하는 비실비실한 교인들을 최고로 여기게 된 겁니다. 내 교회, 내 집 울타리를 못 벗어나는 괴상한 신앙이 고난을 두려워하는 그리스도인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땅의 악행과 맞서 고통당하는 당신은 무능하지 않습니다. 비굴해진 왕. 장로, 목사, 탐욕스런 아비는 나쁜 목자입니다. 주님은 선한 목자로 부르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선한 목자로 보내시는 분인줄로 믿습니다(아멘).
바르고 곧아서, 성실하고 정직해서 도리어 어려움을 뒤집어 쓰는 장한 아버지. 어머니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런 인생을 추천합니다. 고난당하는 당신은 무능하지 않습니다. 이 삶이 언젠가 끝나더라도 양같은 사람들 가슴 가슴 속에 빛나는 훈장같은 어머니 아버지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직하고 성실하게 사신, 우리들의 어머니 아버지... 일년 열두달, 우리 마음에 피어있는 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와 같이, <양떼를 흩으는 더러운 이를 탐하는 목자들> 그런 아비, 그런 장로, 그런 교수, 그런 사역자는 되지 않기로 다짐하는 여러분을 부활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 한주도 주안에서 샬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