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43:8~13, 요20:19~31, 행10:34~43, 참조)시30편
설교키워드 : (하나님/예수님의)사랑, 믿음, 증인.
도입 : (1) 부활절 메시지의 출발은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를 먼저 찾아오셨다는 데 있습니다. 부활사건 자체가 의미가 있지만, 그 부활의 사건이 예수님을 통해 확인되지 않았다면 오늘 우리가 알 수 없겠지요? 부활절 첫째, 둘째, 셋째 주일 본문 말씀에 이것이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부활절기에는 우리를 찾아오신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사건들로 가득차 있고, 우리 삶 속에 그 만남들로 가득 차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지만, 정말 내 삶 속에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지 의문이 든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곁에 계신 주님을 만나고 깊은 만남이 이뤄지기를 바랍니다.
서론 : (2) 오늘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모여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 보이시는 장면입니다. 19절을 보면,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라고 말해주는데, 지난 주일 말씀에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만나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제자들을 만나는 바로 그 시점입니다.(눅24:33~49) 시간상 연결되는 이야기죠. 엠마오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두 제자가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거기 모인 제자들과 그 날 있었던 예수님의 부활사건과 제자들을 만나주신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직접 제자들 앞에 나타나 보이셨습니다. 찾아 오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도, 엠마오 제자들에게도, 그리고 오늘 예루살렘에 모여 있는 제자들에게도 먼저 찾아와 만나 주셨듯이, 오늘 우리에게도 예수님은 먼저 찾아와 만나 주십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는 이 시간에도, 우리의 일상의 삶 가운데도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찾아와 말씀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 주님을 만나는 부활의 기쁨이 함께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본론 : (3)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을 찾아 오셔서 두 가지의 기원과 한 가지의 사명을 전해 주십니다.
첫 번째는 평강을 기원합니다. 그러면서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십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모든 분들에게도 주님께서 주시는 평강을 기원합니다. 세상 다른 무엇이나 환경을 보지 마시고,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를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오늘 본문 20절 말씀의 제자들처럼 기쁨이 솟아날 것입니다. 예수님의 손은 못자국의 표식이요. 옆구리는 창자국의 표식입니다. 예수님께서 고난과 죽음을 안고, 다시 사셨음을 보여주시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표식입니다. “한 마디로 내가 너희를 위해서 끝까지 사랑한 예수다.”라고 보여주시며 평강을 기원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구를 향한? 나를 향한, 우리와 이 세상을 향한!
그 누구도 그 무엇도 그 어떤 것도 빼앗아갈 수 없는 평강입니다.
두 번째 기원은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3년의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보고 듣고 배우고 했지만, 그들의 지식과 능력으로는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도 따라 할 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자신의 지식과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총인 것을 알기에 하나님의 영,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성령의 임재를 경험할 때, 본문 23절 말씀처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는’ 권세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 권세는 인간인 우리에게 죄사함의 권세가 있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직 성령의 임재하심을 통해서만 누구의 죄라도 용서하게 하는 구원의 능력이 나타남을 의미합니다. 구원은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고 전하는 자가 없으면 어찌 누가 들을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본문 23절 말씀은 인간에게 죄사함의 능력이 있다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증거의 능력, 영향력을 말씀하는 것이고, 오직 성령의 임재를 통해서만 그 복음이 믿어지고 증거될 수 있음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4) 예수님은 이 두 가지를 기원하시면서 제자들에게 한 가지 사명을 말씀해 주십니다. 바로 본문 21절 말씀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는 파송의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너희를 나의 증인으로 보내겠다’는 선포입니다. 예수님도 요17:8말씀에 ‘나도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습니다.’라고 기도하셨듯이, 예수님도 하나님의 증인으로 오셨듯이, 나도 너희를 나의 증인, 곧 하나님의 증인으로 보낸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4-1) 본래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증인으로 세우셨습니다. 구약의 본문인 이사야 43장 8~13절 말씀을 보면, 이사야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합니다. ‘뭇 백성들이 연합하여 그들의 증인을 세운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증인(10절, 12절)으로 세우셔서 하나님의 주권과 구원계획을 보이기’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증인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메신저들인 선지자들과 그들을 통해 나타난 사랑의 표식들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믿지 않았습니다. 따르지 않았습니다.
증인의 기본은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을 가감없이 그대로 전하는 것인데, 이사야43장 8절 말씀처럼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여러분, 이 혼란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세상이 보여주는 장식품들과 의미없는 소리에 우리의 눈과 귀를 현혹시키지 마십시오. 먼저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를 바라보십시오. 나를 향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먼저 거하십시오. 그리고 그 뜨여진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그럴 때 우리의 삶 한 복판에 찾아오신 예수님을 일상의 삶 속에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
(4-2) 신약의 서신서에서도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0장 34~43절 말씀을 보면, 베드로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난 후 복음증거의 사명을 감당하면서 증언합니다. “갈릴리 나사렛 출신 예수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성령과 능력의 충만함으로 화평의 복음을 전해 주셨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산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시고, 그를 믿는 자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로 정하셨다. 우리가 그 일의 증인이다. 모든 선지자도 증거한 내용이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고 난 후 죄사함의 능력이 있는 복음을 증거하는 사도로 부족함 없이 사명을 감당해 나갑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본을 잘 보여준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이 먼저 하나님의 증인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만나지 않으면, 성령을 받지 않으면, 구원의 통로요 죄사함 받음의 능력을 전하여 주는 하나님의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5) 그런데 오늘 본문에 좀 뜬금없는 이야기가 들어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가운데 찾아오셔서 만날 때에 하필이면 디두모(쌍둥이)라 불리는 도마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도마가 직접 보지 않고서는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8일 뒤 예수님께서 다시 제자들 가운데 찾아오셨는데, 그 때 도마가 함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네 손가락을 내밀어 내 손과 옆구리에 넣어보라’(27절)고 말씀하십니다. 도마는 손가락을 내밀어 확인하지 않고도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8절)라고 고백합니다.
이 대화 가운데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데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바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대화 가운데 도마에게 ‘믿음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시고, 이후에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증인으로 살고 싶다고 소원하고 아무리 외쳐도 우리에게 이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믿음이 없으면, 나를 찾아오신 부활의 주님을 깨닫지 못하면, 증인의 삶을 살 수 없을뿐더러,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불가능합니다. 종교적인 허울로 흉내는 낼 수 있을지 몰라도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증인의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어쩌면 코로나19가 우리의 내면에 이러한 도전을 준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너희에게 진짜 믿음이 있느냐?” “믿음의 흉내만 내고 있는 건 아니냐?” 이 기회를 통해 우리는 온전한 믿음으로 바로 세워지기를 원합니다.
(6) 결론: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의 내용을 포함하여 요한복음을 기록한 결론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
증인의 사명이자, 복음증거의 목적이 이 한 문장에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무덤을 통해 끝없는 사랑을 보여주시며,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을 찾아가시고, 오늘 우리에게 성령으로 말씀하시는 바로 그 이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믿음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 아멘. 할렐루야!
먼저는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그 사랑을 경험하며 평강을 누려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에게 맡겨 주시니 증인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 19 시대, 우리 교회들과 성도들을 통해 다른 형제자매들은,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듣고 있을까요? 각자 삶의 자리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의 방식으로 증거하는 한 주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7) 적용예시 : 말씀을 준비하면서 한 영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정부에서 홍보하는 ‘덕분에 챌린지’라는 캠페인 영상입니다. 수어로 ‘왼손 손바닥 위에 오른손 엄지척.하는 동작을 표시하며, 코로나19를 이겨가고 있는 것이 국민들 덕분에, 의료진 덕분에 라는 격려와 응원의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사랑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은 사실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나도 힘든데 누굴 격려해 하는 마음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한 주간 이 캠페인을 통해 내가 먼저 경험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표현하고, 증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첫 번째 덕분에는 당연히 ‘예수님 덕분에’일 것입니다. 한 번 해 볼까요?^^ “예수님 덕분에~(손 수어) 평안합니다. 고맙습니다.“ 우리도 코로나19로 인해 수고하는 방역당국과 의료진, 자원봉사자들에게 덕분에 표현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밖에 한 주간을 살면서 내가 알게 모르게 경험한 사랑의 고마움을 표현하면 좋겠습니다. 좀 더 큰 사랑의 표현을 할 수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경험한 평강과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기쁨의 한 주간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