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눅 24:13~35, 습 3:14-20, 벧전 1:3-12 / 장애인-4.19혁명기념주일
1. 오늘은 부활절 둘째주일이자 장애인주일입니다. 우리 지역의 장애인들을 섬기는 장애인종합복지관과 주거 시설인 평화의 집을 선교하며 섬기고 있는 우리에게는 참으로 은혜로운 주일입니다. 장애는 선천적인 장애가 있고, 후천적인 장애가 있습니다. 신체장애가 있고, 정신장애가 있습니다. 신앙차원에서는 영적 장애도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신체적인 장애뿐만 아니라, 정신이나 마음 그리고 영적인 장애까지도 치료해 주셔서 더불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모든 장애인 가족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가 임하기를 바라고, 장애인 가족들을 섬기는 복지관과 평화의 집 그리고 우리 지역에서 장애인가족들을 섬기는 모든 직원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2.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영적장애와 더불어 시각장애를 가졌던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주님이 무기력하게 예루살렘의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너무 억울하고 슬픔에 빠져 있어 제대로 볼 수 없었습니다. 본문은 ‘눈이 가리어졌다’(눅24:16)고 합니다. 분별력을 잃고 있었습니다.
3. 인간은 극심한 고통을 당하면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제대로 생각할 수 없고, 제대로 볼 수 없으며, 온전하게 이야기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있었던 예루살렘에서 자신들의 삶의 터전인 엠마오로 가는 두 삶이 그런 상태였습니다.
4. 그런 낙심한 사람들이 또 있었습니다. 그들은 베벨론 포로 생활의 후유증으로 미래의 희망을 상실하고 ‘손을 늘어뜨리고’ 기죽어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습 3:14-30) 뿐만 아니라, 로마 정권에 의한 억압과 핍박으로 계속적인 고난을 당하고 있던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들과 성도들이 그러하였습니다.(벧전 1:3-12) 모두 삶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리고 낙심 가운데 방향을 잃었던 사람들입니다.
5. 이런 믿음의 낙심은 지금 여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양한 삶과 신앙생활의 상황 속에서 믿음이 흔들리고 약해지며 믿음의 길을 온전히 걸어가지 못하는 우리 시대입니다. 요즘 믿음의 온전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묵상합니다. 교회생활 만큼 믿음이 성장했는지를 되돌아보면 부끄럽습니다.
6. 믿음의 사람들을 만나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뜻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삶, 그리스도의 말씀, 그리스도의 죽음까지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그리스도의 죽음까지는 믿을 수 있고 신뢰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고백하지만, 그 분이 장사된 지 삼 일만에 부활하시고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의 삶 속에 함께 하고 간섭하고 계시는 주님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때로는 우리와 같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부활하셔서 지금도 함께 계시다는 것을 삶에서 온전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7.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그런 우리의 모습을 거울과 같이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모습이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신 후 낙심했던 모든 제자들의 얼굴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그 한사람의 이름은 글로바라고 합니다. 그러나 나머지 한 사람의 이름은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글로바는 마리아의 남편입니다.(요 19:25) 예수님의 십자가에까지 갈 정도로 열심있고 적극적인 여성이었습니다. 글로리아 부부는 엠마오에서 예수님을 열심히 섬겼던 신앙부부였습니다.
8. 그런데 그런 믿음의 삶을 살던 글로바와 그 다른 한 제자는 한없이 절망한 상태였습니다. 그들이 신뢰하고 사랑하던 그 주님,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키기를 기대했던 그 주님, 그 주님이 어처구니 없이 어느날 체포되어 빌라도에 의해서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광경을 목격하자 제자들은 깊은 절망 속에서 낙심에 잠겨 삼삼오오 뿔뿔이 흩어져 가기 시작했습니다. 여기 엠마오 길의 두 제자도 깊은 낙심 속에서 그들의 고향 집을 향해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 두 제자의 모습은 주님의 부활의 체험이나 부활의 확신이 없이 십자가에만 머물러 있는 오늘날 신앙인의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9. 노을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황혼 무렵, 예루살렘을 등지고 서북쪽을 향해서 힘없이 걸어가고 있는 두 제자, 글로바라는 사람과 다른 제자 당신의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10. 엠마오 길의 두 제자는 절망 속에 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주목할 만한 상태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맹목의 상태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그들이 이야기하며 걸어갈 때에 예수님께서 가까이 이르러 동행하였는데,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눅24:16) 그인 줄 알아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낙심 가운데 길을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는 두 제자 곁에 예수님께서 동행하고 계셨는데, 그들에게는 주님을 주님으로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영적인 맹목의 상태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1. 눈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눈에 보였지만 그 분을 주님으로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먼저 다가오신 주님이 곁에 있었음에도 그들은 깊은 슬픔 속에 있었고 실망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질문했을 때,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했습니다.
12. 두 제자는 예수님께서 그들을 구원할 메시야,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킬 자라고 기대했는데, 해방의 꿈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주님은 이 제자들의 기대와 바램을 성취시키지 못한 채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얼마나 실망했겠습니까?
13. 더 큰 두 제자의 모습은 불신앙의 상태였습니다. 그들 두 제자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감히 그 엄청난 사실을 받아들일 만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는 천사의 말을 들었지만, 예수님은 만나지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빈 무덤을 발견했지만, 예수님을 볼 수 없었다는 말에서 그들의 불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때로는 표현은 다르지만, 생각은 다르지만 주님의 부활을 들었지만, 온전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14. 여기 영적인 맹목의 상태와 슬픔과 실망 속에 빠진 두 사람 그리고 불신의 상태에 빠져 있는 이 두 제자에게 예수께서는 먼저 찾아오셔서 그들에게 오히려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항상 은혜의 주체는 주님이십니다. ‘세상이 하나님을 이처럼 사랑하사’가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입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했습니다.
15. 슬픔과 실망, 영적인 맹목과 불신에 빠져 있었던 그들에게 주님이 찾아오십니다. 저들이 주님 뵙기를 구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저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주님이 먼저 찾아오셔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은혜는 시작됩니다.
16. 본문에 보면 성경말씀을 풀어주신 예수님은 마음 문을 열게 하사, 말씀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마음이 열릴 때 말씀을 깨닫게 됩니다. 마음을 열게 하는 일은 주님 자신의 영이신 성령님을 통해서 하시는 사역입니다.
17.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하나님은 믿고 있었지만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있었던 루디아라는 여인이 바울 사도의 복음의 메시지를 듣습니다. 본문에 보면 ‘두이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했습니다. 주께서 그 마음을 열었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의 마음을 여셔야 말씀을 깨닫을 수 있습니다.
18. 이 것은 두 제자의 경험일 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올 때 그런 기대감이 없이, 주님의 도움 없이 나오면 마음이 닫혀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께 마음을 열어 달라는 간구를 해야 합니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가까이 오셔서 성경을 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음 문을 열어 말씀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랬을 때, 성경은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게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32절) 증언합니다.
20. 주님께서 오셔서 절망 속에서 일으켜 세우시기 위해 그들에게 가까이 오셔서, 성경을 풀어주셨을 때, 그들의 마음 문을 여시고, 말씀을 깨닫게 하셨을 때, 그들의 마음이 감동되어 뜨겁게 되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이제야 그들은 말씀을 풀어주신 그 분이 바로 주님이신 줄 알았습니다.
21. 주님을 만난 그들, 절망 속에, 신앙의 무기력 속에 있었던 그들이 진정 주님을 만났을 때 회복되는 모습을 오늘 본문 마지막 구절에서 알려주시고 있습니다.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이 것은 주님을 만나 결과로 달라진 두 제자의 모습입니다.
22. 그 두 제자는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 예배가 회복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영적으로 침체하게 되면 제일 먼저 일어나는 현상 가운데 하나가 예배의 감격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23. 하나님을 향해 진정으로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엎드려 주님을 예배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집니다. 형식적으로 기계적으로 예배에 참석할 수는 있지만, 진정으로 예배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셔서 우리의 영혼을 다시 한번 일으켜 세우시면, 우리가 그 침체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데, 그때 가장 현저하게 달라지는 면이 바로 예배의 감격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24. 예배의 감격의 회복한 다음, 그들에게는 기쁨의 회복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그들의 상태는 슬픔과 실망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이제 그 모든 것은 큰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들을 지배하고 있던, 헤어 나올 수 없는 그 슬픔을 삼켜버린 이 감격스런 기쁨이 그들에게는 있었습니다.
25. 예배가 회복되고, 기쁨이 회복되자, 그들은 소명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 기쁨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절망과 슬픔 속에 등지고 내려왔던 예루살렘, 자신들이 실망하고 포기하고 돌아왔던 예루살렘을 향해 다시 올라갔습니다. 가장 놀라운 변화이자, 감격입니다.
26. 소명이 회복되자, 믿음의 교제가 시작되었습니다.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 한 자들이 모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돌아갔습니다. 성도들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이 기쁨을 나누기 위해 살아계신 주님을 만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27. 오늘의 말씀은 부활의 능력이 우리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적으로 무기력해지고, 내 삶에 비집고 들어오는 시험과 도전으로 인해 절망에 빠지고, 슬픔에 빠지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28. 저는 사랑하는 우리 교우들이 오늘의 말씀에 도전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기력한 신앙의 일상성을 깨기 위하여 주님을 온전히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손을 늘어뜨리고’ 기죽어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친히 오셔서 주님을 만났을 때,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스바냐 선지자는 말합니다. 고난 속에 있던 초대교회들에게 부활신앙으로 격려와 위로를 보내는 베드로의 섬김 앞에 새 힘을 내게 됩니다. 이런 주님의 은혜를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 마음을 열게 해달라고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29. 그리하면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져서, 우리의 예배가 회복되고, 기쁨이 회복되어 집니다. 우리의 사명이 회복되어지고, 교제가 회복되어지는 것을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30. 이제 코로나19로 인하여 오랫동안 사회적 거리두기를 마치고 새로운 예배와 믿음의 삶을 시작하려는 우리는 다시 은혜와 감동의 예배를 회복하도록 합시다, 우리 믿음의 공동체들이 모여 나누는 기쁨을 회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교회에게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소명과 비전을 회복하고, 믿음의 사람들이 나누는 교제를 기쁨으로 회복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