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이사야 25:1~9, 시 23:1~6, 고후 4:7~18, 요 5:19~29
“그 날이 오면”이라고 하면 어떤 희망이나 간절한 염원을 담은 의지가 엿보입니다. 해방의 날을 기다리면서 쓴 심훈의 “그 날이 오면”(1949)이라는 시는 그 시대에 발표되지 못하고 사후인 1949년에야 발표되었습니다.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은 /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
한강 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 날이 /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할 양이면, /
나는 밤 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 종로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 날이 와서, 오오, 그 날이 와서 / 육조(六曹)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메고는 / 여러분의 행렬(行列)에 앞장을 서오리다. /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과거 민주화 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엄혹한 현실에서도 “그 날이 오면”이라는 노래로 거듭되는 탄압을 이겨내기도 했습니다. 이 노래는 짧은 생을 노동해방을 위해 바친 전태일 열사를 추모하는 노래였습니다.
한 밤의 꿈은 아니리 / 오랜 고통 다한 후에 / 내 형제 빛나는 두 눈에 빛나는<뜨거운> 눈물들 /
한 줄기 강물로 흘러 고된 땀방울 함께 흘러 / 드넓은 평화의 바다에 정의의 물결 넘치는 꿈 /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 내 형제 그리운 얼굴들 그 짧은<아픈> 추억도 /
아아 짧았던 내 젊음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
내 형제 그리운 얼굴들 그 아픈 추억도 / 아아 피맺힌 그 기다림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심훈의 시나 전태일 열사를 추모하는 노래에서 “그 날”은 미래의 희망과 해방에 대한 간절한 염원과 현재의 고난을 이겨내려는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성서에서도 “그 날이 오면” 혹은 “그 날에는”이라는 구절은 야훼의 날로써 심판과 구원에 대한 예언의 선포 속에 있습니다. 특히 이사야서를 비롯한 예언서에 자주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 날은 폭정을 일삼던 지도자들에게 심판의 날입니다.
“그 날이 다가오고 있다. 그 날이 오면, 네 왕궁 안에 있는 모든 것과, 오늘까지 네 조상이 저장하여 놓은 모든 보물이, 남김없이 바빌론으로 옮겨 갈 것이다.”(왕하 20:17)
“그 날이 오면, 주님께서, 위로는 하늘의 군대를 벌하시고, 아래로는 땅에 있는 세상의 군왕들을 벌하실 것이다.”(사 24:21)
“그 날이 오면, 왕이 용기를 잃고, 지도자들도 낙담하고, 제사장들도 당황하고, 예언자들도 소스라치게 놀랄 것이다.”(렘 4:9)
“나 주가 선언한다. 그 날이 오면, 너희가 가진 군마를 없애 버리고 말이 끄는 병거를 부수어 버리겠다.”(미 5:10)
“그 날이 오면, 문지방을 건너뛰는 자들을 벌하겠다. 폭력과 속임수를 써서, 주인의 집을 가득 채운 자들을 내가 벌하겠다.”(습 1:9)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용광로의 불길같이, 모든 것을 살라 버릴 날이 온다. 모든 교만한 자와 악한 일을 하는 자가 지푸라기같이 타 버릴 것이다. 그 날이 오면, 불이 그들을 살라서, 그 뿌리와 가지를 남김없이 태울 것이다.”(말 4:1)
그 날은 해방과 구원을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날입니다. “그 날이 오면, 주님께서, 앗시리아가 지워 준 무거운 짐을 너의 어깨에서 벗기시고, 앗시리아의 멍에를 너의 목에서 벗기실 것이다.”(사 10:27)
“그 날이 오면,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깃발로 세워질 것이며, 민족들이 그를 찾아 모여들어서, 그가 있는 곳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사 11:10)
“나 주가 선언한다. 그 날이 오면, 비틀거리며 사는 백성을 내가 다시 불러오고, 사로잡혀 가서 고생하던 나의 백성을 다시 불러 모으겠다.”(미 4:6)
“그 날이 오면, 너희는 서로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이웃을 초대할 것이다.”(슥 3:10)
우리는 “그 날에” 이루어질 구원을 어떤 구체적인 모습으로 그리면서 기도하고 있습니까? “그 날이 오면” 이루어질 해방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그 모습과 내용이 오늘 우리의 기도입니다. 시편 23편의 표현을 빌리자면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입니다.
교우들의 기도의 내용을 보면 핵발전소 가동중단, 남북평화통일, 국가보안법 폐지, 안타까운 사연을 가진 모든 이웃을 위하여 등 사회적이고 나라와 세계를 위한 내용도 있습니다. 또한 체계적인 선교활동, 첫사랑을 잃지 않는 교회, 성가대 활동을 잘 하기를, 담임목사를 위한, 서로 아껴주는 공동체가 되기를, 성숙한 교회가 되기를 바라는 교회에 관한 내용도 있습니다. 존중하고 행복한 가정이 되기를, 가족의 건강과 행복, 자녀들의 공부와 꿈과 희망을 위해서, 유학 중인 자녀를 위해서, 경제적인 어려움이 없기를, 이사 등 가정적인 내용도 있습니다. 또한 꾸준히 기도하는 생활, 새로운 직장 구하기를, 좋은 배우자 만나기를, 건강을 위해,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를, 남편을 존중할 수 있도록 등의 개인적인 내용도 있습니다.
교우들의 기도 내용 중에는 부분적으로 이미 이루어진 것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할 때에 그 내용은 주로 무엇을 달라는 청원기도인데, 그러면서도 그러한 기도를 비판하기도 합니다. 특히 개인적인 내용의 기도를 꺼리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청원기도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굶주려서 배고픈 사람이 양식을 달라고 하고,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은 그 고통에서 해방되기를 원하고, 생명의 위협을 느끼거나 거대한 힘에 눌려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을 때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또한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내용도 모두가 바라는 청원입니다.
비판을 받아야 할 것은 청원하는 기도자의 태도나 하느님에 대한 생각입니다. 내가 얼마를 헌금했으니 하느님이 이자까지 보태서 몇 배로 갚아달라는 기도는 하느님을 마치 은행이나 보험사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무런 노력 없이 이것저것을 달라고 하는 기도는 하느님을 마치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는 몸종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의 배후에는 하느님과의 진정한 관계가 아니라 하느님을 우주 바깥에 계신 분이기 때문에 그의 결정에 따라서 기도를 들어주거나 들어주지 않는 분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영성훈련으로써의 기도는 개인이 의식을 갖고 하느님과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 그 관계를 성숙시키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관계에 온 관심을 집중하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의 삶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는 그 내용이 어떻든지 하느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삶은 하느님과 관계를 맺습니다. 이것은 일상성의 한가운데에서 상세한 율법조항들을 준수함으로써 유대인들이 하느님의 실재를 기억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기도는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삶을 사는 하나의 방식이며, 그 관계는 관계 속에서 살아감으로써 성숙해집니다. 이러한 기도 생활을 통해서 하느님은 더 이상 저 멀리 계신 존재가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가까이 계시는 분으로 인식되는 것입니다.
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나 국가나 세계를 위하여 기도할 때에 그 내용이 어떠하든지 그 지향이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고, 예수님이 이루려했던 꿈과 씽크로율이 얼마나 높으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기도한 내용이 하느님의 뜻과 예수님의 가르침과 같은 방향이면 좋겠습니다.
이스라엘이 왕에 의한 지배를 당연시 하고, 그로 인해 하느님의 샬롬이 깨어졌을 때에 활동했던 예언자들은 하느님과 같은 꿈을 꾸고 있던 사람들이고 그 꿈을 대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목소리는 오늘날에도 공평(mishapt)과 정의(sedaqah)가 유혈(mishpa)과 아우성(se-aqah)으로 바뀌는 상황에서 언제나 하느님의 뜻이 되어 울려 퍼졌습니다. 예언자들에게서 발견하는 사회정의에 대한 열정은 체제적인 악에 대한 저항입니다. 어떤 사람은 미투리 한 켤레 값에 팔리는 그 순간에, 다른 사람은 상아 침대와 상아 궁전에서 호의호식할 수 있게 해 주는 그 체제에 대한 도전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예언자적 희망을 몸과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하느님의 꿈은 “함께 아파함의 세상 만들기”입니다. 비정규직이나 해고된 노동자들이 자주 기도하는 것처럼 “함께 살자”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서 나타나는 함께 아파함은 생명을 가져다주고, 성장하게 하며 포용하는 정치질서를 제안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배가 없는 하느님의 질서를 지향하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실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개인적인 삶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새로운 사회구조를 전제로 개인의 바람직한 삶에 대한 열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회 구조는 개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하느님에게 개인이 중요한 것처럼 정치 구조도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꿈은 개인의 가치에 대한 강조를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열정적인 관심과 하나로 결합시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꿈을 이루는 사람들입니다.
성서일과에 있는 다른 본문인 시편 23은 우리의 삶의 구체적인 현장에서 암송되고 불러져야할 시입니다. 세상을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로 만들기 위해 희망하고 기도하고 몸으로 실천하는 일은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계속되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희망하고 그 날을 기다리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실천할 때입니다.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골짜기처럼 험하고 지난한 현실에 부딪히게 됩니다. 우리의 현대사에서만 보더라도 그 일을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고, 지금도 여전히 우리가 알든지 모르든지 그러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희생을 많은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거나 애써 외면합니다. 그러나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는 하느님의 은혜로 우리가 함께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로 만드는 데에 필요한 힘을 우리에게 주실 것을 믿습니다.
원수는 “속박하고 억압하는 사람, 고통스럽고 곤란하게 하는 사람, 고난을 주는 사람, 괴롭히는 적대자”를 말합니다. 원수들은 우리를 위협하거나 억압하는 사람들, 괴롭히거나 고통을 주는 사람들, 곤란하게 하거나 유혹하는 사람들이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엄연한 현실입니다. 원수들은 우리가 사는 동안에 끊임없이 우리를 찾아오고, 하느님의 이름을 위하여 정의의 길로 가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 원수들 앞에서 잔칫상을 차려주시고, 머리에 기름을 부어서 누군가의 메시아로 삼으시고, 내 잔이 넘쳐서 다른 사람들과도 나누게 하시는 분이 야훼 하느님입니다. 원수같은 세력이 판치는 현실 속에서도 그들을 물리치고 능히 이길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분이 야훼 하느님입니다.
시편은 새번역보다는 개역이나 공동번역이 직역하면서 분위기를 더 잘 표현해서 좋습니다. ‘해’는 ‘으르렁거리는 소리’입니다. 야훼 하느님의 지팡이는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며, 막대기는 우리를 위협하는 세력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야훼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위협과 협박이 으르렁거리며 달려와도 두려워하지 말고 함께 갑시다.
우리는 지난 주일을 어린이/청소년주일로, 이번 주일을 어버이주일로 지킵니다. 어린이와 청소년과 어버이를 모두 포함하는 것이 공동체입니다. 공동체 중에서 가장 끈끈하고 기본이 되는 것이 가족입니다. 가족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단어들에는 굉장히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이거나, 두 가지가 공존해 있습니다. 가족은 가장 가까우면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미워하게 될 수도 있고, 원수처럼 지낼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에 가족공동체의 끈끈함이 사라지고 따라서 사회는 극단적인 개인화와 경쟁에 휩쓸려가고 있습니다. 또한 반대로 왜곡된 가족의 사랑, 가족이기주의가 만연해 있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가족은 오랜 시간 헤어져 있다가 만나도 마치 어제 만난 양, 아무런 거리낌 없이 웃고 대화할 수 있는 관계입니다. 단순히 피를 나누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행복과 불행을 함께 했고, 기쁨과 슬픔을 나누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게 동고동락한 관계이기에 가족이란, 오랜 시간 현실 세계를 함께 공유하지 못하고, 서로의 생각이 다르다 할지라도, 그것이 함께 웃고, 대화하는데 장애가 되지 못합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에 그 감정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가족입니다.
주중에 어린이날이 있었고, 오늘은 어버이날입니다. 어떤 날이나 기념일이 있고 그 날을 지키는 이유는 항상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날만이라도 그 의미를 생각하자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족과 관련된 날이 많은 5월에 “나에게 있어서 가족은 어떤 것인가? 가족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를 한 번쯤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찰스 크로우는 가족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다툼의 세계는 이제 끝, 여기서부터는 사랑의 세계. 작은 자가 커지고 큰 자가 작아지는 곳. 아빠의 왕국, 엄마의 세계, 어린이의 천국. 불평은 가장 많이 하면서도 최고의 대접을 받는 곳. 우리 애정의 중심이요, 우리 마음의 소원들이 합쳐지는 곳. 우리 위장은 삼시 세끼의 식사를 얻지만 우리 가슴은 한없는 양식을 공급받는 곳.”
부모는 자녀를 키우면서 생명을 키우는 일, 세상을 가꾸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 그 전제는 순정한 하느님의 사랑이며, 그 대상은 자기의 자녀뿐만이 아니라 모든 어린이들입니다. 모든 교회 공동체가 가족 같은 공동체를 지향하면서 가까이 가려고 한다면 좋겠습니다. 어른들도 그렇지만, 어린이들끼리 형제나 자매의 관계 속에서 서로 위해 주는 모습은 우리 어린이들이 자라나면서 인격을 형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부터 시작한다면, 우리 삶의 가장 바탕인 가족과 교회 공동체에서부터 하느님의 사랑이 가득하여 넘쳐흐르게 한다면, 분명히 세상은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가 될 것입니다. 모든 어린이들이 신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부모들의 따뜻한 마음과 진지한 행동이 더욱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 자녀들의 미래를 위해서,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
함께 모두가 행복할 수 있도록 이 세상을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로 만드는 일을 찾아서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곳은 나만을 위한 곳이 아니라 모든 생명들이 쉼과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곳입니다. 우리들의 손길이 필요한 곳에서 봉사도 하고, 자연을 파괴하고 몇몇 사람들만을 위한 정책을 반대하는 활동도 해야 합니다. 그러한 활동이 지금은 귀찮고 괴롭지만 궁극적으로는 신나고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일입니다. 그 길에 하느님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