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왕상 3:5-14 골 3:1-11 요 4:31-38
1. 가지지 못한 것
예수님께서 잠시 유대 지방에 계시다가 갈릴리 지방으로 가시던 도중, 사마리아 지방 수가 성(城)을 지나가실 때였습니다. 이때 주님께서는 야곱의 우물가에서 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영원히 목 마르지 않는 생수가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해주십니다(요 4:1-30).
오늘 본문 신약 성서의 말씀은 그 이후의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다가 돌아왔습니다.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이르되, 랍비여 잡수소서.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니?(요 4:31-33)” 예수님의 양식은 무엇일까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
빅터 플레밍 감독의 영화 <오즈의 마법사>(1939)는 뇌가 없는 허수아비, 심장이 없는 양철 나무꾼, 용기 없는 겁쟁이 사자가 자신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찾아 길을 떠나는 내용입니다. 자신들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힘겨운 여정을 함께 떠나는 것입니다. 가지지 못한 것을 찾아 떠나는 인생의 여정! 그렇다면 부활한 예수님을 만난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찾아 오즈의 마법사를 찾아가야 할까요? 아닙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세 본문 말씀은, 사람은 무엇을 가져야 되고, 또 무엇을 가져서는 안 되는가 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내용을 구약과 서신서의 말씀이 우리들에게 들려줍니다.
<오즈의 마법사> 포스터
2.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먼저 솔로몬의 가지지 못한 것을 찾아 떠나는 여정을 살펴볼까요? 구약 열왕기상 3장의 말씀은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린 이후, 꿈에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시어, 지혜와 더불어 부귀와 영광도 주시는 장면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솔로몬이 이르되,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그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그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항상 주사, 오늘과 같이 그의 자리에 앉을 아들을 그에게 주셨나이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버지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주께서 택하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그들은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왕상 3:5-9)
한마디로 자신은 부족하니, 백성들을 지혜롭게 다스릴 수 있도록 선악을 분별하도록 해달라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것은 창세기의 선악을 분별하는 선악과로 원죄의 근원이 되기는 하지만, 아무튼)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왕상 3:10).” 하나님께서 마음에 들어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이에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장수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으니,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네 앞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네 뒤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내가 또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왕들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네가 만일 네 아버지 다윗이 행함 같이 내 길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또 네 날을 길게 하리라.” (왕상 3:11-14)
예수님의 양식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요 4:31)이라면, 솔로몬은 지혜로 주의 백성들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주님께서 주신 지혜로 비록 현명한 재판을 하기도 하지만(가령, 한 아이를 사이에 두고, 논쟁을 벌인 두 창기 여인의 재판을 볼 수 있습니다. 왕상 3:15-28), 결국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가 흐려져 악을 구별하지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솔로몬의 마지막은 비참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아니지만, 열왕기상 11장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솔로몬이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의 아버지 다윗이 여호와를 온전히 따름 같이 따르지 아니하고, 모압의 가증한 그모스(Chemosh, 모압이 국가신으로 숭배한 전쟁 신으로, 예배 중에는 인신 제사가 있음)를 위하여 예루살렘 앞산에 산당을 지었고 또 암몬 자손의 가증한 몰록〔Moloch, 몰렉, ‘밀곰’(왕상 11:5), ‘말감’(렘 49:1)이라고도 불리며 사람의 몸에 황소 머리, 두 팔을 벌리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제사를 드릴 때 보통 어린아이를 불태워 바치는 인신 제사가 행해졌음〕을 위하여 그와 같이 하였으며, 그가 또 그의 이방 여인들을 위하여 다 그와 같이 한지라. 그들이 자기의 신들에게 분향하며 제사하였더라. 솔로몬이 마음을 돌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진노하시니라.” (왕상 11:6-9a)
<그모스신과 몰록신, 각각 모압과 암몬의 신이나 동일한 신으로 볼 수 있다>
한 아이의 생명을 구했던 지혜로운 솔로몬 왕이 이제는 아이를 인신 제사로 바치는 신을 위하여 산당을 예루살렘에 지었습니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솔로몬이 어린아이를 재물로 받는 신의 산당을 지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져서는 안 될 우상을 세워 하나님을 진노케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가지지 못한 것은 어떤 것인가요?
3.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골로새서는 성경 가운데 가장 그리스도 중심적인 말씀입니다. 에베소서를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 골로새서는 ‘교회의 그리스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부분(1-2장)은 교리적인 부분이고, 뒷부분(3-4장)은 실천적인 권면의 말씀입니다. 만물의 으뜸 되시는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가 앞부분의 핵심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하심이요.” (골 1:17-18)
실천 부분인 오늘 본문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두 가지를 당부합니다. 첫째는 ‘위의 것을 찾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골 3:1).” 그리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합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골 3:2-4)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새사람(새 인간, new self)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새사람은 인종과 율법, 할례, 신분에 차별이 없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놀라운 해방의 선언입니다. 함께 보겠습니다.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Scythians, 이란계 기마민족)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오. 만유 안에 계시니라.” (골 3:10-11)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골 3:10)’라는 말은 새사람은 창조주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며 ‘참된 지식(ἐπίγνωσις)’을 가진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솔로몬의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 곧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참된 지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지식을 받는 사람들을 차별 없이 선택하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요한복음 4장 4-42절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에 관한 말씀은 다른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 요한 특수 자료입니다. 사마리아인들에 대해 긍정적이며 호의적인 누가복음서도 예수께서 생전에 사마리아 지역에 들어가 전도했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오히려 마태복음에는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파송하시며 이렇게 말씀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마태복음의 대상자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만)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 10:5-6).”
따라서 요한복음의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는 요한공동체의 핵심적인 신학 사상 두 가지를 보여줍니다. 먼저는 요한공동체의 기독론입니다. 그것은 순서대로 예수님을 한 ‘유대인(요 4:9)’에서 ‘주(11)’, ‘우리 조상 야곱보다 더 큰 이(12)’, ‘선지자(19)’, ‘메시야 곧 그리스도(25-26; 29)’, ‘세상의 구주(42)’로 확장되어 나아갑니다. 또 하나는 유대인들에 의해 차별받는 사마리아 지역이 예수님에 의해 선교된 지역이며 예수께서는 이 지역에 대해 유대인들이 가졌던 편견과 차별이 없었음을 보여줍니다(물론, 이것은 요한 공동체와 사마리아인들의 공동체가 우호적인 관계였음을 보여줍니다). 중요한 것은 복음에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고, 위의 것을 생각할 때 가능합니다.
4. 심는 사람과 거두는 사람이 함께!
이러한 차별 없는 새사람으로의 변화는 만유(every one, everything and all things; 누구나, 무엇이든지, 나아가 모든 것) 안에 계시고, 만유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가능합니다. 본문인 요한복음서 후반절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 (요 4:35-38)
조금 어렵기는 하지만, 앞서 요한 공동체의 신학으로 보아, ‘심는 사람(뿌리는 자, 노력하는 사람)’과 ‘거두는 사람(거두는 자, 노력하지 아니한 사람)’은 ‘사마리아인들의 공동체’와 ‘요한 공동체’를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 모두 함께 즐거워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은다는 것입니다. 차별 없이 함께 영생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곧, 심는 사람과 거두는 사람이 함께 구원의 길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영화 <반지의 제왕: 반지원정대> (2001)에서 주인공 프로도는 호빗이라는 소인족들이 모여 사는 마을의 청년입니다. 영화는 이 작은 몸을 가진 젊은이가 절대반지를 불의 산에서 파괴하게 되기까지의 긴 여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프로도의 이 여정에 함께하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호빗족 친구들과 각 부족의 고수들로 구성된 반지원정대가 바로 그것입니다.
사실 가장 연약한 존재인 호빗족의 프로도가 절대 반지를 파괴하는 임무를 맡고 이를 완수하는 것은 조금 이상합니다. 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요정이나 신체적으로 힘쎈 부족, 혹은 무기를 잘 다루는 병사나, 멋진 왕자가 아닌 소인족일까요? 심지어 프로도는 반지를 소유하고자 하는 유혹에도 넘어가는 나약한 의지의 주인공입니다.
이것은 프로도의 원정이 특별한 영웅의 여정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여정임을 보여줍니다. 특별할 것 없는 나약한 우리들의 여정에, 내가 지쳤을 때 나를 업고라도 목적지에 도착해 줄 친구와 세상의 모든 지혜를 담고 있는 듯한 마법사 간달프와 나를 위해 싸우는 영웅들이 언제나 내 곁에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백마를 탄 아르웬과 현재와 미래를 읽어내는 갈라드리엘이 항상 함께 하며 위험이 닥쳤을 때 경고하고, 우리가 다쳤을 때 치료해 준다면 얼마나 든든할까요?
<프로도의 친구 아르웬, 친구들, 갈라드리엘>
오늘은 어린이・청소년주일이기도 합니다만, 아이들이 좋아하는 영화 <해리 포터>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채 천덕꾸러기로 살아가던 해리 포터에게 어느 날 편지가 배달됩니다. 포터는 겉봉투에 자신의 이름이 씌어있는 것이 이상하기만 했습니다.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안다는 것이 신기한 것입니다.
<해리 포터>
따라서 영화 <해리 포터>에서 가장 매력적인 장면은 마법의 세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포터를 알아본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너를 안다”, “내가 네 이름을 안다.” 얼마나 힘을 주는 말 인가요! 우리의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 줄 때 아이들은 힘을 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아십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을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져서는 안 되는 것도 아십니다.
5. 가져서는 안되는 것
이렇게 심는 사람과 거두는 사람이 함께 가는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차별 없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부활을 경험한 공동체는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을 경험한 공동체인 교회가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을 골로새 교인들에 잘 이야기 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공동번역: 세속적인 욕망, 표준새번역: 땅에 속한 지체의 일들)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골 3:5-9)
솔로몬이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로 백성들을 다스리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셨습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이 마음을 돌려 하나님을 떠남으로 가져서는 안 될 것을 가졌습니다. 세속적인 욕망을 통해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정욕, 탐심을 통해 새사람이 옛사람의 행위로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은 땅에 있는 지체들의 일입니다. 그것은 세속적인 욕망을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은 차별 없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가지지 못한 것을 찾아 떠나는 인생의 여정에,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주시는 구원의 기쁨이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 영화 이야기는 김서영,『영화로 읽는 정신분석』 (은행나무, 2007)을 참조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