겔 11:14-23, 롬 6:3-15, 요 3:1-15
이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은퇴한 지 12년이 넘은 시니어임을 밝힌다. 은퇴 후 지금까지 한 교회에 꾸준히 다녔고 부활주일에 설교 말씀을 잘 경청하였다. 거기에서 많은 도전과 자극 또 큰 감동까지 받았다. 그런 처지에서 이 말씀을 전한다는 게 떨리며 송구스럽다. 나는 시니어로 가끔 말씀을 전할 때 듣는 청중에게 가르치거나 강요한다는 생각보다 이제까지 하나님 말씀으로 살겠다는 자신의 고백적 언어로 <아가페>의 이야기를 전했다.
이번 부활절에 그 교회가 <날마다 새롭게>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간하여 ‘북 콘서트’까지 마련해 주었다. 거기에 나의 부활 고백 같은 이야기가 3편이나 들어 있다. 다시 읽으며 자신을 믿음으로 살자고 추스른다. 김재준 목사님은 86 고령에서도 설교하셨고, 지금 생존하신 유동식 풍류 신학자(101세)는 연세대 교회에서 올해 초에 설교하셨다. 그 말씀들이 얼마나 감동적인지 다시 새기고 있다.
부활이란 누가 전하거나 설명해서 이해되거나 납득하여 받아드리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오로지 성령 안에서 예수님이 본을 보이신 믿음의 역사라고 할 수밖에 없다. 50 년 가까이 교회에서 교인들에게 부활을 전했던 것을 생각해보니 교회의 교리나 어떤 주장을 주로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부족하나마 자신의 고백적 부활 신앙과 삶을 겸허히 전하게 된다.
복음서의 부활 말씀들이 똑같지 않음을 알 것이다. 또 사도 바울의 부활 고백이 우리에게 확실하고 뚜렷하게 와 닿는 것도 아니다. 왜 그럴까. 그것은 부활이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 사건이 믿음으로 사는 자신에게 체험되고 받아들여질 때, 그 스스로 이해되는 것뿐이다. 죽어 본 일이 없는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그 부활을 어떻게 알겠는가? 하지만 여기서 강조하고 자 하는 바는 거듭나는 부활 인생이 있다는 것이다.
1. 구약의 증언(겔 11:14~23)
에스겔은 유대의 제1차 바벨론 포로 중에 끼어 있었다. 겨우 30 정도의 청년으로 생각되며 유력한 제사장의 후손으로 주전 593년경 예언자로 부름을 받았고, 약 20년간 예언 활동을 했다. (겔 40장 참조) 그는 환상의 예언자이다. 지금 말로 표현하자면 비전의 사람이라 하겠다. 부름을 받았을 때 장면 묘사를 ‘그날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이상이 내게 보였다’고 한다. (1:1) 그런 그가 바벨로니아게 끌려간 포로 신분으로 선포한 것은 어두운 파멸의 예고 같은 것이었다. (7:10~12) 그러나 거기에서도 낙심하지 말고 정신을 차리라고 한다.(18:31-32)
11:14~23 내용은 그가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한 말씀을 전한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비록 멀리 왔고 버려진 듯 보여도 거기서 하나님 자신이 성전이 되어 주시며, 흩어졌던 그들을 모아 이스라엘 땅을 그들에게 주겠다(17절)고 하신다. 우리나라가 일제의 치하에서 36년 지냈을 때를 생각하면 이해가 될 것이다. 절망 가운데에서도 낙심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 놀라운 위로와 희망의 말씀이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일치된 마음을 주고 새로운 영을 그들 속에 넣어 주겠다. 내가 그들의 몸에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살 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주겠다. 그래서 그들은 나의 율례대로 생활하고 나의 규례를 지키고 그대로 실천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19~20)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가 되어 바벨로니아에 와 고생을 할지라도 하나님은 거기서 저들을 연단하여 쓰신다는 것이다. 그 고난의 경험들이 이스라엘 종교를 세계적 종교로 발전시켰다. 하나님은 어느 곳에 있든지 창조주 하나님으로 살아 역사하신다. 이 에스겔서의 핵심이 37장에 드러나 있다. 그 내용이 민족의 부활을 보여준 것이다. 어떤 최악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꿈틀거린다. 죽어서 썩은 해골 같은 것들이 다시 살 수 있는가? 여기서 에스겔이 답한다. ‘주님이 아십니다.’라고!
가끔 생각한다. 지금처럼 현장을 모두 녹화하는 시스템이 있다면 성경의 중요한 장면을 알아볼 수 있을까? 에스겔의 환상을 이렇게 저렇게 그 장면을 그려보기도 한다. 한 민족의 부활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누구나 저마다 나름으로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놓치지 말자! 이 메시지가 던지는 확실한 가르침을 붙잡으라는 것이다. 이 메시지는 죽음 가운데서의 새 창조이며 새로운 영의 움직임으로 된 새 인간들이 믿는 하나님이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저들은 그의 백성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백성들 하나하나가 온전히 새 바탕으로 다시 거듭나는 데서 ‘진정한 인간’으로 갱신된다. (11:19-20, 36:26~28)
2. 서신서 말씀(롬 6:3~15)
오랫동안 성경을 읽고 신학을 공부했고, 저명한 신학자였던 분에게서 직접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스승이 저술한 주석서를 읽어본다. 몇 번이나 거듭 보았던 흔적으로 강조했던 밑줄까지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 내용을 잘 알 수 없었다. 이런 설명은 설교자가 아무리 잘 전해도 그대로 완벽하게 소통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나 그 말씀을 주의 깊게 들어주는 교인들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겸손히 받아드리고 나름으로 이해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데 도움이 되기 바란다.
서신서의 본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산다’는 요지의 말씀이다. 누가 죽어 보았는가? 그 비슷한 경험을 했을지라도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다. 인간 아무개의 육신이 죽어 사망신고를 받았는데 그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이런 물음은 성경의 죽음과 생명, 거듭남, 부활 이런 특별한 말의 뜻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지금 너는 나를 따르라’는 뜻으로 제자를 부르신 적이 있지 않은가. 또 계시록에서는 ‘죽었으나 살았다’는 말씀이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부활의 증언에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했다. 역사적 위인 이순신은 <사즉생 생즉사>라고 했다. 죽는 것이 사는 것이며 사는 것이 죽은 것이다. 그런 뜻이겠으나. 다시 풀이하여, 살려고 하면 죽고 죽으려는 자세로 행하면 산다는 강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그분의 죽으심과 연합하는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3절) 이 본문에 관계된 주석에서 전경연 박사는 세례의 뜻을 ‘물에 들어가는 것은 죽음, 물 속에 파묻히는 것은 매장, 물 속에서 나오는 것은 부활을 각각 상징한다.’라고 했다. 이런 세례가 교회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기 때문에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권장한다고 생각한다. 예수를 따르겠다는 비장한 결심과 그런 인생을 한결같이 지속하겠다는 다짐인 것이다. 이것이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않고 성령의 역사로 가능하다는 것이 전제된다 하겠다.
김재준 목사님은 제자들에게 ‘사람은 죽음을 사는 것이다!’라는 뜻으로 전했고 그의 제자인 문익환 목사는 이 가르침을 ‘나는 죽음을 살고 있다!’는 의연한 각오로 사셨다. 어찌 보면 인생은 죽음을 향해 사는 것처럼 보인다. 최근에 소천한 고 이어령 씨는 ‘죽음과 생은 손등과 손바닥과 같다’라고 했다. 이런 예를 든 것은 죽음과 생명, 부활 같은 명제는 매우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하게 알 것은, ‘우리는 우리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서 죽은 것이 죄의 몸을 멸하여서 우리가 다시 죄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임을 압니다.’‘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그와 함께 우리도 또한 살아날 것임을 믿습니다.’라고 한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20에서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라고 한다. 이 환희에 찬 고백을 믿음으로 사는 우리가 함께해야 한다.
다시 강조한 구절은, ‘이와 같이 여러분도 여러분 스스로가 죄에 대하여는 죽은 사람이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11절) 이것을 풀어 설명하는 구절로 ‘그러므로 죄가 여러분의 죽을 몸을 지배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오히려 여러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난 사람답게 여러분을 하나님께 바치고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연장(도구)으로 하나님께 바치십시오.’(14절)라고 했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몸은 성령 안에 있다는 것이며, 새로운 생의 현실을 지지하는 것이다. 부활의 생은 미래에 있을 것으로 그치지 않고 현재 이미 활동하는 것이다.
3. 복음서 말씀(요 3:1~15)
유대인의 의회원이며 이스라엘의 선생으로 불린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려 하지 않고 밤중에 예수님을 찾았다. 이처럼 숨은 예수의 제자가 있었다. 바로 그런 사람이 예수님과 대화하는 장면이다.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랍비님, 우리는 당신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생인 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고서야 누가 선생께서 이루신 것 같은 표적을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사역). 이에 예수님은 ‘그렇소.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소’라고 답하신다.
어떤 사람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고 듣고 만지며 느끼는 경우가 있다. 예수님은 이 같은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하셨다. 니고데모는 그런 부류에 가까운 사람임에도 예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듯하다. 사람이 다시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올 수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바로 그에게 예수님은 ‘그렇소, 내가 진정으로 말하오.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소.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요....’라고 설명하신다.
거듭난다는 말 <아노텐 anwthen)은 1) 꼭대기에서 2) 하나님께로 부터 3) 처음부터, 철저히 4) 다시 등의 용례로 사용되는 단어이다. 니고데모는 4)번의 뜻으로 받아들여 ‘어머니 뱃속에서 다시 태어남’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전주 새누리교회의 비전문 가운데 ‘예수님의 믿음과 사랑을 믿어, 하나님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 사랑하는 기쁨과 감사 누리며...’라는 대목이 있다. 교우들이 날마다 이 비전문으로 기도한다. 나는 그때 마다 <하나님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는...> 이 대목에 매우 주목하고 있다. 늘 새롭게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거듭난다’라는 헬라어의 뜻이 그런 것이라고 공감한다.
예수님이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 너희가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내가 말한 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아라.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라고 하신다.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은 곧 그 나라에 ‘들어가는’것이요, 세상 나라에서 그 몸을 담아 사는 <세계>를 바꾸는 것이다. 거듭난 사람은 자신이 거듭났다는 의식을 지니지 않는다. 그처럼 자연스럽게 하나님 나라를 산다 하겠다. 이것을 예수님은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는 듣지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라고 하신다. 어떤 사람이 열심히 수행하였다. 3년쯤 했는데 스스로 살펴보니 도무지 달라진 구석이 없어 보였다. 그가 아내를 보고 ‘나는 아무래도 수행을 그만두어야 할까 보오, 조금도 나아지지를 않으니 말이요.’라고 탄식하는데, 아내가 대답하기를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거예요? 당신 그동안 아주 많이 달라졌어요. 화를 내는 시간도 무척 짧아졌고요.’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역시 <다시 태어나는> 어떤 모습이라 하겠다.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고, 거기서 사는 경험을 하기에 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깨닫는다. 하나님 나라를 살면서 늘 감사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