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욥 19:23~27, 고전 15:1~11, 막 15:42~16:8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가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부활주일이며 장애인주일과 4.19혁명 기념주일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하고 그 기쁨을 나누며, 불의한 역사 속에 하나님의 의를 외쳤던 역사를 기억하고, 오늘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을 보여주시는 것 같아서 뜻 깊은 주일입니다.
목회 정년을 앞둔 목사님이 지난 목회를 되돌아보니 인상 깊은 것은 대부분 장례식이었다고 했습니다. 뜻밖의 말이었지만 생각해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습니다.
코로나19의 펜데믹을 겪으며 “부활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그렇지 않는 사람들과 다른 삶의 태도를 보였는가?” 하고 묻는다면 자신 있게 “그렇다.”고 말하기가 망설여집니다. 그만큼 죽음은 우리의 일상처럼 가깝고 친숙하지만 피하고 싶은 두려움과 불안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그런 인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은 부활입니다. 오늘 세 본문과 함께 인류의 소망인 예수의 부활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1. 나의 대속자는 살아계시다.(욥기19:25)
우리는 물어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데 세상이 정의롭지 않고 악이 존재하고 의로운 사람이 고난을 당하고 불행을 겪는가?”
우스 땅의 욥이 그렇게 물었습니다.
그는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여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습니다.(욥1:1)
어느 날 욥에게 난데없이 온갖 불행이 닥쳐왔습니다. 재해가 임해 사랑하는 가족들이 죽고, 욥도 끔찍한 질병의 고통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태어난 날을 저주할 정도로 고통의 풀무불 가운데 놓이게 되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친구들은 일이 이 지경에 되었을 때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라며 여러 가지 충고를 늘어놓습니다. 그 핵심은 “네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벌을 받는 것이다.” 위로하기 위해 온 것이지만 그들의 주장과 태도는 무자비한 고발자요 심판자였고, 정죄하고 책망하는 종교적 꼰대(?)들이었습니다. 욥은 그들의 말에 거세게 항변 했습니다. “나는 너희들 말처럼 그렇게 살지 않았다. 터무니없는 소리들 하지 말라. 숨겨진 죄가 있는 것도 아니다. 지금 이런 상황이 너무 고통스럽고 당신들에게 이런 취급을 받는 것이 억울하다.”
그래서 그는 말했습니다.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중보자가 높은 데 계시니라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고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니(욥16:19-20)
고난과 고통이 죄를 지은 형벌이라는 말에 대해 하나님께 하소연했습니다. 하나님이 아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어주셔야 나의 이 억울함과 원통함이 풀립니다. 그리고 믿음을 선언합니다.
나의 대속자는 살아계시고(욤19:25)
여기서 ‘대속자’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고엘’의 번역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여러 가지 용례로 쓰입니다. 빚을 지고 있거나 그것 때문에 종살이를 하는 사람을 회복시켜줄 의무를 지닌 친족을 뜻합니다. 무고한 죽음에 대해 대신 복수해줄 사람을 지칭할 때도 고엘이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그 백성을 구속하시는 하나님, 고아와 과부를 신원하시는 하나님, 고난 받는 자를 구속하시는 하나님을 고엘로 묘사하기도 합니다.
욥은 고난 속에서 그 대속자가 자기를 위로하고 변호해줄 것이라고, 설령 자신이 고난 속에 죽는다고 할지라도 나의 대속자는 여전히 살아 계셔서 욥의 명예를 회복시키실 것이라고 믿고 선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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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욥과 같은 억울한 고난을 겪고 그로 인해 비난과 모욕을 받고 정죄를 당한다면 우리도 욥처럼 항변하고 나의 대속자가 나를 위로하고 변호해주고 진실을 밝혀 줄 것이라고 믿고 선언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역사나 사회에서 일어나는 불의한 일들이나 그로 인해 억울한 모함과 부당한 고난을 받는 사람들을 위해 우리는 이 메시지로 맞서고 기도해야 합니다.
2. 죽었다. 그리고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막 15:42~16:8)
우스 사람 욥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의인의 고난이 있고, 이해하지 못할 고난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러한 고난의 정점에 서 있는 것이 예수의 십자가 처형입니다.
나의 억울한 고난에 대해 위로해주고 변호해주고 옳음을 밝혀 주어야 할 대속자가 죽었다. 이것은 충격중의 충격이었습니다. 더 이상 세상에서 내가 위로받고 기댈 언덕이 사라지는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살아서 모든 악을 제하고 왕으로 등극해서 심판을 해야 할 대속자가 어이없게 죽었습니다. 참으로 무능하고 볼품없이 죽었습니다. 그것도 저주받은 죽음이라고 하는 나무 십자가에서 강도들과 함께 처형되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과 예수의 사람들은 온통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존재의 근원이 무너졌습니다.
마가복음 15:42-16:8까지의 말씀을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그가 따랐던 마음의 스승, 예수에 대한 인간적인 예우를 다했습니다. 그는 예수의 시체를 거두어서 정중히 무덤에 장사를 지냈습니다. 충격과 혼란, 두려움과 실의에 빠져서 예수의 시신을 거둘 생각도 못한 제자들에 비하면 훨씬 나아보입니다.
그리고 여인들의 모습도 보입니다. 여인들은 가슴이 무너져 내리던 아픔을 뒤로 하고, 사랑하는 이의 주검을 마지막으로 보고 정결하게 하기 위해서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그 용기가 남자 제지들보다 났습니다. 사랑의 용기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인간의 예의를 알고 죽은 이의 시신을 거두어 안장한 일은 고귀한 일입니다. 여인들이 두려움을 이겨내고 사랑의 용기를 가지고 무덤을 찾아간 것은 아름다운 헌신입니다. 그 모든 일들은 존중받아야 할 귀한 헌신입니다. 그러나 그런 고귀한 일들이 억울한 죽음을 돌이킬 수는 없습니다.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겪고 사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는 일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들의 헌신도 시간이 지나면 잊히고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역사에서 또 한 번의 기대를 걸었다가 실망하는 일을 반복했다고 세상이 그렇지 뭐, 새로운 일이 있을 라고 하면서 돌아설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의 대 반전은 부활입니다. 부활은 인간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인간적인 예의를 차리고, 두려움을 이긴 사랑의 헌신도 부활을 만들지는 못합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도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도 혼란과 충격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불안한 시간을 보내던 제자들도 부활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계획이고 하나님만 하실 수 있고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하고, 죽고, 무덤에 묻혔던 예수, 바로 그 예수가 살아났다.”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천사로부터 그 소식을 전해들은 여인들이 모습이 그 당황스러움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막16:8)
그렇습니다. 부활은 우리에게 낯선 것입니다. 낯선 부활은 우리를 혼란과 두려움에 빠뜨립니다. 그러나 그 부활은 우리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바꾸어 놓습니다.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습니다. 삶의 의미와 가치관을 바꾸어 놓습니다. 부활의 빛에서 십자가의 죽음의 참된 뜻을 깨닫게 됩니다. 의인의 고난이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이 허무하지 않은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았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가치있는 소중한 존재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3. 부활, 모든 것을 바꾸다(고전 15:1~11)
가장 극적인 부활의 증언자는 바울입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그의 삶의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지난날 그가 자랑하고 좋아할 만한 일들을 배설물처럼 버릴 정도로 달라졌습니다. 율법으로 의인이라고 자부했던 그가 죄인 중의 괴수요 만삭되지 못해 태어난 자라고 고백할 정도로 달라졌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예수의 고난과 죽음이 “성경대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았습니다. 부활의 빛에서 예수의 고난과 죽음이 대속의 사역이었음을 알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1-11절에 나오는 모든 부활의 증인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예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상처로 우리의 상처를 낫게 하고, 당신의 죽음으로 우리의 죽음을 없이 하고 우리 죄를 대신함으로써 우리 모두의 죄를 사하여주신 우리의 구원의 주님이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남으로 성경을 보는 눈이 달라졌고, 새로운 믿음이 생겼고, 그들의 삶이 달라졌고, 부활의 주님을 증언하는 진리의 길에 두려움 없이 죽음도 불사하고 선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그 반열에 서야 합니다.
부활신앙은 우리 신앙의 핵심이요 바탕입니다. 그래서 가장 큰 박해자였다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복음의 사도로 변한 바울은 그래서 부활이 없으면 복음을 전하는 우리의 믿음도 헛되다고 했습니다.(고전15:140)
박해자에서 부활의 증인으로 변한 바울의 회심은 주님의 부활을 더욱 확고하게 증언해줍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원수를 용서하고 죄인을 거룩한 주님의 도구로 쓰시는 놀라운 사랑을 만나게 됩니다. 부활은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요 미움에 대한 사랑의 승리요 죄에 대한 은총의 승리요 악과 불의에 대한 선과 의의 승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을 믿고 부활의 증언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의로운 고난과 이해할 수 없는 고난에도 나의 대속자의 살아계심을 믿고 나갑시다.
지금 어둠과 불의가 득세한다고 할지라도 부활의 새 날이 올 것을 믿고 견디기 바랍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바꾸고, 바울을 바꾸고 나의 모든 것을 바꾼 부활이 당신과 세상의 모든 것을 바꿀 것이라는 믿음으로 부활의 증인이 됩시다.
예수 부활, 인류의 소망,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하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