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 28:10-22, 요 17:11-19, 롬 8:33-39
요한복음 17장은 고별기도의 장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서 공관복음서의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겟세마네기도(마 26:36-46; 막 14:32-42; 눅22:40-46)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릅니다. 공관복음의 겟세마네 기도가 고통과 고뇌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승리를 확신하며 자신과 제자들과 온 성도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라고 하면서 남겨진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는 것을 영광을 받는 것이며 하늘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로마서 본문에서는 예수는 죽으셨지만 오히려 살아나셔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계신다고 증언합니다.
지난 5월 30일(목)은 예수승천일이고, 오늘(6/2)은 예수승천주일로 지킵니다. 예수님이 부활한 지 40일 후에 승천하였고, 이를 기념하는 교회력절기를 예수 승천일이라고 합니다. 요즘 개신교에서는 교회절기로 중요하게 여기지는 않지만, 북유럽에서는 아직도 그날을 공휴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신 후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40일 동안 제자들을 만나서 부활의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주시고 소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감람산 위에서 500명이 보는 가운데 승천하셨습니다.
해발 800m가 되는 감람산 꼭대기에는 예수님의 승천을 기념하는 교회가 있는데 그 안에 팔각형의 건물이 있습니다. 팔각건물은 예수님의 승천을 상징하여 지붕을 씌우지 않았었는데, 이슬람교도들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에 모스크를 상징하는 돔으로 지붕을 만들어 덮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 승천의 상징을 없애고 재림을 막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팔각 건물 안에는 예수님이 승천할 때에 밟았다고 하는 바위가 있는데, 희미하게 발자국이 움푹 패여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승천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개신교에서 부활절과 성령강림절은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잘 지키고 있지만, 그 사이에 있는 승천일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승천의 상징적 의미를 통해서 우리는 신앙적으로 성숙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왔다가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상징입니다. 상징은 삶의 정황에 맞게 해석을 해야지 그 의미가 생생하게 살아있게 됩니다. 예수님이 올라갔다고 하는 하늘은 어떤 하늘입니까? 하늘의 의미를 생각할 때에 예수님의 승천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늘의 경계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합니까? 어디부터 하늘입니까? 우리의 키 이상이면 하늘인가요? 땅으로부터 몇 Km이상이 떨어지면 하늘이라고 할 수 있나요? 아니면 대기권 밖을 하늘이라고 할까요? 하늘은 시작되는 점이 없습니다. 내가 숨 쉬고 활동하는 이곳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내가 숨을 쉴 때에 내 몸에 들어오는 것도 하늘입니다. 숨을 쉴 때에 단순한 공기를 마시는 것을 넘어서 하늘을 마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속에 있는 것도 하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바로 나로부터 시작됩니다. 따라서 내가 인지하고 있는 모든 빈 공간이 하늘입니다.
예수님이 하늘에 오르셨다는 상징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존재양식의 전환입니다. 유한하고 한계로 둘러싼 육체적 존재의 굴레를 벗어나서 하늘처럼 어디에나 있을 수 있는 존재로 전환되었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라 모든 곳에 언제든지 계시는 분으로 전환되었다는 상징입니다. 하늘은 저 멀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를 둘러싸고 있으며, 내 속에도 있는 것입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 다른 생명들 속에도 있습니다. 하늘은 무소부재(無所不在)하고, 따라서 하늘에 오르신 예수님도 무소부재합니다.
이러한 하늘의 상징은 나와 남을 하나 되게 하는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나의 숨과 남의 숨을 연결하는 것은 보이지 않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하늘입니다. 숨을 쉬는 것은 바로 그 하늘을 받아들이고 내 놓는 것입니다. 또한 밥을 먹는 것은 하늘로부터 온 생명의 양식인 예수님의 몸을 먹는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 몸의 가장 중요한 생명활동인 먹고 숨 쉴 때마다 우리는 예수님을 먹고 하느님을 마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신 이후에 땅에 남겨진 제자들과 우리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받았던 하느님의 소명을 받았습니다. 삶과 가르침을 통하여 함께 하신 예수님의 일을 이제 그의 제자들인 우리가 계속하면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에게 기쁜 소식을 전할 때, 하늘에 오르사 하느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은 하늘과 같이 여전히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의 길을 따라 살려 하는 우리와 함께 일하십니다.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하란으로 갈 때에 베델에서 돌베개 베고 잠자다가 꿈속에서 하느님을 보고 하느님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13 나는 주, 너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을 보살펴 준 하느님이요, 너의 아버지 이삭을 보살펴 준 하느님이다. 네가 지금 누워 있는 이 땅을, 내가 너와 너의 자손에게 주겠다. 14 너의 자손이 땅의 티끌처럼 많아질 것이며, 동서남북 사방으로 퍼질 것이다. 이 땅 위의 모든 백성이 너와 너의 자손 덕에 복을 받게 될 것이다.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며, 내가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 오겠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내가 너를 떠나지 않겠다.” 그 약속은 땅과 후손에 대한 약속이면서, 더불어 이 땅 위의 모든 백성이 너와 너의 자손을 통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야곱이 하느님을 보게 된 과정을 상징적으로 “야곱의 사다리”라고 합니다. 땅에서부터 하늘에 이르기까지 사다리가 있고,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습니다. 야곱의 사다리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공간, 하느님과 사람을 통하게 하는 과정을 말합니다.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모양, 사람이 하느님을 만나는 체험, 무지에서 깨달음으로 가는 과정을 야곱의 사다리로 상징합니다.
가끔씩 프로젝터나 핀 조명을 쏘듯이 구름 사이로 빛이 한 곳으로 쏟아지는 것을 봅니다. 이것을 틴들현상[Tyndall phenomenon]이라고 하는데, 빛의 파장과 같은 정도 또는 그것보다 더 큰 미립자가 분산되어 있을 때 빛을 조사하면 광선이 통로에 떠 있는 미립자에 의해 산란되기 때문에 옆 방향에서 보면 광선의 통로가 밝게 나타나는 현상을 말합니다. 이러한 현상을 야곱의 사다리, 빛의 장막, 빛 내림이라고 합니다. 페딜란투스라는 다육식물이 있는데, 마디마다 지그재그로 올라가는 모양 때문에 “야곱의 사다리, 천국의 계단”이라고 합니다. 또한 정반대의 이미지로 “악마의 등뼈”라고 합니다. 신비한 체험을 어떻게 이해하고 적용하느냐에 따라서 야곱의 사다리가 될 수도 있고, 악마의 등뼈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절망 상태에 있던 야곱이 꿈에 나타난 사다리를 통하여 희망의 상태로 변화되어 새로운 삶을 살 게 됩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의 현실 속에서 야곱의 사다리를 통하여 하늘에 오르는 일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사람이 하느님을 만난 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야곱이 잠에서 깨어서 그곳을 ‘하느님의 집’[베델]이고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만난 경험을 한 곳을 거룩한 곳[성소]이라고 하면서 그 장소를 신성시합니다. 히브리 성서에서 베델뿐 아니라 세겜, 브엘세바, 단과 실로 등은 조상들이 하느님을 체험한 성소였습니다. 높은 산의 꼭대기 가까이에 있는 바위 사이에 있는 좁은 통로를 통천문이라고 하는데, 그 문을 지나서 오르는 산꼭대기는 하느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기 쉬운 곳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야곱이 하느님을 만난 곳을 베델이라고 하기 전에 그곳의 지명은 루스였습니다. 루스의 뜻은 ‘편도나무’입니다. 편도나무는 히브리어로 ‘솨케드’인데, 성서에서 ‘살구나무’(창 30:37)라고 번역되기도 하였고, ‘감복숭아나무’(렘 1:11)로 번역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싹이난 아론의 지팡이에서 ‘감복숭아 열매’(민 17:8)가 맺기도 하였습니다. 편도나무는 아몬드 열매를 맺는데, 아몬드의 원산지는 인도 북부에서 서쪽으로 시리아, 이스라엘, 터키이고, 야생종 아몬드는 고대 레바논과 시리아에서 자랐고, 잎이 나기도 전에 분홍색(혹은 순백색) 꽃이 피기 때문에 과수들 가운데서 가장 먼저 꽃을 피웁니다. 편도나무는 팔레스타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였습니다.
야곱이 하느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게 됨으로써 루스를 베델이라고 바꾸어 불렀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 어디에나 흔히 볼 수 있는 편도나무처럼 어느 곳이든지 하느님의 집이 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더불어서 하느님의 약속 중에는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주겠다”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은 어디든지 계시는 무소부재(無所不在)의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승천으로 존재양식의 평화를 통해서 어디든지 그의 제자들과 함께 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이는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시고, 따라서 사람들은 어디서나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임 당함으로써 영광을 받고, 승천하여 하느님 우편에 계시다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지금 예수님의 길과 뜻을 따라 사는 우리를 떠나서 멀리 계시다는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은 죽음과 부활과 승천으로 그의 존재양식을 유한에서 무한으로 변화시켰고, 시간적 공간적 제약을 넘어서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함께 일을 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야곱이 루스[편도나무]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체험을 함으로써 그곳을 베델[하느님의 집, 하늘에 오르는 문]으로 생각하였듯이 우리는 언제나 어디에서나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따를 때에 하느님을 만날 수 있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야곱은 이렇게 서원하였습니다. “20 하느님께서 저와 함께 계시고, 제가 가는 이 길에서 저를 지켜 주시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고, 21 제가 안전하게 저의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해주시면, 주님이 저의 하느님이 되실 것이며, 22 제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느님의 집이 될 것이며, 하느님께서 저에게 주신 모든 것에서 열의 하나를 하느님께 드리겠습니다.” 땅과 후손에 대한 약속과 더불어 이 땅 위의 모든 백성이 너와 너의 자손을 통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야곱은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하느님의 집을 만들고 십일조를 바치겠다고 다짐합니다.
하느님의 집과 십일조는 하느님과 관련된 것이지만, 다분히 공동체적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집은 이스라엘 공동체를 온전하게 하느님 앞에 세우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나 질병으로 인하여 공동체에서 떨어진 사람들을 회복시켜서 다시 공동체로 돌아가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십일조를 진실하게 드리는 것은 하느님의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정신을 행하는 것이며, 하느님의 백성인 약한 사람들과 소유를 나누어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는 신앙의 표현임과 동시에 자기의 소유를 약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행동입니다.
예수님과 하느님이 하나이듯이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이 진리로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오늘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를 성서에서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으로 비유합니다. 교회를 유기체인 몸에 비유한 것은 그 공동체의 온전성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각 지체들이 몸의 마디이면서 동시에 또 다른 몸입니다. 따라서 몸의 어느 한 마디가 병들었으면 몸 전체가 함께 아파하고 치유하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에 유기적인 몸의 온전성은 중요합니다.
교회를 유기체인 몸에 비유한 또 다른 의미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기 위함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믿음과 지식을 통일하고, 성숙해져서, 그리스도의 충만한 상태에 이르러서 그리스도의 몸을 완성하기 위함입니다.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면서 자라나서,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 자체를 건설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완성하기 위해 모인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건설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건설하는 사람들입니다.
야곱의 꿈과 예수님의 승천에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하느님과 예수님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고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나의 삶의 순간순간에도 하느님이 함께 하시고, 우리의 활동 속에서 예수님이 함께 일하십니다. 이를 믿고 진리로 하나 되어 더욱 힘 있게 맡겨주신 사명을 잘 감당합시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날마다 살고 있는 이곳, 항상 내가 머무르는 곳이기에 소중하거나 귀한 것 같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나의 집, 단지 경제적 수입을 위한 곳으로만 생각할 수 있는 나의 일터, 또는 매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거룩하게 여겨지지 않았던 예배실, 날마다 걸어 다니던 길 등 우리의 일상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거나 정기적으로 다니는 곳에서도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내가 하느님을 만나고 경험한 그곳이 바로 ‘베델’[하느님의 집]입니다. 내가 존재하는 모든 곳을 하느님의 집으로 만들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