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25:1-9, 요5:19-29, 고후4:7-18
오늘은 부활절 넷째 주일인데, 특히 어버이주일이며 5.18 광주민주화(光州民主化)운동주일이기도 합니다. 두 주일은 성격상 기쁨과 감사라는 정서와 슬픔과 위로라는 정서가 담겨 있기에, 서로 다른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부활 신앙이라는 시각 아래에서는 함께 만날 수 있는 메시지가 담겨 있어서 괜찮다고 봅니다.
오늘 우리는 세 본문 말씀을 통하여,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께서 그를 의지하는 그의 백성들에게 얼마나 자비와 은혜를 베푸시는 지를 깊이 만나게 될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비록 죄 값으로 복역의 멍에를 매고 살던 그의 연약한 백성들을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지켜내기 위하여 어떤 하나님으로 이 역사에서 일하셨던 분인지를 생생히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오직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그의 놀라운 기사(奇事)의 손길로 그의 백성과 이 세상 역사를 다스리고 계신 분임을 통하여, 그는 본래 죽은 자도 살리고 일으키시는 부활의 주요 심판의 주이심을 확인하게 해 줍니다.
복음서를 통해서는, 어버이 주일에 적합한 성부와 성자이신 두 분의 뜨거운 사랑을 확인하면서, 그로 인하여 이 세상 만민에게 베풀어지는 은혜와 축복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전합니다. 그 중 아들은 아버지께로부터 부활권과 심판권의 전권을 부여 받으신 이래, 그는 원칙을 세우셔서 당신의 구원을 이 세상에 베푸시되, 그러나 구원과 심판의 폭을 대폭 세상 일반도 충분히 접근할 수 있도록 새롭게 해 주셨음을 봅니다.
매우 특별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세상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기존의 신.불신에 따른 전통적(傳統的)인 구원론을 넘어서서, 그 삶과 행위를 놓고도 의와 성실로 선하게 살다간 자들에게도 하나님께서 어떤 은혜를 특별하게 베푸셨는 지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즉 그의 품이 얼마나 넓고 크신 지, 그리고 얼마나 무한히 의지할 수 있는 품인지를 엿보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진정 만유의 주이심을 고백하게 하셨음을 체득하게 해 줍니다.
서신서의 사도 바울을 통해서는, 질그릇같이 연약한 인생들, 특히 힘없고 짓밟혀 살던 자들, 자신의 몸에 예수의 죽으심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수난자들에게 부활의 주님이 어떻게 동행하게 하시는지를 보여주십니다. 기본은 교회와 복음의 주이신 성령께서 그를 섬기고 따르는 하늘 백성들에게 부활의 능력을 입혀주시는 것이지만, 그러나 겸손한 존재로서의 모든 인간은 자신의 연약한 실존의 한계를 넘어서, 영원한 가치와 생명에 다다를 수 있는 길도 마련되어 있음을 함께 보여준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먼저, 구약 이사야서의 내용은 구속 받은 백성들이 탄성(歎聲)하는 감사 시(詩)입니다.
두 가지 차원에서 나온 감사였습니다.
하나는 당시의 세계 최대의 패권국가인 견고한 성읍이요 외인의 궁성이었던 바벨론 제국을 말하는 데, 그 엄청난 강자를 대항마로서 바사(페르시아) 제국을 내세우셔서, 한순간에 꺾어 굴복시키신 하나님의 놀랍고 은혜로운 손길 때문에, 탄성하였습니다(2-5절 참조). 여기에서 그들의 하나님은 불의하고 오만한 세력에 침묵하시는 주가 아니라, 심판하고 응징하시는 역사의 주이심을 보여 주셨음에 탄성한 것이다.
또 하나는 시인의 이 증언 속에서 나옵니다. 제국의 멸망으로 흩어진 백성이 목자의 손에 인도를 받아, 무사히 환국하게 됨을 보면서 나온 탄성이었습니다. ‘주님은 빈궁한 자와 환란 당하는 가난한 자의 요새(要塞)가 되셨고, 폭풍 중의 피난처(避難處)가 되셨으며, 폭양을 피하는 그늘이 되셨다’(4절).
그것은 때가 이르자, 위로의 주님은 그 동안 당했던 그들 백성들을 다 일으키시고 그들의 눈에서 슬픔과 불신으로 끼어 있던 눈물들을 씻어주시고, 가장 영화롭고 좋은 곳으로 초대하셔서 더 이상 수치스러운 백성이 아니라 승리한 백성이 되었음을 확인하도록 원수들 앞에서 기쁨과 즐거움의 잔치를 베풀어 주시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증언이 중요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이 때에 자기들이 믿는 여호와께서 죽은 자를 다시 일으키시는 부활과 생명의 주이심을 새롭게 보기 시작하고, 믿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그것도 집단적 부활이 가능함을 확인한 것입니다. 이 점은 지난 부활주일에 욥이19장에서 고백했던 개인적 차원의 부활관을 새롭게 보완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 때부터, 이스라엘은 모든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다시 오실 메시아는 자기들을 구원하고 회복시킬 부활의 주이리라는 오랜 믿음을 소유한 백성으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그게 이스라엘 백성의 희망이요 신앙의 근간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까지도 부활신앙을 보유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런 그들의 그런 부활신앙은 드디어 성취되었습니다. 신앙 자체로만 보유한 것이 아니라, 부활의 주체요 실체를 확인하게 된 때가 왔습니다. 그게 어떻게 성취된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들의 오랜 부활신앙이 구체적으로 성취되어 나타났습니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본체가 이 세상 무대를 친히 찾으신 것입니다. 오늘 요한복음에서 우리는 그 내용을 접하게 됩니다.
여기에서는 세 가지 차원을 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이 부활을 통한 죄인들과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거룩한 아버지와 존귀하신 아들, 두 분의 상호가의 사랑과 협력-, 두 분의 쌍끌이 구원 사역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밝히십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는 자일 뿐이다’(19절). 여러분, 이 얼마나 놀라운 증언입니까? 예수 자신만의 존재와 무게만으로도 모든 것이 가능하실 터인데-, 놀랍게도 당신의 모든 것이 스스로의 것이 아니라,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에게서 나온 것임을 밝히신 것입니다. 소위 예수는 그의 하늘 아버지의 ‘카피(copy-복사판) 인생’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점이 어떻게 보이십니까? 놀랍지요! 왜 그랬을까요? 아들은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완벽하심을 보면서, ‘아들로서 아버지의 그 내용 자체를 그대로 전해도 다 되겠다’고 확신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것을 일체 드러내지 않으시고, 전적으로 아버지의 마음, 말씀, 능력, 뜻을 드러내시는 일에만 매진해 오신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우리 설교자(증언자)들의 자세에도 큰 도전이 됩니다!)
둘째는 그런 아들의 당신에 대한 효도, 즉 전적인 신뢰와 복종을 받고 계신 아버지의 대응이 아들에게 전달되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그 아들을 100%믿고, 당신이 가지신 모든 전체(全體=ALL)와 전권(全權)을 아들에게 넘겨주시는, 혁명적 결단을 하신 것입니다(20-23절). 의뢰(依賴)를 해주신 것이지요! 무엇을 넘겨주셨습니까?
두 가지였음을 밝히셨습니다. 하나는 죽은 자를 다시 일으키시고 살리시는 부활권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세상 모든 생명을 심판하는 심판권입니다. 양 날개를 쥐신 메시아가 되신 것입니다! 모든 생명과 만유의 살리고 죽일 수 있는 주님이 되신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예수 그리스도를 ‘만유(萬有)의 주’로 칭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만유의 주로 취임하신 예수님은 부활과 심판의 공정한 집행을 위하여, 분명한 지침을 온 세상에 다음과 같이 선포하셨습니다. 우리가 절대로 기억하고 믿어야만 될 생명의 지침이기에, 모두들 깊이 경청하시기 바랍니다.
1) 부활과 영생을 얻는 지침의 말씀은 24절에 올라 있습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에 이르느니라’. 핵심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일입니다. 그의 말씀안에는 생명을 생명되게 살려내는 능력이 부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신을 보내신 이, 즉 하늘 아버지를 믿어야 합니다. 그 믿음 없이는 안 됩니다.
2) 심판과 사망을 받게 되는 지침입니다. 무엇입니까? 24절의 반대 입장을 고집하는 경우들이겠지요! 듣기를 거부하고 교만을 부리는 일은 심판의 절대 조건입니다.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을 믿지 않고, 세상과 자기를 더 의지하고 사는 자들입니다. 이들에게는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부활과 심판에 관련된 내용에는, 매우 특별한 예외(例外)조항도 함께 선포되어 있음을 주목합시다. 바로 앞서 간 이들에 대한 심판의 문제입니다. 예수를 전혀 알지도 못하고, 접하지도 못하고, 가신 분들에 대한 문제입니다. 게다가 기독교의 구원관에는 전혀 접하지 못하였으나, 그러나 삶이 매우 의롭고 정의로우며 선하고 공동체와 이웃을 위하여 살다가 가신 분들에 대한 구원과 심판의 문제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것인 29절에 올라왔습니다. 함께 읽어봅시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무슨 내용이며, 특징이 무엇입니까? 예수와 복음을 접할 수 없이 살다가 가신 분들에 대한 구원의 가능성을 활짝 열어놓으신 말씀입니다! 얼마나 놀랍고 새롭습니까? 여기에서의 구원의 지침은 믿음이나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행위와 그 의와 선을 추구하며 산 삶의 내용과 가치가 부활 후 심판 날에 기준이 될 것임을 선포하셨습니다.
이런 부활과 심판의 선포는 역사 속에서, 저 4.3사건이나 4.16세월호 참사에서나, 4.19나 금주에 맞이할 5.18등의 항쟁이나 폭압에 의하여, 그야말로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던 수많은 ‘아벨의 피’에 참여한 분들의 부활과 구원에 큰 빛이 될 것입니다! 특히 이 부분은 주의 부활과 심판의 공의성을 보여주신 것이어서, 진짜 복음이 됩니다!!
그 분의 몸인 교회 공동체와 그의 백성들은 모두 예수의 십자가의 멍에를 항상 매고 사는 그룹입니다. 실로 질그릇 집단입니다. 그 바람에 무진 고통과 오해와 박해와 따돌림과 불이익과 핍박이나 박해를 온 몸으로 당하며 지내온 집단입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일이지만, 교회는 바로 그 환란과 박해 속에서 성장하고 번성한 것입니다. 잘되고 번영할 때가 아니라 환란 속에 견딜 때, 더욱 부흥을 해왔습니다. 그것은 왜 그럴까요? 바로 다시 일으키시는 부활의 영이 그런 자들과 함께 역사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그 모습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우리는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기 때문이다’(8-10절).
그 바람에, 이런 부활의 영성을 짊어진 곳에는 죽은 자가 살아나고 낙심한 자들이 용기를 찾으며 헤매는 자들이 길을 찾아오는 기이한 일들이 잇달아 발생합니다. 교회와 신도들은 바로 이점을 주목하면서, 안일과 나태를 거부하고 십자가의 죽으심을 항상 짊어지고 사는 삶을 선택하여야 합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과 그의 몸된 교회와 이웃과 세상과 내 자신 모드를 살리는 지름길이 됩니다.
내 존재와 실존을 직시합시다. 질그룻 인생입니다. 내 운명은 불안하기 그지없음을 말합니다. 하지만 희망(希望)은 확실히 보입니다. 질그릇에 세상 것이나 순간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채우고, 구원의 말씀을 채우며, 영생의 가치인 성령을 충만히 채우고 살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가 붙들고 의지하여 살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바울의 마지막 증언을 함께 읽으며, 우리의 다짐을 확인합시다(16-18절).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란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거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은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