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왕상 3:5-14; 골 3:1-11; 요 4:31-38
오늘은 참 특별한 날입니다. 부활절 셋째 주일인데 어린이날이기도 합니다. 또한 한기장의 총회교육원의 주관으로 본 교단에 속한 모든 교회가 “총회교육주일”로 지키는 날이기도 합니다. 이제 바야흐로 봄 기운이 무르익어 꽃이 피고 온 천지에 푸르른 물결이 넘실대며 생명의 기운이 약동합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부활의 계절에 생명의 에너지가 가장 넘치고 활발하게 살아 꿈틀거리는 어린이들의 날을 거룩한 주일 날에 예배를 함께 드리면서 기념하게 된 것은 특별히 감사한 느낌을 줍니다. 주일에 어린이날이 겹쳤기에 어린이를 둔 많은 가정들이 산으로 들로 나아갔습니다. 유원지로 놀이터로 어린이대공원으로 서울대공원으로 나아가 즐거운 휴일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어린이날이 일요일과 겹쳤으니 월요일도 연휴로 제공되었습니다. 이처럼 모두가 즐거워하는 날이니 물론 하나님께서도 즐겁고 기뻐하시겠지요. 다시 한번 생명이 약동하는 즐거운 부활의 계절에 어린이날이 찾아온 것을 경하하며 축하합니다.
어린이날은 “어린이의 인격을 존중하고 행복을 도모하기 위한 기념일”입니다. 어린이날이 지나면 이번 주간에 5월 8일 어버이날이 다가 옵니다. 다음 주일에는 어버이의 은혜를 기리며 어버이주일 예배를 드릴 것입니다. 이처럼 부모와 자녀가 함께 어우러져서 5월 한 달을 “가정의 달”로 구별하여 지킵니다. 한 달 내내 가정의 소중함을 되새기며 하나님께서 가정에 대해서 가르쳐 주신 교훈을 되새기면 생활하도록 5월 달을 구별하였습니다. 가정의 달이 매년 우리 교회의 빛나는 절기인 부활절과 겹쳐서 지낼 수 있다는 점은 또한 큰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린이날은 방정환 선생께서 제창하신 날입니다. 방정환 선생은 천도교의 손병희 선생의 사위였습니다. 동학도를 창제한 최제우선생님과 그 제자 해월 최시형선생님의 가르침을 따라 방정환선생님도 모든 생명의 존귀함을 설파하는 가운데 특히 어린이의 인권 신장을 위해서 일생 애쓰신 분입니다. 동학의 생명존중 사상은 성경이 힘주어 강조하는 생명사상과 맥을 같이 하는 귀한 사상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이들을 귀하게 여기셔서 하나님나라의 주인은 어린이들이라고 설파하셨습니다. 연약한 어린이를 차별하지 말고 존중할 것을 여러 차례 힘주어 가르치셨습니다.
소파 방정환 선생님도 1919년 기미년 삼일 만세 사건을 겪은 이후에 천도교소년회를 창설하여 조선에서 천대받던 어린이들의 생명이 소중하고 존귀함을 일깨우기 위해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선포하였습니다. 교회도 저마다 어린이교회학교를 창설하고 어린이를 잘 보살피고 가르치는 일에 발을 벗고 나섰습니다. 아이들이 사회에서 보호를 받지 못하고 천대받는 현실에 아파하면서 아이들을 인격적으로 대우하고 아동노동과 아동학대를 중지할 것을 요구였습니다. 여기에 어린이날을 제정한 의미가 있습니다. “어린이”라는 용어는 방정환이 1921년에 처음으로 사용하였는데 이전에는 '애놈' ‘애새끼’ 등으로 아이들을 천시하여 불렀다고 합니다. 어린이날은 해방 후 1946년에 5월 5일로 지정하여 1970년에는 공휴일로 선포하였습니다.
교회의 주일학교는 방방곡곡의 교회들마다 한글교육과 민족계몽운동을 펼쳤습니다. 어린이들을 보살피고 교육하는 일은 교회교육의 중심과제가 되었습니다. 우리교단도 5월 첫 주일을 구별하여 교회교육주일로 선포하였습니다. 오늘 특별히 헌금한 것을 총회교육원 앞으로 보낼 것입니다. 올해도 온 교회의 교우들이 바쳐드린 정성 어린 헌금이 많이 모여 우리교단의 교회교육에 근 기여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린이날을 구별하여 지키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요? 총회도 교육주일도 구별하여 교회학교교육을 특별히 강조하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과거에 어린이들을 천대하고 아동노동을 일삼았으며 어른들이 어린이들을 납치하여 팔아먹는 등 많은 학대와 범죄를 자행해 왔기 때문입니다.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어린이들도 부지기수였습니다. 세상이 너무나 험하고 살기에 힘겨웠기에 모두가 가슴에 상처투성이로 살아왔습니다. 세상의 폭력에서 상처받고 비뚤어진 심령으로 가정폭력을 휘두르며 아내와 자녀를 괴롭히는 사례들은 오늘에도 개선되지 않고 여전합니다. 자식을 살해하거나 영아를 유기하는 부모들의 범죄 소식은 최근에까지도 뉴스로 올라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지구촌 전역에 아동학대는 편만하게 자행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이 제멋대로 살아가는 사회를 요한복음서는 “코스모스”라고 부릅니다. 우리말 성경은 이 단어를 “세상”이라고 번역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자기 욕심에 따라서 살아갑니다. 이들은 창조주 하나님의 뜻과는 멀리 동떨어진 삶을 삽니다. 이처럼 세상은 죄 속에 잠겨 있습니다. 살인죄를 지은 가인의 후예 라멕도 가슴의 상처로 인하여 폭력을 휘두르다가 아이를 죽였습니다(창4:23). 죄인들은 서로 상처를 입히며 불행하게 살아갑니다(창4:24). 죄인들의 욕망이 충돌하여 서로 갈등하며 다투는 가운데 모두가 폭력을 휘두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창6:11).
오늘 봉독한 구약성경 본문은 솔로몬 이야기입니다. 솔로몬이 다윗을 계승하여 왕으로 등극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감사하여 기브온 산당에서 일천 마리의 번제물을 바쳤습니다(4절).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갸륵하게 여기시어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주겠다고 언약하셨다(5절). 이에 솔로몬은 금이나 은 같은 부귀나 권력이나 정복전쟁의 승리를 구하지 않았다. 오직 백성을 어질게 잘 다스릴 수 있도록 “듣는 마음”을 달라고 간구하였다(9절). 솔로몬은 자신을 가리켜 겸손하게 “작은 아이”라고 낮추어 표현했습니다(7절). 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겸허한 통치자의 모습은 일찍이 모세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세상에서 어느 누구보다도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사람이었다고 민수기 12:3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나브, עָנָו).
예수님께서 어린이들을 가슴에 안고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 가르치실 때 어린이처럼 자기를 낮추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설파하셨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연약하고 힘이 없고 어른들의 보호가 없이는 살지 못합니다. 어린이들처럼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함이 없이는 잠시도 살 수 없는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는 치열한 열심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어린이와 동일시하면서 겸손하게 허리를 숙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적합하다는 진리를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입니다.
솔로몬은 왕이 되었으면서도 자신을 가장 낮고 연약한 어린이에 비유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듣는 마음”을 구했는데 한글개역 옛 성경은 “지혜로운 마음”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의 원문은לֵב שֹׁמֵעַ <레브 쇼메아>라고 되어 있는데 직역하면 “듣는 마음”입니다. 칠십인역도 이와 동일하게 καρδίαν ἀκούειν(카르디안 아쿠에인)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라틴어 성경인 불가타 성경은 cor docile라고 옮겼는데 “남을 이해하는 마음”이란 뜻입니다. 영어 성경들에는 an understanding mind라고 번역합니다. 왕이 되어서 백성의 말을 귀담아 잘 듣고 그들의 형편과 사정을 바르게 이해하려는 마음이 생겼던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지 않으면 생길 수 없는 마음입니다.
솔로몬은 사사로운 이익이나 권력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을 잘 섬기려는 공인의 마음을 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겸손한 솔로몬에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시겠다고 복을 주셨습니다(12절 לֵב חָכָם וְנָבוֹן). 어린이날 총회교육주일에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이야기를 묵상하도록 인도하시는 것은 우리 모두가 어린이처럼 겸손하게 서로 섬길 수 있도록 서로의 아픔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듣는 마음”과 “지혜로운 마음”과 “지혜와 총명”을 구하여 받으시기 바랍니다.
선악과를 먹은 사람은 이기적인 존재가 됩니다.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은 자기에게 유리한 것이 무엇인지 자기에게 불리한 것이 무엇인지 재빨리 알아채는 능력이 계발된다는 뜻입니다. 자기에게 좋은 것을 선하다고 하고, 자기에게 불리한 것을 악이라고 규정합니다. 선악의 판단 기준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시 자신에게로 이동하게 됩니다. 이로써 사람에게 이기심이 팽배하게 부풀려지고 자기중심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자기를 절대화하여 자기의 욕망을 충족하려고 살아가게 됩니다. 즉 죄에 빠진 인간은 사사로운 삶을 추구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자기중심으로 살다가 보니 남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를 제일로 내세우다 보니 교만한 인물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니 모든 생명을 살리시는 분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은 공공성으로 모든 피조물을 살리시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만유이시며 만유 안에 계신다”고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예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생명이시기에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사람은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살아 가게 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을 따라 창조하셨습니다. 사람도 하나님처럼 모든 타자를 살리며 섬기는 생명의 일꾼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생명의 일꾼으로 회복된 사람을 가리켜서 바울 사도는 새 사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새 사람은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사람이기에(창1:28), 그는 공공의 복리를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가리켜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주인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처럼 공공의 새 사람이 모인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옛사람은 무엇입니까? 선악과를 먹고 죄에 빠져서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며 이기적으로 살면서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이 옛사람입니다. 옛사람은 죽음의 늪에 빠져서 영영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얼마 전에 인기리에 방영된 “스카이” SKY라는 드라마가 이기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관계 속에서 괴로워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새사람이 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유와 행복을 누립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개방된 기회이며 아무런 차별이 없다고 바울은 외치고 있습니다.
자기중심주의는 이기주의로 발전합니다. 이기주의는 개인주의로 드러납니다. 개인주의가 더 확대되면 가족주의가 됩니다. 자신의 가족을 하나님 보다 앞세우고 드높이면 우상숭배가 됩니다. 가족제일주의를 가족주의라고 부릅니다. 가족주의에서 문벌과 족벌이 나옵니다. 자기의 자녀를 남의 자녀와 구별하여 드높이는 마음은 교만한 마음입니다. 자식을 하나님 보다 드높인다 보면 우상숭배의 사사로움에 빠지게 됩니다. 가족주의는 공공성을 상실하고 가족이라는 사사로움에 빠지고 마는데 마침내 폭력의 관계망에 걸려들어 불행해집니다. 자식의 출세를 위해서, 가족의 명운을 자식의 사회적 진출에 두고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들이 “스카이”라는 드라마에서 잘 연출되고 있습니다.
어린이날은 자기 자식만을 드높이는 날이 아닙니다. 어린이라는 보편적 약자를 돌보아야 한다는 공공의 마음을 불러 일으키는 날입니다. 교회교육도 어린이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는 일꾼으로 변화시키고 성장시키는 교육과정을 어린이들에게 제공합니다. 어린이날에 흥청망청 노는 데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힘겨운 가정의 어린이들을 돌아보도록 자기 자녀들과 함께 심방해 보는 활동이 제격입니다. 소년소녀 가장이 있다면 찾아가서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는 활동, 불치병으로 병원에서 투병하는 어린이가 있다면 병문안을 가는 활동, 지구촌 저편에서 오늘도 굶고 영양실조에 걸려 피골이 상접한 아이들의 영상을 함께 보면서 구호헌금을 아빠 엄마의 손을 잡고 보내보는 활동, 등등 생명을 살리는 정신을 일깨우는 날이 어린이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평생 동안 생명을 살리는 활동을 펼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동네에 가셨을 때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났습니다. 요한복음서 4장에 그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일행은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먹을 것을 구하러 동네에 들어간 사이에(요4:8) 예수님은 우물가에서 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물을 한 잔 달라고 청하였습니다(7절).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원히 목 마르지 않는 영생수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증언하셨고, 그 여인은 사마리아 동네의 사람들을 우르르 데리고 예수께로 나아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자들이 양식을 구해 가지고 돌아와서 예수님께 잡수실 것을 권하였습니다(32절). 예수님께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영원한 생명수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고 이어서 영원히 배고프지 않는 빵에 대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양식”(ἐγὼ βρῶσιν ἔχω φαγεῖν ἣν ὑμεῖς οὐκ οἴδατε.)이 있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마리아에서 먹을 양식도 떨어지고 배가 고픈 상황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라고 뜬금 없이 말씀하신 것은 바로 우리 죄를 위하여 고난 당하실 예수님 자신의 육신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자칫 오해할 수도 있었겠습니다. 양식을 제자들 몰래 어디에다가 감추어둔 줄로 오해할 수도 있었겠습니다. 아니면 어떤 다른 후원자가 예수님께 먹을 양식을 갖다 준 줄로 생각했을 수도 있었겠습니다. 성령을 받아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이 되지 않으면 예수님의 영생에 대한 말씀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마리아에서 예수께서 가르치신 말씀의 요지는 “영원한 생명”에 관한 깨달음이었습니다. 예수 자신이 마시면 영원토록 목 마르지 않는 생명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먹으면 영원토록 배고프지 않는 생명의 떡이십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에 들렀을 때 생명수와 영생 떡에 관한 가르침을 더욱 선명하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교회가 지금 예수를 기억하여 거행하는 성만찬 예전을 가리켜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 먹을 양식이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을 기리는 이 가정의 달에 우리는 자신의 가족들에 대한 애정을 더욱 깊은 신앙의 힘으로 성찰해 보는 묵상의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하겠습니다. 오늘 선포하는 주의 말씀을 청종하여 묵상할 주제들을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첫째 솔로몬처럼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가족으로 성장하기를 원합니다. 둘째 내 자식 내 부모만 제일로 여기는 가족주의에 빠지지 말고 주변의 소외된 이웃들 결손 가정들 소년소녀 가장들까지도 내 가족으로 여기는 보편적 사랑의 믿는 가정이 되도록 힘써 기도합니다. 셋째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가정이 되어서 영원토록 목마르지 않고 영원토록 배고파지지 않는 생명수와 생명 떡을 먹고 마시는 말씀의 공동체로서의 가정이 되도록 힘써 가꾸어 봅시다.
여호와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에 무소부재하시며 전지전능하십니다. 가장 크신 동시에 가장 작은 분이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깨달으며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경건하게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자녀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가정을 꾸리십니다. 하나님의 택한 자녀들이 모인 거룩한 교회 공동체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 사랑으로 남의 말을 귀를 기울일 줄 아는 겸허한 마음들이 우리교회 안에는 많이 모여 있습니다. SKY 드라마에 나타난 세속주의의 인물들은 우리교회에서 변화를 받아서 점점 옛사람을 버리고 새사람으로 재창조를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창조주 하나님의 예정하신 섭리는 변함없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세상의 죄와 반역에도 불구하고 악한 것을 선한 것으로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께서 마침내 영광을 받으십니다. 전쟁과 투쟁과 가짜 뉴스와 폭력이 넘치는 악한 세상 속에서도 언제나 하나님의 선하심이 승리를 거두십니다. 우리 성도들의 모든 가정이 하나님의 선하신 역사 속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가정으로 성장하여 모두 복된 구원과 성화의 완성에 이르게 되어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기를 진심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