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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4-1) - "예수님과 함께 춤을"/ 김진수 목사 > 사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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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해] 사순절(4-1) - "예수님과 함께 춤을"/ 김진수 목사

longbeach 2018-03-09 (금) 17:40 6년전 2567  

본문) 사 63:1-6 / 롬 8:18-27 / 요 16:25-33

     

저는 춤을 추어본 적이 없습니다. 아내가 어쩌다 함께 춤을 추어보고 싶다고 해도 응하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추는지를 잘 모르니까요. 그런데 사실은 제 아내와 멋지게 한 번 추어보고 싶은 춤이 있습니다. 왈츠라는 춤입니다. 아직 그 춤을 잘 모르는 사람의 행복한 상상입니다만, 제가 생각하는 왈츠는 두 사람이 서로 마주보며 함께 추는 춤입니다. 혼자서는 출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이 우측으로 움직이면 다른 한 사람은 좌측으로 움직여야 하고 한 사람이 앞으로 가면 다른 한 사람은 뒤로 물러서야 합니다. 한 사람이 한 걸음 다가서면 다른 사람은 한 걸음 물러서야 하겠지요. 왈츠는 춤을 이끄는 사람이 있고 또한 이끄는 사람과 호흡을 맞추어 자신을 맡기는 사람이 있어야합니다. 이끄는 사람은 상대방을 잘 알아야 합니다. 상대방이 따라올 수 없을 만큼 무리하게 리드하거나 반대로 답답할 만큼 너무 소극적이어서도 안 되겠지요. 두 사람은 마주보고 서로의 마음을 읽으며 움직이지요. 나를 편안하게 잘 리드해주면 만족한 마음이 얼굴에 나타나게 되고 그를 이끄는 사람은 자신을 믿고 즐겁게 따라오는 상대방의 표정을 보며 또한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이 춤의 절정은 이끄는 사람도 따라가는 사람도 없이 함께 이끌고 함께 따라가며 서로의 구분을 넘어 온전히 하나가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니 조심하십시오! 이 춤에는 낯선 이성을 파트너로 삼을 경우 자칫 불행한 인연으로 발전할 치명적인 독이 숨겨져 있으니까요! 그러나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낭만적인 음악이 흐르는 곳에서 부부가 그렇게 서로 호흡을 맞추어 함께 춤을 춘다면 하루 종일 지치고 고달픈 삶이 새로운 기쁨과 감격으로 넘치게 되지 않을까요? 

     

주님과 함께 걷기(사 63:1-6)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환난의 광야를 건너고 고난의 어둔 밤을 통과합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그의 자녀들에게도 고난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고난은 우리의 삶 자체입니다. 왜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고난의 밤을 통과하게 하실까요? 고난은 하나님과 함께 걷는 훈련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고난은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고난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하신 선하신 하나님의 의도된 계획입니다. 유다 백성이 범죄하여 이스라엘의 대적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갑니다. 왜 하나님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불의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을 잡혀가게 하십니까? 악한 자들의 수중에서 그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연단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며 주의 말씀을 망각하고 살던 그의 백성을 고난을 통해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와 그와 함께, 그의 말씀을 따라 살도록 연단하시고 훈련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의 고난은 잠정적이며 일시적입니다. 때가 되어 그 백성들을 향한 뜻이 이루어지면 그들을 구원해 내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무참히 짓밟은 악한 자들은 에돔(하나님을 대적하는 대표적인 나라)에서 포도즙 틀을 밟듯이 심판하실 것입니다.(사63:1-6)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을 주시기 위한 한 과정입니다.(롬8:18) 고난 없이 거룩해지지 않습니다. 

춤은 함께 걷는 일부터 시작됩니다. 함께 걷는 것(스텝 밟기)이 춤의 기본입니다. 함께 보조를 맞추고 호흡을 맞추어 걸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멋대로 가고 싶은 곳으로 가면 함께 춤을 출 수 없습니다. 군대에 가도 제식훈련을 제일먼저 받지 않습니까?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오와 열을 맞추고 앞뒤로, 좌우로 가고, 뛰기도 하며 구령에 맞추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훈련을 해야 전쟁에 나가 싸울 수 있습니다. 지휘관과 호흡을 맞추지 않고 제 멋대로 하는 병사는 계속해서 엄격한 기합을 받습니다. 언제까지요? 지휘관의 명령에 신속하게 반응하여 그 구령에 따라 지휘관의 뜻과 완전히 하나가 될 때까지요! 고난은 하나님과 함께 기쁨과 감격으로 춤을 추는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주님과 “함께 걷기훈련” 과정입니다. 이 과정을 거쳐야 하나님과 스텝을 맞출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이 훈련과정을 거쳤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조금 천천히 걷기를 원했지만 아브라함은 너무 급해서 빨리 서둘다 스텝이 엉켜버렸습니다. 그래서 난 아들이 ‘이스마엘’입니다. 이스마엘 때문에 온 집안에 큰 혼돈의 바람이 일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시선을 이삭을 통해 장차 오실 분, 그분에게 두고 그분을 소망하기를 원하셨지만 아브라함의 시선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목전의 ‘이삭’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다만 이삭에게로 끌리는 “내 아들”을 향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의 큰 꿈을 함께 바라보도록 육신의 아들을 포기해야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주님의 뒤를 따라가기(롬 8:18-27)

     

보다 더 아름답고 성숙한 고난이 있습니다. 싸우는 고난, 자취하는 고난, 장래의 영광된 미래를 위해 스스로 자원하여 현재의 고난의 짐을 지는 것입니다.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의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롬8:23) 우리는 성령의 처음 익은 구원의 열매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몸의 구원” “몸의 속량”(롬8:23절)은 주님의 재림의 날에 성취되고 그동안 우리는 이 썩어질 몸과 더불어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우리의 몸은 아직 죄의 유혹으로부터 자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영광스러운 미래를 위해 육신의 정욕, 세상의 유혹과 싸우며 주님을 따라 한 걸음씩 따라가야 합니다. 해산에 이르기 위해 비명을 지르며 모든 고통을 참아냈던 앞선 어머니들처럼, 우리의 젊은 산모들도 그들의 뒤를 따라 가야합니다. 그러나 그 길은 지난한 고통을 수반하는 길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무거운 바벨을 들어 올리면서 입으로 토해냈던 장미란 선수의 ‘신음’소리처럼 참을 수 없는 고통 속에서 그 고난을 극복하고 그와는 비교할 수 없는 영광에 이르기 위한 탄식을 지르는 것입니다. 

춤을 배우려면 스승으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그가 추는 춤을 따라서 해야 합니다. 그의 손짓, 발짓을 따라 하다가 나중에는 매우 디테일한 기술까지 습득해야 합니다. 좋은 스승을 만나야 좋은 춤을 배웁니다. 어설픈 선생 만나면 기본을 잘 배우지 못해서 발전하지 못합니다. 제자는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뒤만 졸졸 따라가는 일이라고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실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모든 것을 다 포기하지 않으면 따라갈 수 없는 길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미 주님이 앞서 가신 길이기에 그 뒤를 따르는 일은 쉬운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눈 오는 날 앞선 발자국을 한 번 따라 가보세요! 보폭도 다르고 내가 원하는 곳과는 방향도 달라 그것에 일일이 맞추며 걷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나보다 더 큰 보폭에 맞추려 하다보면 땀이 나고 입에서 신음소리가 나옵니다. 마음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한 번 가보고 싶은 충동이 일기도 합니다. 주님의 보폭은 우리보다 훨씬 크고, 그가 걸으신 방향은 우리 몸의 균형을 잡기 어려울 만큼 험하고 요동이 심한 곳이 많기 때문입니다. 바람이 일고 눈보라 치는 길입니다. 솔직히 목양의 길에 들어선 후, 편안한 길을 걸어 본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와는 감히 비교할 수 없으나 항상 거칠고 험한 길을 걸었습니다. 갈등은 그친 적이 없었고 무겁고 어려운 일은 산적했고 오히려 별 일이 없을 때가 더 불안했던 적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새벽기도의 자리는 눈물과 탄식으로 가득한 날이 많았습니다. 아무리 애써도 주님 가신 길을 따르기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목회의 비결은 없었고 뾰족한 묘수는 없었습니다. 그냥 신음하며 엎드려 인내하며 견디다 보면 어느 새 날은 새고 겨울도 지나 잠시 꽃피는 봄이 오기도 했습니다. 주님 오실 그 날 만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그 때까지 아픔을 참으며 견디어내는 것이지요!

     

예수와 함께 춤을(요 16:25-33)

     

그런데요, 세상이 두 쪽 나고 우주가 무너져도 분명한 것 하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 예수님의 언약입니다. 하나님의 약속, 그 자체가 가장 확실한 성취의 보증입니다. 하나님의 약속 말고 그보다 더 신실한 성취에 대한 보증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때가되면 반드시 이루어졌습니다. 약속대로 그의 아들이 오셨고 약속대로 400년 후 애굽의 노예생활로부터, 70년 후 바벨론 포로로부터 해방을 받았습니다. 예수님도 그의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고난을 예고하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요16:16-22)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잠시 제자들을 떠나 아버지 곁으로 가신다는 것을 미리 말씀해 주십니다.(28절) 이것을 제자들에게 미리 말씀해 주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어떤 상황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하심입니다.(33절) 상상할 수 없는 일까지 약속하신대로 다 이루신 분이 또 다른 약속을 한다면 얼마나 신뢰할 만하겠습니까? 이미 약속하신대로 죽음에서 부활하심을 보면 그가 하신 다른 어떤 약속도 이젠 믿고 안심하는 것이지요! 

제 아버지는 가난했지만 약속을 잘 지키시는 분이었습니다. 기숙사에 있으면서 돈 떨어지는 그 날이 아버지께 전화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왜 이런 때만 전화하느냐고 나무라셨지만 아들이 어려운 처지를 구차하게 설명하려하면 감사하게도 말을 끊으시고 얼마 보내면 되냐고 제 가 할 말을 대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리고 항상 구체적으로 언제까지 돈을 보내겠다고 답하시고는 서둘러 전화를 끊으셨습니다. 아버지는 한 번도 그 약속한 날짜를 어겨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게는 아버지의 약속이 곧 현실이 된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돈 보내마! 라는 약속을 듣는 순간부터 이미 그 돈은 내 주머니에 들어있는 것이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약속에 대한 신뢰로 인해 이미 그 돈만큼의 근심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그 돈만큼 어깨는 펴졌습니다. 

춤의 절정은 두 사람이 온전한 하나를 이루는데 있지 않을까요? 춤을 리드하는 사람은 상대를 잘 알고 그에게 가장 맞는 방향으로 편하게 인도하고 상대방은 자신을 리드하는 사람을 신뢰하고 믿으며 그에게 자신을 맡기고 따라가는 것이 아닐까요? 이렇게 두 사람이 하나가 되면 진짜 춤이 나올 것 같습니다. 힘은 드는데 어렵지 않습니다. 숨은 가뿐데 온 몸은 자유롭습니다. 모든 것을 다 맡기니 참 해방을 누립니다. 너와 내가 연합하고 음악과 몸짓이 하나가 되어 춤을 출수록 고단함도, 긴장도, 두려움도 사라지고 기쁨과 자유가 넘칠 것입니다.

자전거를 배우던 일이 생각납니다. 처음에는 자전거와 제 몸이 따로따로였습니다. 날마다 벽에 부딪치고 넘어졌습니다. 자전거는 부서지고 부러졌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제 몸을 자전거에 맡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어느 날 자전거와 제가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제가 가고자 하는 대로 자전거는 따라왔고 자전거가 가는 대로 제 몸은 자전거와 함께 했습니다. 자전거가 몸에 익은 날 저는 저 멀리 신작로를 따라 20리길 밖에 있는 꿈에 그리던 동네까지 마실을 다녀왔습니다.

     

이웃과 함께하는 춤을(롬 8:18-27)

     

마지막 춤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로마서의 본문은 세 가지 탄식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첫째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소망하는 피조물들의 탄식입니다.(롬8:19) 타락한 인간이 구원받아 영광의 자유에 이르게 되어야(21절) 모든 피조물들도 영광의 자리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탄식,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에 이르기 위한 탄식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탄식은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며 우리를 도우시는 성령의 탄식(26)입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의 고난과 탄식은 우리가 다스리는 피조물을 살리는 고난이요 모든 피조물들을 회복시키는 고난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이 온전한 구원에 이르게 될 때 이 자연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도 영광의 자리에 이르게 되는 탄식이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고난을 통해 우리가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을 회복할 때 우리의 통치아래 있던 피조물들이 영광의 자리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회복은 우리만의 회복이 아니라 피조물들의 회복이요 우리를 위해 탄식하시는 성령님께 기쁨과 만족을 드리는 회복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춤은 모든 사람이 함께 추어야 춤입니다. 병사와 늑대가 함께 춤을 추고 어린이와 사자와 독사가 함께 사랑의 춤을 추며 남과 북이 함께 춤을 추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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