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욜 2:12-17, 딤후 2:11-13, 눅 9:51-62
1. 사순절기 세 본문 말씀들의 의미
지난 주 수요일인 성회수요일, 곧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부터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순(四旬)은 넉 사 열흘 순, 곧 40을 말합니다. 이 숫자는 예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40일, 혹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을 받았던 40일을 기준으로 합니다. 부활절 전날까지 주일은 빼고, 40일을 말합니다.
아무튼 사순절 40일은 주님께서 고난과 죽음을 향해 가는 순례의 기간이며, 이 기간 동안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우리 스스로도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영적 죽음을 경험해야 하는 절기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순절기 동안 금식하면서 예수님의 고통과 고뇌, 그리고 동시에 예수님의 그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은 십자가 고난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예수님께서 머리 둘 곳 없어, 외로워하셨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눅 9:58b).”라고 말씀하신 것이 그 이유입니다. 따라서 구약 요엘서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니 오늘 우리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주와 함께 죽기를 작정하고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서신서 말씀인 디모데후서에서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했던 말처럼,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께서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딤후 2:12b)”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복음서에서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는 이들은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사순절 첫째주일을 보내며 머리 둘 곳 없이 외로움에 처해 있는 예수님의 마음을 깨닫고, 또한 뒤도 돌아보지 말고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십자가의 길을 바라보는 것이 참된 예수님의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 사순절기 말씀도 한번 살펴볼까요? 예수님의 이러한 외로운 사명의 참다운 의미는, 죄인 한 사람 혹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구원하기 위한 목자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한 사람의 구원을 위해 우리를 고난으로 부르심이며(사순절 둘째 주일), 이후 사순절 셋째 주일 말씀은 이러한 외로움과 고난을 넘어 마침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귀향, 곧 천국 잔치로 이어집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사순절기에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은 인간뿐만이 아니라, 피조물의 해방도 포함한다는 것입니다(사순절 넷째 주일). 따라서 마지막 사순절 다섯째 주일 말씀은 온 세상 모든 피조물들의 해방을 위해 아사셀 염소가 되신 예수님, 또한 인류의 죄를 속죄하신 대제사장이 되신 분, 그리고 백성과 온 민족을 위해 돌아가신 한 사람으로서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순절기 동안 예수님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 의미를 깨달아 새로운 신앙의 성숙을 경험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2.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오늘 복음서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기로 굳게 결심한 것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 가셔서 말씀대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승천하실 것입니다. 그 승천의 기약이 다 되어가기 때문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향하십니다. 말씀을 볼까요?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그들이 가서 예수를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갔더니,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 하는지라.” (눅 9:51-53)
갈릴리에서 예루살렘 가는 두 가지 길
본래 예수님께서 계신 갈릴리 지역에서 예루살렘까지 걸리는 시간은 대략 3일 정도 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갈 때, 사마리아 지역을 거치지 않고(지도의 A길) 일주일 정도가 소요되는 베레아 지역 길이나 요단 강변을 따라 걷습니다(지도의 B길). 누가복음 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요단강에 가셨죠? 이때 요단 강변을 따라가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2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가시어 성전을 정결케 하신 후에(요 2:13-22),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실 때(요 4:3), 내려온 길(지도의 B 길)로 가시지 않고, 사마리아 지역으로 가셨다고 합니다(지도의 A길). 그때 야곱의 우물이라는 곳에서 한 여인을 만납니다. 바로 사마리아 여인이죠? 이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그 마을에 이틀을 머물며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요 4장).
따라서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공생애 맥락에서 보면, 두 번째로 사마리아를 방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요단 강변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가시지 않고, 사마리아를 지나가기로 한 것입니다. 처음에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다시 사마리아에 오시니, 환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보니,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죠? 왜냐하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마리아인들은 사마리아 여인을 통해 예수님을 소개받았지만, 결국은 예수님을 통하여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요한복음 말씀을 볼까요?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라 하였더라.” (요 4:40-42)
주전 400년 경에 사마리아인들이 세운 북이스라엘 그리심산의 성전터와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의 모형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라고 말씀하시며 남 유다의 예루살렘과 북 이스라엘의 그리심산이라는 예배공간, 곧 장소적 구분을 해체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께서 이제 사마리아를 경유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신다니, 사마리아인들이 실망한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당신도 똑같은 유대인이군. 사마리아인들을 차별하지 않는다더니, 말짱 거짓말이었군.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면 되지, 공간은 중요하지 않다고 하더니만, 이제 예루살렘 성전으로 하는가?”
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눅 9:54)” 놀랍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사마리아 사람들이나,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렇습니다. 본질은 깨닫지 못하고 단지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고 화를 내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은 고난의 길입니다. 그것을 사마리아 사람들은 물론 예수님의 제자들도 깨닫지 못한 것이죠? 기가 막힌 것은 같은 믿음의 사람들인데, 이렇게 분열된다는 것입니다. 지난주 말씀처럼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을 생각하면 이렇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함께 다른 마을로 가시(눅 9:55-56)”는 것입니다.
3. 다른 경험이 필요합니다!
왜 이렇게 믿는 사람들이 시야가 좁을까요?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믿고 새로운 삶의 경험을 한 믿음의 사람들이 도대체 왜 이렇게 변하지 않을까요?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을 닮아가야 하는데, 또한 신앙생활을 하면 마음이 넓어지고 사람이 편안하고 부드러운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왜 사마리아 사람들도 그렇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렇고 이렇게 편협하고 속이 좁고 옹졸할까요? 이것은 다른 다양한 경험이 없이, 자기 생각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 애플의 창업자로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개발한 스티브 잡스는 한 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컴퓨터 산업 종사자들이 가장 부족한 것은 컴퓨터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 다른 경험이다. 그것이 없어 연결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서 ‘다른 경험’이란 컴퓨터에 관한 지식이 아닙니다. 인문학적 소양이나 기타 다른 경험을 뜻합니다. 그리고 ‘연결시킨다’라는 말은 그러한 다른 지식과 컴퓨터를 결합해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창의적인 사고를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개신교인들에게 부족한 것은 성경에 관한 지식(물론 이것도 교리적이고, 목회자들이 일방적으로 주입한 것이겠지만 ^^;;)이 아니라, 다른 경험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보편적인 상식’, ‘역사에 대한 다양한 이해’, ‘문학적 감수성’, ‘철학의 비판적 기능’, ‘과학기술의 변화에 대한 이해’ 등입니다.
알렉산더 세베루스 황제와 그의 황금율
이것이 없어서 지금 개신교인들이 세상 사람들에 의해 ‘개독교인’으로 취급당하고 있습니다. 아니, 이런 다른 경험이 없어도 됩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황금률(Gold rule)에 잘 나와 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황금률은 ‘황금처럼 고귀한 윤리 지침’입니다. 3세기 로마 24대 황제인 알렉산더 세베루스(재위 222-235년)가 산상수훈 중, 마태복음 7장 12절의 문장을 금으로 써서 거실에 붙인 데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인간 삶의 참된 진리는 바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이 황금률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황금률이야 말로 이 땅에 현현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사역의 본질이자 메시아의 속성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한다면 우리는 예수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오실 때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4. 뒤를 돌아보는 자
계속 말씀을 볼까요? 이렇게 예루살렘을 향한 길을 계속 가실 때,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신앙을 고백합니다.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눅 9:57).”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를 진실로 따르는 자들이 없음을 깨닫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눅 9:58)”
십자가의 길을 걷는 예수님의 외로움을 엿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동행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그 다른 사람들 모두 핑계를 대고 있습니다. 말씀을 볼까요?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눅 9:59-61)
결국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눅 9:62).” 그렇습니다. 참 외로운 예루살렘 가는 길이죠? 곧 사명을 감당하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딤후 2:11-13)
5.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또한 오늘 구약 말씀 요엘서는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요엘서 말씀을 볼까요? 사실 요엘서는 ‘여호와의 날(The Day of the Lord)’에 대해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 날은 악인에게는 형벌의 날이요, 의인에게는 상급의 날입니다. 따라서 요엘은 이러한 여호와의 날에 펼쳐질 형벌을 메뚜기 떼의 습격을 통해 비유합니다. 또한 메뚜기 떼의 습격과 같은 앗수르 군대의 침공을 통해 남왕국 유다를 징벌하시는 여호와의 날을 선포합니다(욜 2:1-11),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유다 백성들이 신속하게 마음을 찢고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다시 회복시키신다고 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내리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 (욜 2:12-14)
메뚜기 재앙과 요엘 선지자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께서 외롭지 않게 우리가 변해야 합니다. 이제라도 울며 애통하고 금식하며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형식적으로 예배드리지 말고, 마음을 찢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복을 내리시고 우리의 예배(소제와 전제)를 받아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배는 우리들만의 예배가 아닙니다. 말씀을 볼까요?
“너희는 시온에서 나팔을 불어 거룩한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소집하라. 백성을 모아 그 모임을 거룩하게 하고 장로들을 모으며 어린이와 젖 먹는 자를 모으며 신랑을 그 방에서 나오게 하며 신부도 그 신방에서 나오게 하고” (욜 2:15-16)
확장이 되죠? 모든 백성들의 금식일이요, 성회로 확장 됩니다. 이 예배에는 어린이와 젖 먹는 자까지 참여합니다. 신랑과 신부도 함께하죠? 이렇게 모든 백성이 나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제사장들은 어떻게 기도합니까?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장들은 낭실과 제단 사이에서 울며 이르기를, 여호와여! 주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소서! 주의 기업을 욕되게 하여 나라들로 그들을 관할하지 못하게 하옵소서! 어찌하여 이방인으로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겠나이까 할지어다.” (욜 2:17)
주의 백성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합니다. 주의 기업, 곧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제대로 감당치 못하여 이방 나라들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해달라고 합니다. “너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는 멸시를 당하지 않게 해달라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가 예수님의 외로움과 십자가의 길에 동참하지 않고, 또한 다른 경험 혹은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고 이기적으로 살아, 세상으로부터 근심거리가 되었고 멸시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결단을 통해 이제 이방인들의 모욕, 믿지 않는 이들의 멸시를 넘어 우리 개신교의 새로운 미래를 여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