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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1-1) - " 그가 누구입니까? " / 3.1절 기념주일 / 서재경 목사 > 사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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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해] 사순절(1-1) - " 그가 누구입니까? " / 3.1절 기념주일 / 서재경 목사

관리자 2023-02-23 (목) 15:14 1년전 320  

본문) 13:16-30, 3:55-66, 7:14-25

 

러시아에 스탈린 오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승 휴게실에서 사람들 사이에 한바탕 논쟁이 벌어졌답니다. 세상에 살면서 한 일 중에 가장 즐거운 것이 무엇이냐 하는 주제입니다. 뭐가 가장 재미있고 즐거운 일일까요? 어떤 자는 뭐니 뭐니 해도 돈이 최고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자는 돈보다 여자라고 떠벌이고, 또 어떤 자는 맛있는 음식이라고 열변했지요. 그런데 그때 그 모든 게 다 가소롭다는 듯 구석에 앉아 콧방귀를 뀌는 자가 있었습니다. 스탈린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궁금해서 그에게 묻자, 그가 대답했습니다. 누군가에게 친절한 호의를 베풀어서 친구로 만든 다음, 자신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며 품에 안길 때, 그의 등에 칼을 꽂는 것, 그보다 더 짜릿한 쾌락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입니다. ‘스탈린 오락’, 권력을 위해 측근들을 수없이 악랄하게 숙청한 스탈린의 잔인함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친구를 배반하는 것이 오락이 되는 세상이라면, 얼마나 끔찍하고 참담할까요? 그 해괴한 쾌락의 제물이 되는 친구의 고통은 얼마나 크고 쓰리겠습니까? 아마 세상에 그보다 더한 괴로움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는 사순절 첫 주일의 말씀으로,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에게 유월절 빵을 떼어 주신 이야기를 함께 받아 읽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어떤 마음이셨을까요? 우리는 오늘 읽은 본문 21절에 보면, 예수님의 마음은 괴로우셨습니다. 왜 예수님의 마음이 괴로우셨을까요?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맞게 되신 예수님은,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에게로 가야 할 때가 된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을 떠나실 때, 곧 죽을 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제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 때, 이제 끝이라는 것을 알 때, 사람은 무엇을 하고 싶을까요? 가장 절실한 것, 가장 소중한 일을 하고 싶지 않을까요? 예수님께는 그게 무엇이었을까요? 본문 1절에 보면,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셨다고 말합니다. 사랑입니다. 자신은 떠나지만, 세상에 남아야 할 자신의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마지막 사랑이지요.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끝까지라고 번역한 그리스말은 텔로스까지입니다. 끝까지, 마지막까지, 남김없이 전부, 오롯이 사랑하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그런 온전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어떻게 무엇을 해주어야 할까요? 예수님은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셨습니다. 그리고는 대야에 물을 담아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른 수건으로 닦아주셨습니다. 제가 우리 집안에서는 그래도 장손입니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저에게는 접근금지 구역이 있었습니다. 집안의 장손, 남자가 가지 말아야 할 곳이 어딜까요? 부엌이었습니다. 지금은 제가 설거지도 잘하지만, 그땐 뭐 떨어진다고 부엌에 얼씬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천 년 전 유대 사람들은 어땠을까요? 남자가, 그것도 랍비 선생이 식탁 시중을 넘어 제자들의 발을 씻긴다, 이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노예들이나 하는 일입니다. 이 경천동지할 일을 보고 남자 베드로는, 내 발은 절대로 씻기지 못하신다며 펄쩍 뛰었지요. ‘내가 너를 씻기지 않으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하신 예수님의 단호한 말씀에 베드로도 발을 맡기기는 했지요. 우리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마치 어머니가 자식에게 밥상을 차려주시듯이, 마지막 밥상을 차려주셨습니다. 이 마지막 식탁에서 예수님이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셨지요.

그런데 이토록 애틋하고 절실한 마지막 사랑의 식탁에서 예수님은 마음이 괴로우셨습니다. 왜 예수님의 마음이 괴로우셨을까요?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나야 하는 것 때문에 괴로우셨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이 괴로우신 까닭은 바로 배반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그 끝까지 사랑하시는 사랑, 자신의 살과 피까지 다 내어주시는 사랑, 온 생명을 다하는 예수님의 사랑은 배반당하고 말 것입니다. 그것도 자기 제자에게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 봅니다. 유다는 왜 예수님을 배반했을까요? 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서서, 그 누구보다 열심히 따랐던 그가 예수님을 팔아넘긴 걸까요? 본문은 그 이유를 친절하게 구체적으로 밝혀주지 않습니다. 스승을 판 값이 겨우 은 30인 걸 보면, 유다의 배반은 단순히 돈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고 말하지요. 이 사탄은 또 뭘까요? 배반은 다만 사탄의 장난일 뿐 인간 유다는 아무 잘못이 없다는 얘기일까요? 그것도 아니지요.

그런데 사실 복음서는 예수님을 배반한 것이 유다만은 아니라고 증언합니다. 예수님을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자기도 끝까지 사랑하겠다고 장담했던 베드로도 배반했습니다. 세 번이나 저주까지 하며 부인했습니다. 베드로만도 아니지요. 다른 제자들도 별반 다를 게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되셨을 때, 제자들은 모두 다 도망쳤습니다. 얼마나 다급했으면, 심지어 옷을 벗어버리고 알몸으로 달아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한 번 새삼스러운 질문을 던져 봅시다. 제자들은 왜 예수님을 배반하고 떠났을까요? 왜 따르지 않게 되었을까요? 예수님이 그들이 생각하고 그들이 기대했던 것과 다르다고 판단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나는 예수님이 이런 분이라고 믿었는데, 그게 아니라면 얼마나 실망하겠습니까?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온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가까워질수록 서로 다투었지요? 그들은 무엇 때문에 다투었습니까?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이냐, 누가 최고가 될 것이냐, 그 문제였습니다. 특별히 자기 아들들은 예수님 좌우에 앉게 해달라고 청탁한 부모까지 있었지요. 여기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른 진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가 드러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하나님의 아들답게 가장 높은 자리에 앉으실 것이라 믿으며 따랐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자기들도 그럴듯한 한자리를 차지할 것이라 믿으며 따랐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기들의 욕망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탐욕을 향하여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아니라 탐욕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신들의 기대를 만족시켜 주시지 않았습니다. 어라? 가장 상석에 앉아 모범을 보여주셔야 하는데, 가장 말석에, 아니, 앉기는커녕 서서 종처럼 시중을 듭니다. 내 발을 씻으라고 명령해도 모자랄 텐데, 제자들의 그 더러운 발을 씻어주네요. 빵을 떼어주고 포도주를 따라주면서, 그게 당신의 살과 피라 하십니다. 그것도 모자라 너희들도 이렇게 하랍니다. 높은 자리에 앉고 싶은데 낮은 자리로 내려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분이셨습니다. 실망입니다. 이거 이런 분을 따라도 되는 것일까요? 이런 분이 나의 탐욕을, 나의 꿈을 이루어주실 수 있을까요? 아니지요. 출세는 애초에 글렀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할까요? 떠나야지요. 더 늦기 전에 빨리 결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요한복음은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갔다고 말했지요. 그런데 사실 이 사탄은 생경한 놈이 아닙니다. 사탄은 이미 처음부터 제자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신 적이 있었지요? 그때 베드로가 나서서 선생님은 그리스도십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당신이 죽임당할 것이라고, 고난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을 바싹 잡아당기며 항의했습니다. 여기서 항의했다고 번역한 그리스 말은 꾸짖었다’ ‘윽박질렀다그 말입니다. 이게 베드로의 믿음입니다. 나는 주님을 그리스도로 믿는데, 그러나 그리스도는 고난받으면 안 된다, 나는 고난 받는 그리스도는 따를 수 없다, 영광의 그리스도만이 나의 그리스도다, 그 말입니다. 그때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뭐라 말씀하셨습니까? “사탄아, 내 뒤로 물러나라!”

그렇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십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주님을 믿습니다, 이 놀라운 신앙고백, 이 소중한 믿음, 거기에 이미 사탄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 사탄이 앞으로 나올 때, 우리의 믿음은 예수를 믿는 순전한 믿음이 아니라, 우리의 욕망을 향하여 예수님을 부리려는 참담한 맹신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사탄이 우리의 마음 중심에 들어올 때, 우리는 우리가 믿고 따른다는 예수님을 돈 몇 푼에 팔아넘기는 유다의 길을, 그 참람한 배반의 길을 가게 됩니다. 사탄이 우리의 믿음 앞에 나서지 않게 해야 합니다. 탐욕이 우리의 신앙을 지배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사탄을 예수님 앞에, 예수님의 얼굴 앞에 두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만 끊임없이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어떤 사람일까요? 사도 바울은 자기 안에 사탄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내 안에 죄악이 똬리 틀고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아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자기에게 죄가 붙어 있다고 아프게 고백합니다. 그래서 자신은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자신 안에 있는 악이 발동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따르려 하는데, 내 지체에 있는 죄의 법이 나를 포로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몸부림치며 절규합니다. 나는 비참한 인간이라고 몸부림칩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느냐고 부르짖습니다.

바울은 누구입니까? 사도 중의 사도가 아닙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붙잡고 일생을 바친 믿음의 사람, 그 많은 고난을 다 이겨낸 사도 아닙니까? 그러나 그는 곤고한 인간이었습니다. 비참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니, 그는 자신이 비참한 인간이라는 것을 속속들이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끊임없이 자신의 악을 눌러야 했습니다. 죄의 법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고, 육신의 법의 좀비로 살지 않으려고 몸부림쳐야 했습니다. 그는 다만 자신을 죽음의 몸에서 건져 주실 수 있는 한 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고 살아갔습니다. 예수께서 사로잡으신 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예수 안에서 감사하고 찬미하고 기도하며 살아갔습니다. 항상 기뻐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며, 주님을 찬미했습니다. 바울은 완벽한 의인이 아니라 오직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은 사순절 첫 주일입니다. 지난 수요일이 사순절을 여는 첫날이었지요. 우리는 사순절 첫날을 성회(聖灰) 수요일이라 부릅니다. 성회는 재를 말합니다. 재를 뒤집어쓰고 참회하는 날이다, 그 뜻입니다. 그렇게 사순절은 회개로 시작하지요. 이 회개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자기 안에 있는 악을, 내 안에 있는 죄의 법을 성찰하고 돌이키는 것이 아닐까요? 내 믿음 앞에 무엇이 있는지, 정말 사탄을 앞에 둔 것은 아닌지 돌아보고, 아프게 돌이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도 바울은 끊임없이 자기 안에 있는 악을 경계하고, 자신을 지배하려는 죄의 법을 성찰하며 기도했습니다. 다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을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우리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예수님도 끊임없이 내 뜻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셨습니다. 땀이 피처럼 흐르도록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사탄이 내 믿음 앞에 나서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나를 성찰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걸어가시는 십자가 길을 따라갈 수 있도록, 성령께서 지켜주시고 인도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그렇게 성찰하고 기도하며 살아갈 때,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께서 넘치는 사랑과 은혜로 함께하여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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