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목회연구원

사순절(3-1) - " 기다리는 아버지 " / 서재경 목사 > 사순절

본문 바로가기

사순절 HOME > 설교올리기 > 사순절

[첫째해] 사순절(3-1) - " 기다리는 아버지 " / 서재경 목사

관리자 2018-03-01 (목) 22:04 6년전 2984  

본문) 누가복음 15:11-32,  호세아 14:1-9,  요한일서 1:8-2:6

 

색깔론?

파랑색을 좋아하는 형과 빨강색을 좋아하는 동생이 다툽니다. “파랑색이 더 좋은 색이야.” “아냐, 빨강색이 진짜 좋은 색이야.” 마음 상한 형이 아버지에게 무슨 색이 더 좋으냐고 여쭈었지요. 큰 아들을 잘 아는 아버지는 파랑색이 좋다고 말했습니다. 약이 오른 동생도 아버지에게 여쭈었습니다. 막내도 아주 잘 아는 아버지는 이번에는 빨강색이 좋다고 대답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서로 거짓말이라고 다투던 형제가 함께 찾아와서 아버지에게 무슨 색이 좋으냐고 물었습니다. 아버지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둘 다 좋아!” 

 

어떻게 한 입으로 파랑색이 좋다고 말했다가 빨강색이 좋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 아버지는 진실성이라고는 눈 씻고 보아도 찾을 수 없는 거짓말쟁이일까요? 아닙니다. 아버지가 진짜 좋아하는 것은 색깔이 아니라 두 아들입니다. 아버지는 형도 좋고 동생도 좋습니다. 형의 눈으로 볼 때, 그리고 동생의 눈으로 볼 때, 아버지가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으로 본다면, 그 말은 진실입니다. 아버지는 색깔을 보는 것이 아니라 두 아들을 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버지는 형과 동생이 서로 다른 색깔 때문에 다투고 반목하고 갈라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서로 다른 두 아들이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고 화목하기를 바랍니다. 형과 동생이 자기 색깔만 고집하지 말고 아버지의 마음자리에 서서 볼 수 있다면, 서로 이해하고 화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기다리는 아버지

우리는 오늘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한 비유를 읽었습니다. 흔히 ‘탕자의 비유’라고 불리는 이야기이지요. 대개 이 비유를 읽으면서, 아버지를 떠났다가 돌아온 둘째 아들, 이른바 ‘탕자’를 주목합니다. 이 비유는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어서 그림으로 그려지기도 하고, 노래로 불리기도 하고 연극으로 상연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극적이고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품을 떠나서 가진 재산을 다 탕진하고, 먹고 살기 위해 돼지를 치면서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며 생고생을 하지요. 탕자는 그렇게 인생의 고통스러운 막장에 이르고서야 다시 돌아가 아버지께 사죄하기로 결심합니다.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돌아온 탕자는 아버지의 용서를 받고 다시 행복하게 살게 됩니다. 해피엔딩이지요. 탕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 비유에서는 무엇보다 ‘회개’라는 주제가 부각됩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는 또 다른 입장에 선 인물이 있습니다. 첫째 아들, 형입니다. 첫째 아들은 탕자가 아닙니다. 큰 아들은 효자요 정말 성실한 아들이지요. 아버지의 곁을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습니다.(29절) 아버지가 그렇게 성실한 아들에게 염소 새끼 한 마리도 내준 적이 없지만 말입니다. 참 대단한 아들 아닙니까? 이 큰 아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버지에게 자기 몫의 유산을 달라고 요구하고, 제 것을 다 챙겨서 먼 지방으로 떠나고, 방탕하게 살면서 재산을 다 탕진한, 이 망나니 탕자를 받아주는 아버지가 천부당만부당하게 보입니다. 그냥 받아주는 것도 못마땅한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 더욱 부아가 치밀 수밖에 없지요. 거지꼴로 돌아오는 탕자를 멀리서도 알아보고, 맨발로 달려가 껴안고 입을 맞추고, 좋은 옷을 꺼내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새 신을 신깁니다. 이거 그 책임을 엄중히 물어서 ‘처형’을 해도 시원찮을 판에 국빈 대접하는 꼴 아닙니까? 그것도 모자라서, 소는 누가 키웠는데,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 한바탕 축제를 벌입니다.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폭죽을 쏘고 아주 난리가 아닙니다.

 

정말 이 첫째 아들의 입장에 서서 냉정하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그 탕자를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자신과는 전혀 다른 색깔을 가진 그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 귀하고 소중한 재산을 창녀들과 놀아나느라 다 날려버린 희대의 탕아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입니까? 어떤 신학자는 이렇게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첫째 아들이야말로 ‘또 하나의 탕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첫째 아들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방인들을 배척하는 유대주의자들을 가리킨다고 해석하기도 하지요. 어쨌거나 첫째 아들의 입장에서 보면, 탕자를 받아들이는 것이 그리 호락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어쩌면 이 비유는 바로 그러한 ‘자기 입장’을 버리라고 요청하는지도 모릅니다. 이 비유는 인간이 회개하는 길, 그리고 돌아오는 탕자를 받아들이는 길은, 아버지의 마음에 설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먼저 탕자도 자기 입장과 처지를 생각하면 결코 돌아올 수 없습니다. 그가 무슨 염치로 돌아오겠습니까? 그러나 탕자는 그 막장에서 아버지를 생각했습니다. 그가 아버지를 생각했을 때, 그는 자신이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갔습니다.(20절)

 

탕자를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첫째에게 아버지는 자신의 마음을 보여 줍니다. 아버지의 재산은 아버지와 늘 함께 있는 그 아들의 재산이나 매한가지라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변함없이 큰 아들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그 탕자도 아들입니다. 무엇보다 탕자는 죽었던 아들이고 잃었던 아들입니다. 애틋한 아들이지요. 아버지는 탕자도 사랑합니다. 형의 입장을 고집하면 도무지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지만, 그러나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마음자리에 서 보라는 것입니다. 죽은 아들을 잊지 못하고 날이 갈수록 더욱 그리워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보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탕자가 돌아온 사건은 아버지에게는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난 사건입니다.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왔는데, 이토록 놀랍고 기쁜 일이 일어났는데, 어찌 잔치를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첫째 아들이 이 아버지의 마음자리에 설 수 있다면, 그도 돌아온 동생을 껴안고 기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비유는 “탕자의 비유”라기보다 “기다리는 아버지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우리를 아버지의 마음자리로 초청합니다. 특히 누가복음은 이방인과 약자의 문제를 주목하지요. 누가복음은 ‘사마리아 사람’을 자주 언급합니다. 사마리아는 분단된 북 이스라엘의 수도였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이 그곳에 이방인들을 거주시키면서 이방인의 땅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강대국이 자기들 지배하기 쉽게 분단시켜 놓았던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본래 같은 이스라엘 백성이었는데, 남 유다의 입장에서 볼 때 이방인이 된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결코 자신들이 이방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지요. 오히려 정통성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남북이 서로 적대하고 싸우게 된 것입니다. 

 

또한 누가복음을 기록하는 시기에는 이방 지역에 디아스포라로 살았던 유대인 2-3세를 받아들이는 문제가 대두되었습니다. 엄격한 순혈주의를 고집하는 유대인들은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하고 정죄했지요. 돼지(돼지는 이방인의 상징) 죽통에 빠졌던 이들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한 민족 한 백성이 서로 갈등하고 적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자리에서 보면, 그들은 이방인이 아니라 아들입니다. 죽었던 아들이요 잃었던 아들, 오히려 더 애틋한 아들입니다. 

 

어떻게 유대인과 이방인이 서로 받아들이고 화해할 수 있을까요? 그들 모두의 한 아버지, 한 하나님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고멜을 사랑하라

“너는 다시 가서 다른 남자의 사랑을 받고 음녀가 된 그 여인을 사랑하여라.”(호 3:1) 호세아에게 내린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호세아는 고멜과 결혼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고멜을 아내로 맞아 자식들을 낳았지요. 그런데 그만 고멜이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순수한 사랑을 버리고 쾌락을 좇아 음란한 길로 갔습니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고, 화려한 옷을 주고, 기름과 술을 주는 정부를 따라간 것입니다. 그렇게 음란한 고멜의 자식들은 이스르엘(심판), 로루하마(무자비), 로암미(내 백성이 아니다)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호세아에게 하나님은 다시 그렇게 탕녀가 된 고멜을 찾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어떻게 고멜을 찾아가서 다시 사랑하라는 말입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단호하게 응징을 해도 시원치 않을 텐데, 그저 잊어주는 것만이 마지막 베풀 수 있는 호의일진대,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호세아가 아무리 물렁물렁한 무골호인이라 할지라도 인간으로서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자리에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지금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심정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정입니다.(호 11:9) 버리려고 해도 버릴 수 없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불길처럼 솟아오르는 하나님의 애타는 마음입니다. 이렇게 애끓는 하나님의 마음을 기억할 때에,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기억할 때에, 이스라엘은 다시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기억하고 다시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기억하고, 다시 하나님께 돌아와 모든 죄를 고백하면,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신실한 분이시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실 것입니다.(요일 1:9) 

 

평화의 봄

사순절 셋째 주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따라가는 절기지요. 그런데 십자가란 무엇일까요?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통하여 모든 원수된 것을 소멸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진 것을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십자가는 유대인을 사랑하시며 또한 이방인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보여줍니다. 유대인의 입장만 고집한다면 하나가 될 수 없지요. 이방인 입장만 주장해서도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본래 유대인도 이방인도 모두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하나님의 한 백성입니다. 큰 아들도 탕자도 모두 한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빨강색도 파랑색도 한 빛의 두 스펙트럼 아닙니까? 파랑색만 고집하고 빨강색만 집착한다면 서로 원수 될 일밖에 없습니다. 색깔이 아니라 사람을 생각해야 합니다. 생명을 생각하고 민족을 생각해야 합니다. 온 생명과 역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자리에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거기서 비로소 평화의 길이 열릴 것입니다.

 

평창 올림픽을 계기로 꽉 막혔던 남과 북의 관계에 따스한 봄바람이 불어왔습니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또다시 색깔론을 고집하는 꽃샘바람도 붑니다. 당리당략이 아니라 민족을 생각하고 평화를 생각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마음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은총의 이슬을 내리셔서 이 땅에 생명의 봄이, 평화의 봄이 활짝 열리기를 기도합니다.

 

서재경 목사(한민교회) 



말씀목회연구원        ☎ TEL : 010-2434-0536       E-mail : puock@hanmail.net
COPYRIGHT © 2017 말씀목회연구원 .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