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목회연구원

사순절(2-1) - "더불어 함께 살기 위해" / 청년주일 / 이병일 목사 > 사순절

본문 바로가기

사순절 HOME > 설교올리기 > 사순절

[둘째해] 사순절(2-1) - "더불어 함께 살기 위해" / 청년주일 / 이병일 목사

관리자 2022-03-10 (목) 10:35 2년전 341  

본문) 전 5:10-20, 약 1:2-11, 막 10:17-31


우리의 전통에서 봄은 정월대보름부터 시작합니다. 설날을 가족 단위의 명절이라고 한다면, 정월대보름은 마을 단위의 명절로써 공동체적입니다. 줄다리기, 차전놀이, 고싸움 등은 한 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마음이 가득한 대동의 마당입니다. 14일에는 오곡밥을 짓고 각종 나물로 복쌈을 먹었습니다. 오곡밥을 먹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백가반”(百家飯)이라고 하여 세 집 이상의 다른 성을 가진 사람의 집에 가서 밥을 먹어야 그 해의 액운이 사라지고 운수가 좋다고 하여, 서로 초대하거나 아니면 집집마다 돌면서 밥을 얻어서 함께 나누어 먹기도 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사람을 불러서 대답을 하면 “내 더위 사가라” 하며 더위팔기를 하여 병이 없는 여름이 되길 기원했습니다.

마을이 살아 있던 예전에는 설날이라고 하여 그날 하루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름까지 거의 매일 행사가 있었습니다. 동네에서 윷을 놀거나 쥐불놀이를 하거나 연날리기, 제기차기, 널뛰기 정도는 아직도 조금씩 남아 있습니다. 조상들은 정초에 12간지에 해당하는 날마다 의미를 부여하고 각 날마다 해야 할 일과 금해야 할 일을 정해 놓고 지켰습니다. 그 내용들은 주로 쉼과 농사 준비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보름 동안 쉼과 함께 일 년의 농사를 준비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동체성을 돈독히 하는 일이고, 모든 원한을 털어버리고 하나가 되어 새로운 출발하는 것입니다.

“설은 나가서 쇠어도 보름은 집에서 쇠어야 한다.” 객지에 나간 사람은 설에 부득이 집에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보름에는 꼭 돌아와야 한다는 뜻의 속담입니다. 설은 새해가 시작하는 때이므로 출타를 한 사람도 집으로 돌아와 가족과 함께 지내고 조상에게 예(禮)를 다하고 이웃에게 인사를 다녀야 합니다. 부득이 설을 집에서 쇨 수 없었다면 정월대보름에라도 집에 돌아가야 합니다. 설에는 사정이 있어서 집에 못 갔지만 보름 정도 여유를 가지면 그 사정을 다 해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정월대보름은 일년 중 농사 풍년을 소망하고 준비하는 중요한 시기로, 보름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농사짓기가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보름까지 집에 가서 생계(生計)요, 생존(生存)을 해결할 농사짓기를 준비해야 합니다. 보름인데도 여전히 출타를 하고 있으면 ‘철(농사철)을 모르는 사람이요, 철이 없는 사람이요, 농사와 단절한 사람’이라고 해서 이전에는 욕(辱)을 먹었습니다. 욕을 먹는 사람은 농사 공동체에서 따돌림 받기 쉬웠습니다.

전통문화를 삶 속에서 깊게 이어온 바탕이자 주체는 마을이었습니다. 마을은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공간이며 주거지이고 관계의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마을의 역할과 모습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일제 강점기와 박정희 개발시대에 의도적으로 파괴한 영향이 큽니다. 최근에 지자체별로 전통문화를 복원하다고 하면서 거의 상업적이거나 전시행정 차원에서 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풀뿌리 단체를 중심으로 공동체적 의미를 되살리려는 노력들이 있는 것은 고무적인 일입니다. 교회공동체도 마을의 다른 형태입니다. 이제는 마을 단위의 공동체적 전통문화들이 거의 사라졌기 때문에 교회공동체가 그 역할을 하면 좋겠습니다.


자본주의적 생활양식에 젖어 있는 우리는 수시로 시험과 유혹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다가온 것이 유혹이나 시험인지도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도 흔합니다. 아니면 분명히 유혹인줄 알면서도 여러 가지 이유로 그냥 살기도 합니다. 우리 삶에서 가장 큰 유혹은 무엇입니까? 자본주의 사회니까 ‘돈’이겠지요. 재산, 재물, 소유가 넉넉해서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을 성공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실 돈이라고 하는 것은 많은 사람에게나 적은 사람에게나 큰 유혹입니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하는 말이 있듯이, 경주 최 부자처럼 잘 쓰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더 가지려고 안달입니다. 반대로 적으면 참 구차하게 좀스러워지게 됩니다. 돈에 대한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전도서에서는 부와 재산은 하느님이 사람을 행복하게 살게 하기 위해서 주신 선물이라고 합니다. “돈 좋아하는 사람은, 돈이 아무리 많아도 만족하지 못하고, 부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리 많이 벌어도 만족하지 못하니, 돈을 많이 버는 것도 헛되다. …… 어머니 태에서 맨몸으로 나와서, 돌아갈 때에도 맨몸으로 간다(空手來空手去). …… 우리의 한평생이 짧고 덧없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니, 세상에서 애쓰고 수고하여 얻은 것으로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요, 좋은 일임을 내가 깨달았다! 이것은 곧 사람이 받은 몫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부와 재산을 주셔서 누리게 하시며, 정해진 몫을 받게 하시며, 수고함으로써 즐거워하게 하신 것이니, 이 모두가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선물이다. 하나님은 이처럼, 사람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시니, 덧없는 인생살이에 크게 마음 쓸 일이 없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영생을 얻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묻는 부자 젊은이에게 말합니다. “재산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참으로 어렵다. ……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 …… 사람에게는 불가능하나, 하나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 아끼던 재산이 그 주인의 발목을 잡아서 비참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돈과 재산이 지금 우리에게 큰 유혹이 되는 것은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남들과 비교하기 때문에 자기에게 만족하지 못하게 됩니다. 만족하지 못한 것은 채우기 위해서 경쟁을 하게 됩니다. 경쟁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돈과 함께 큰 유혹의 원인이면서 동시에 그 결과입니다. 사람들은 진화이론에서처럼 적자생존이나 자연선택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경쟁을 합리화하고 인간사회에서 당연하게 여깁니다. 경쟁이 치열할수록 사람들은 일중독에 빠지게 됩니다. 스펙을 쌓기 위해서, 남들보다 뛰어난 온갖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서 더 많이 노력하게 됩니다. 요즘 우리 사회는 나이를 불문하고 그러한 경쟁에 푹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쟁의 필연성이나 불가피성이란 결코 우리자신의 몸과 마음이 원해서 자유로이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 동안 우리가 체계적으로 교육되고 세뇌되어 만들어진 결과입니다.”<선착순, 조별 박수치기> 선착순은 한 사람이 여러 사람을 통제하고 길들이기 위한 효과적인 수단이듯이 경쟁은 통제와 지배의 도구입니다. 관리자, 지배자, 경영자, 통치자, 권력자, 자본가 입장에서 그렇습니다. 그들은 “경쟁이 있어야 각자 최선을 다하게 되고 그래서 발전이 된다.”고 주장합니다. 한 나라뿐만 아니라 이제는 세계화를 내세워서 ‘무한경쟁’ 시대라고 하면서 사람들을 몰아세웁니다.

그러나 경쟁(competition)이라는 말의 어원은 ‘함께 추구하는 것’입니다. 공동의 목표나 최선을 결론에 이르기 위해 다 같이 모색하는 것이 경쟁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경쟁은 ‘너 죽고 나 살자’식의 적대적 생존경쟁으로 변해버렸습니다. 경쟁을 통하여 사람과 자연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고, 그를 통해 이윤을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자본의 논리가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실제로 경쟁은 사회경제적 불평등이나 빈곤을 부르고, 자원고갈이나 생태계 파괴 등 경제의 토대 자체를 무너뜨렸습니다.


이제는 자본과 지배의 논리인 경쟁과 성장의 한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다시 경쟁 본연의 의미를 되살리고 사람과 생명의 논리인 협동(cooperation)으로 돌아서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아는 시험은 남보다 더 많이 외웠다는 것을 평가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결과는 개인적인 성실함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 쏟아 부은 돈과 시간과 열정을 비교하면 경쟁을 부추기는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고비용 저효율’입니다.

우리가 공기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어릴 적부터 경쟁 속에 깊이 빠져있기 때문에 경쟁 속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와 남을 가르는 경쟁과 분열에서 연대와 협동의 방식으로 살림의 경제적 틀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은 나 함 사람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 준비를 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공동체를 만들고 다양한 운동으로 확산될 수 있습니다.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요약한 핵심입니다. 자기의 재산을 포기하지 못하고 울상을 지으면서 떠나간 부자 젊은이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기들과 비교하여 속으로 우쭐 대고 있는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비교와 경쟁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논밭을 버린 사람은, 지금 이 세상에서는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논밭을 백 배나 받을 것이고, 오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첫째와 꼴찌를 언급한 것은 복음서 여러 곳에 나옵니다. “그러나, 첫째가 된 사람들이 꼴찌가 되고, 꼴찌가 된 사람들이 첫째가 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마 19:30) “이와 같이 꼴찌들이 첫째가 되고, 첫째들이 꼴찌가 될 것이다.”(마 20:16)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그는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막 9:35) “보아라, 꼴찌가 첫째가 될 사람이 있고, 첫째가 꼴찌가 될 사람이 있다.”(눅 13:30) 이 둘은 우리 사회에서라면 서로 가까이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둘이 뒤섞여 서로 바뀌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첫째와 꼴찌는 순서를 말합니다. 경쟁에 묻혀 사는 우리의 눈에는 그 차이가 무척 크게 보이고, 전혀 다른 상태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둘을 서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그 차이를 없애버립니다. 어떤 조건이 되지 못하면 첫째나 꼴찌가 오십보 백보, 도진 개진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첫째와 꼴찌는 순위를 말합니다. 등수를 매길 때에는 기대심리가 있습니다. 기대를 하게 되면 그 속에서 욕망과 욕심이 일어납니다. 그 욕심은 나에게 돌아올 결과를 미리 바라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일을 할 때에 그 결과로 내게 돌아올 것을 기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 세계는 분열과 경쟁에 토대하여 지배와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이 사회경제적 구조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구조는 더 치밀하고 거대하게 확대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는 유혹하는 것임과 동시에 우리가 넘어야 할 시험입니다. 그러한 시험을 인내로 넘을 수 있다면 우리는 더욱 성숙해질 것입니다. ‘협동조합’을 조금 다른 주식회사가 아니라 반자본주의적 대안 방식으로 인식하고, ‘마을 만들기’를 주민 모두가 주체가 되어 각자가 가진 재능을 나누면서 함께 살아가는 호혜적 생활관계망을 만드는 일임을 몸과 마음으로 공감할 때에 가능할 것입니다. 각자의 재능은 스펙이 아니라 자기의 생각을 실행 가능한 계획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능력입니다.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도 청하고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함께 하도록 설득하는 방법과 태도입니다.

더불어 함께 살기 위한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지혜가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하느님께서 채워주실 것입니다. 야고보를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질 때에, 그것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은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낳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인내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완전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 가운데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아낌없이 주시고 나무라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그리하면 받을 것입니다.” 보름에 둥글고 밝은 달처럼 서로를 살리고 이 땅의 모든 생명을 북돋우는 교회공동체가 되기를 빕니다. 하나님과 사람과 자연이 어우러지는 전통을 되살림으로써 더 끈끈한 마을공동체가 되기 위해 함께 합시다.



말씀목회연구원        ☎ TEL : 010-2434-0536       E-mail : puock@hanmail.net
COPYRIGHT © 2017 말씀목회연구원 .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