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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해] 사순절(2-2) - "생명 구원을 소명 삼은 예수처럼" / 최부옥목사

관리자 2018-02-23 (금) 18:43 6년전 2532  

본문)  눅15:1-10, 렘31:10-14, 벧전2:18-25  /  3.1절기념주일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접촉하고 가까이 하시는 대상들을 보면, 확실히 우리와 다르시다. 우리들 대부분은 친하고 가까워 부담 없는 이들을 가까이하고 산다. 자기가 강하여 접촉하기에 부담스럽고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이들과는 우리 역시도 가까이 하지 못하고 멀리한다. 

 

특히 사람들에게 욕을 먹거나 문제가 있다고 공인이 된 사람을 향해서는 우리도 고개를 돌린다. 하지만, 예수님의 경우는 그러한 우리와는 거의 정반대의 태도를 보이신다. 세상이 멀리하는 사람들이나, 사람들로부터 왕따를 당한 사람이거나, 악명(惡名)이나 악평(惡評)을 듣고 사는 이들이라면, 그런 자들은 거의 예수님께서 집중적으로 접촉하시는 대상이라고 보면 될 정도이다. 

예수님의 집중적인 대상은 대체로 가난한 자, 병든 자, 귀신들린 자, 죄인으로 낙인 받은 자, 여자, 어린이, 외로운 자, 외국인, 그리고 새 세계를 진심으로 원하는 자 등등이었다. 문제는 이런 자들이 대부분 정통 종교인들에게는 죄인들로 규정되어 접촉하기가 원활하지 못하고 배제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 바람에 예수님의 이런 인간 편향적인 행보(行步)는 자연히 그들 기득권자들(정통 종교세력들)로부터 끝없이 감시당하고 공격을 당하며 시비를 당하셨다. 심지어는 그들의 증오와 제거의 대상이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그런 입장과 행보는 전혀 변함이 없이 일관(一貫)된 것이었고, 주변의 그 어떠한 따가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아니하셨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다음과 같은 당신의 분명한 입장들 때문이었다. 

 

1) 예수님의 마음은 정죄자나 심판자의 마음이 아닌, 자식을 대하는 어버이 마음인 긍휼과 자비의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부모들 생각해 보라! 자식들 가운데, 좀 삐딱한 자식이라고 외면하는 부모는 없다! 부족한 자식이라고 형제들 사이에서 제외시키는 부모는 없다. 오히려 부족하고 모자라니까 더 품게 되는 이가 바로 부모들이다! 


2) 세상이 그들을 죄인으로 정죄한 규정(規定)에 대하여 주님은 전혀 동의(同意)하지 아니하셨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그들에게도 희년과 같은 인생에 새로운 기회를 부여하심으로서, 그들도 하나님의 자녀로 살 수 있도록 기회(機會)를 부여하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3) 그들을 죄인이라는 시각 보다는 치유 받아야할 대상이요 도움 받아야할 대상으로 보셨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시각 때문에, 주님은 모든 유대인들이 그토록 접촉을 피하고 배제시켰던 그 사마리아인들까지 구원의 대상으로 가슴에 품으셨던 것이다. 


4) 한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시는 하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 아들이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은 그 어떠한 죄인도 최후의 순간까지라도 구원 받게 되기를 원하셨기에, 아들이신 예수님 역시 세상의 흉악한 죄인들의 생명과 구원도 마지막 까지 포기하거나 외면할 수가 없으셨다! 십자가상의 오른 편 강도의 경우처럼 말이다. 


5) 무엇보다도, 잃은 양 찾는 일이 당신의 최고의 가치와 기쁨을 누리는 일임을 당신의 제자들에게도 온전히 전수해 주시고자 하시는 주님의 깊은 배려와 마음 때문이었다. 잃은 양 찾기는 당신의 사역으로 시작이 될 일이어서, 그 몫을 이을 제자들에게 이 일이 얼마나 당신의 백성들의 임무요 책임이며, 또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 지를 전승시켜 주시려고 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그러하시니, 이제 그의 제자들과 백성으로 부름 받은 우리의 입장에도 대변화가 일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세 본문에 나타난 삼위일체 하나님의 그러한 입장을 잘 배우고 익혀서 말이다. 

 

이 시각으로 이제 복음서를 보자 :

예수님은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는 행위가 얼마나 큰 기쁨이며 지고(至高)의 가치인지를 강조하는 말씀들이다. 하지만 같은 하나님을 믿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전혀 달랐다. 

 

예수께서 세리(稅吏)들과 식탁을 함께 하시며 어울리시는 일에 대하여, 바리새인과 서기관(율법학자)들은 죄인들과 어울리는 불경(不敬)한 행위라며 비난했다(2절). 하지만, 주님의 입장은 그들과는 아주 달랐다. 비판자가 아닌 협력자의 삶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신 것이다. 

 

주님에게는 그들 죄인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어서 영원한 죄인으로 죽게 버려두는 일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며 참 신앙인의 태도가 아니다. 그보다는 전심을 다하여, 죄인들로 하여금 죄에서 벗어나 회개하고 의의 세계로 돌아오도록 인도하는 행위가 참 경건(敬虔)의 행위라고 보신 것이다. 

 

죄인들을 정죄나 하고 비난하는 것이 경건한 자의 도리가 아니요, 오히려 그들을 도와 죄의 구덩이에서 벗어나도록 노력하는 태도(참여를 통한 갱신)가 참 신앙인의 모습임을 분명히 하신 것이다. 그런 입장이었기에, 주님이 세리들을 가까이 하셨고, 그들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참여하도록 인도하신 것이다. 

 

사실 종교적인 시각에서 직업상의 문제로 인하여 죄인이라 비난은 받지만, 알고 보면 그들 자체는 사회에서는 상당한 지식인들이고 기능인들이었다. 그런 점에서 주님의 그들을 향한 긍휼과 자비의 선교는 그들 존재들의 영적 구원만을 견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자원과 기능까지도 햇빛을 보게 하므로서, 회개하고 돌아온 자녀들을 통하여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릴 뿐만 아니라 이 땅의 하나님 나라운동에 커다란 기여를 할 수 있게 하셨다. 무엇보다도 주변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큰 도움과 섬김의 역할을 수행하는 큰 인물들이 되게 하였다. 눅 19장에 나온 여리고의 세리장인 삭게오의 구원의 사례와 그 효과는 가장 좋은 사례이다. 

 

복음서는 이런 점도 분명히 전해 준다. 이런 잃은 양 찾기란 영적 작업은 결코 간단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매우 힘들고 또 상당한 수고를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어린 양 찾기에 나설 때, 비로소 우리는 영적인 고난(苦難)과 십자가를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양 자체의 까다로운 성질과 행동 때문이기도 있고, 또 집 떠난 양들이 빠져 들어간 유혹과 어둠에 세계와의 씨름하며 찾아내는 일 자체의 과제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양들을 오랫동안 키우면서 양들의 특성을 제대로 살피면서 <목자가 본 시23편>이란 신앙서를 집필했던 필립 켈러의 증언에 의하면, 양은 성질이 온순하다는 선입견과는 달리, 본질적으로 아주 못된 습관이란 습관은 다 가진 동물이어서 다루기가 아주 까다롭다. 

 

양들은 목자들이 한 눈을 팔면 금방 없어지고 앞으로 행진할 때 목자보고 가는 것이 아니라 풀만 뜯으며 가기 때문에 목자들은 양들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고, 손도 많이 가야만 되는 가축이라는 것이다. 그 바람에 목자에게 양들은 삶의 같이 나누며 애지중지하며 키우게 되고, 미운 정 고운 정이 깊이 들어서 결국은 가족이요 식구처럼 된다고 한다. 

 

그런 양이 실종하게 되면, 가슴이 급해지고 아파진다. 남은 양들은 우리에 두고, 집 떠난 양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게 된다. 어디에서 죽었는지 짐승 밥에 되었는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목자는 애타는 마음으로 찾아 나선다. 그러다가 고생 끝에 찾게 되면, 목자의 기쁨은 하늘을 찌르게 된다. 무리를 해서라도, 찾아낸 큰 기쁨을 동료들과 파티를 벌린다. 한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의 기쁨 이야기도, 잃은 자를 찾은 자의 기쁨은 무엇에 비교할 수 없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함께 소개해 준 내용이다. 

 

주님이 ‘죄인 한 사람의 회개의 비중’을 얼마나 크게 보는 지를 잘 소개해 주는 이야기들이다(7절). 주님의 보람과 생명 돌봄의 가치가 그러했기에, 잃은 자를 찾기 위해 당한 고난은 결코 고난이 아니었고 차라리 진정한 보람이었고 참된 기쁨이었다. 이 모습은 영과 의를 중심으로 살아야할 우리의 영원한 길잡이가 아니겠는가. 

 

예레미야서는 하나님의 잃은 백성인 열방으로 흩어진 이스라엘을 찾으셔서 데리고 오실 사랑과 능력의 하나님을 이방인들이 생생히 보고 온 세상에 전하라고 말씀하신 내용이다. 

 

이 때의 여호와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찾아오게 하실 때, 그 상대를 당시 세상 최고의 권력과 무력의 위세를 떨치던 제국들(이집트& 바벨론& 바사 등)을 상대로 삼으셨다. 결코 힘없던 약자들을 상대한 회복이 아니라 최강들을 상대로 빼앗기고 잃었던 당신의 양무리(백성)를 되찾아 오시는 승리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런 모습은 그들의 바벨론에 포로 된 일이 결코 하나님의 무기력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범죄한 이스라엘을 회개 시키려는 일이었다는 점을 알림과 동시에, 하나님은 모든 세상 권력 위에 존재하시는 ‘역사의 주’요 ‘세상 만민의 주’이심을 확인시키려는 것이기도 하다. 예수의 잃은 자 찾기도 당시의 권력자들과 기득권자에 짓눌린 자들로부터의 당신의 빼앗긴 백성들을 되찾아 오는 씨름이었고 승리였다.

 

바로 이 점은 그 은혜를 입은 자들의 기쁨과 행복을 최고조가 되게 한다. 최고 지존(至尊)의 은혜를 입은 백성 이스라엘의 회복은 이전의 모든 패해와 결손을 충분히 상쇄할 만큼의 놀랍고 명예로운 것이 된다. 마치 요즈음 세계 최강을 인정받는 금메달 취득의 기쁨을 것이다. 특히 그 영화로움에 대한 평가는 받는 자 자체에서라기보다는 그런 장면을 지켜 본 이방인들의 증언에 의한 것이기에 더욱 높은 가치를 가진다(10절.앞). 

 

서신서는 잃은 자를 찾은 그리스도의 제자 된 우리가 어떤 길을 가야만 할 것인지를 말씀한다

한마디로, 그의 은혜를 입고 길을 찾아 구원을 받은 우리는 마땅히 주님의 잃은 양 찾기에 동참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 역시 목자 예수님에 의해 ‘잃은 자’에서 ‘찾은 자’가 된 입장에 와있는 우리들에게 부여된 소명이며, 감당해야만 할 영적 자세와 책임이다. 다음의 말씀 때문이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1절)

 

증언을 마친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사람들 상대해야 겠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 특히 그늘 진 곳에 있는 사람들을 품에 품는 사람들로 나아가야 하겠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는 생활을 피하지 말아야 하겠다. 이런 행보가 주님의 소명이었듯이, 우리의 것이 되고 우리의 진정한 기쁨과 보람이 되어야 하겠다. 

 

특히 오늘은 3.1절 제 99주년 기념주일이다. 오늘의 우리는 분단의 질곡에서 길을 찾아야할 어린 양이기도 하기에, 우리를 강한 자로부터 회복시켜줄 선한 목자이신 예수가 절대 필요하다. 구원받은 우리는 그 대임을 수행할 의무가 있다.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세력은 제국들이며 강자들이다. 그러나 주님이 그 위에 계셔서 우리를 이끄신다. 이 중대한 사실을 절대 잊지 말고 뜨겁게 기도드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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