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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해] 사순절(2-1) - " 외치는 닭과 우는 베드로 " / 이병일 목사

관리자 2020-03-03 (화) 17:08 4년전 1479  

본문) 요 18:12-18,25-27; 삼하 12:1-13; 행 3:11-21


요한복음 본문은 “베드로의 부인(否認)”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님이 잡혀서 대제사장의 관저로 끌려갔을 때 바로 그곳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예고대로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하였습니다. 복음서마다 조금 다르지만 예수님은 베드로가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자기를 부인할 것이라고 예고했습니다. 베드로의 첫 번째 부인은 예수님에 대한 무지함을 주장하고, 둘째는 그 소속을 완강하게 부인하고, 셋째는 예수와의 관계를 부인합니다.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으며, 갈릴리 사람이므로 그들과 한 패라는 사실을 베드로는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반복해서 부인하였습니다. 

어떤 고대사본에는 베드로가 첫 번째 예수님을 부인했을 때에 닭이 한 번 울었다고 합니다. 그 때까지도 베드로는 깨닫지 닭 울음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 세 번째 부인을 하자마자 즉시 닭이 또 울었습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울었다고 합니다. 마태와 누가 복음서에서는 닭이 한 번 울고 베드로는 심히 통곡했다고 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베드로가 울었다는 내용이 없고, 그냥 닭이 울었다는 말로 이 부분을 마칩니다. 그러한 차이는 복음서의 공동체마다 베드로와 사도 공동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을 반영합니다. 

전승에 의하면 베드로를 깨우친 닭의 홰치는 소리는 베드로가 죽기까지 그 소리를 들으며 자기를 돌아보게 하였다고 합니다. 어디서든지 닭 울음소리를 들으면 그 때 일이 생각나서 혹시라도 마음이 약해지지나 않았는지 자기를 돌아보았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베드로를 깨우친 닭의 홰치는 소리가 필요합니다. 마음이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질 때, 몸이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지 못할 때마다 경고하는 소리가 필요합니다. 


유럽에 가 보면 성당에 있는 종각위에 닭 모양을 만들어 놓은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가야바의 뜰에서 울리던 닭 울음소리를 듣고 예수님의 말씀이 떠올라 평생을 닭이 우는 소리를 들으면 예수님 앞에서 자만하던 자신을 속죄하고 회개의 눈물을 흘리게 된 것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옛 사람들은 성당의 종각 위에 닭의 모양을 세우고 그 종소리를 들으면, 베드로 사도가 통곡하며 회개하는 장면을 생각하여 주님을 배반하는 일이 없도록 장담하기 위하여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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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그레코(1541~1614) 눈물을 흘리는 성 베드로


엘 그레코(1541~1614)의 그림 “눈물을 흘리는 성 베드로”는 네 복음서의 내용을 종합해서 베드로의 마음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배반할 수밖에 없었던 베드로, 별 수 없이 나약한 인간의 공허한 눈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서 흘리는 그 눈에서는 자기의 잘못을 몹시 비통해 하는 마음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앞으로 주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두 손을 꼭 모은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사람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실수를 합니다. 훌륭한 사람은 실수를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잘못을 해놓고도 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장점이 아무리 많아도 타인에게 존경을 받기 어렵습니다. 보다 훌륭한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뿐 아니라 그것을 고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사무엘하 본문에서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아를 죽게 한 사실을 꾸짖는 나단 앞에서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하면서 참회하는 다윗의 모습은 그리고 있습니다.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은 자기의 허물을 스스로 받아들이면서 죄과를 치르며 평생을 살아야 하는 삶의 출발입니다. 하느님과 사람 앞에서 부끄러운 실수와 죄악을 저지른 다윗이 그나마 하느님의 복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잘못을 인정하는 그의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베드로를 회개시킨 그 닭은 지금도 울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의 마음속에 닭을 한 마리씩 넣어 두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책감입니다. 기독교는 너무 죄책감을 부추기지만, C.S. 루이스는 죄책감을 정의하기를 “참된 죄의식은 우리의 삶에 내재하는 죄와 하느님과의 관계 단절을 경고하는 마음의 비상벨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삶에 죄가 존재할 때, 그리고 하느님과의 관계에 이상이 발생할 때 그 닭은 이를 경고하기 위해 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와 제자들이 했던 말과 예수님이 잡힌 후에 그들이 했던 행동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행위를 쉽게 비난하거나 연민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다고 베드로와 제자들을 나무라기만 할 수는 없습니다. 함께 죽임을 당할지라도 맹세를 지키겠다는 각오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하였는데, 그러한 끈끈하고 비장함이 없다면 그 결과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어떤 일을 할 때에 그 일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시작부터 마음이 맞지 않고 삐걱거린다면 그 일을 끝까지 해낼 수 있겠습니까? 제자들이 비록 실패하고 결국에는 예수님을 부인하였지만, 그러한 맹세와 각오는 훗날 스스로를 추스르는 데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잡힘과 죽임 당함이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기에 제자들의 맹세와 각오가 공허하게 되었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닐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다시 일어서는 부활로 인하여 제자들의 맹세는 중간에 실패하였지만 다시 지킬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도망을 예고하면서도, 예수님이 잡힐 때에 제자들이 모두 자기를 버리고 달아날 것을 알면서도 그들에게 의미심장한 약속을 합니다.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갈 것이다.” 그 약속이 당시에는 제자들에게 허무하게 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을 확인하고 깨달은 후에 그들이 함께 활동하던 갈릴리로 먼저 갈 것이라는 예수님의 약속은 그들이 다시 일어나게 하는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이 약속은 갈릴리가 민중의 한을 품을 고향의 상징이며, 새로운 힘을 솟아나게 하는 희망의 상징이 되게 하였습니다.     

종교는 인간의 유한성을 깨닫고 스스로 겸손하게 하며, 또한 인간의 유한성의 한계를 극복하고 무한한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이끕니다. 본문 속에서 제자들의 실패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말의 허무함과 존재의 유한성을 깨닫습니다. 아무리 굳은 약속이나 확고한 마음이라도 깨어질 수 있고 헛될 수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늘 스스로를 돌아보고 겸손해야 합니다. 말과 행동에 신중해야 합니다. 거짓된 말과 막무가내식의 행동이 일상화 되어 있는 정치인은 반드시 비난과 지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비난과 지탄이 나의 작은 일상 속에서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밤이 거의 지나고 날이 밝을 무렵, 먼동이 트기 전, 새벽은 닭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보통 새벽에 닭들이 깨어나 날개를 펴서 자기들 잠자리에 있는 홰(닭장 속에 가로지른 나무 막대)를 탁탁 치면서 웁니다. 닭들의 이런 행동을 두고 ‘홰 친다’라고 말합니다. 닭의 울음은 때를 알려주는 시보 역할을 합니다. 시계가 없던 시절 새벽은 닭의 울음소리로, 날씨가 흐린 날이나 밤은 닭이 홰에 오르는 모습을 보고 시간의 흐름을 파악했습니다. 그래서 그 울음소리를 듣고 날이 새었는지를 알 수 있었고, 조상 제사를 지낼 때도 이 닭 울음소리를 기준으로 메를 짓고 제사를 올렸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별똥 떨어진 데”라는 시에서 “닭이 홰를 치면서 맵짠 울음을 뽑아 밤을 쫓고 어둠을 짓내 몰아 동켠으로 훠언히 새벽이라는 손님을 불러온다.”고 했습니다. 수탉의 울음소리는 어두움과 암울함에서 새로운 희망이 오는 것을 상징합니다. 도깨비나 밤에 활동하는 악귀나 요괴들도 닭 울음소리만 들리면 기겁하고 달아난다고 하여 닭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여명(黎明)을 알리는 상서롭고 신통력을 지닌 서조(瑞鳥)로 여겨져 왔습니다. 닭이 날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지상에서 생활하는 존재양상의 이중성은 어둠과 밝음을 경계하는 새벽의 존재로서의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것은 하느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서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인간의 모습, 하느님이면서도 사람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모습과 유사합니다. 

역사적으로는 예수님 당시에 예루살렘 근처에는 닭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베드로를 깨우치게 하는 수단으로 닭의 울음소리가 쓰인 것은 대단한 상징입니다. 베드로의 깨우침으로 뿔뿔이 흩어져 도망갔던 제자들이 다시 모이게 되었고, 그들은 두려움에 떨면서도 예수님의 부활을 기다렸습니다. 아직도 부족한 제자들이지만, 그들이 모임으로써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이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습니다. 잘못은 인간의 몫이고 용서는 신의 몫이라는 말처럼,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르거나 실수하거나 시행착오를 합니다. 그러나 잘못을 깨우쳤을 때, 나의 행동과 말이 실수였음을 깨달았을 때, 미련 없이 과감하게 잘못이나 실수를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가는 길이 전혀 다른 길이었음을 알았을 때 즉시 돌아서서 옳은 길로 들어서야 합니다. 닭의 홰치는 소리에 즉시 엎드려 울었던 베드로처럼 돌아서는 행동은 개인과 공동체가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서는 출발이 될 것입니다. 


닭이 울었다고 할 때에 “울다”[φωνέω]는 “소리내다, 소리치다, 닭이 울다, 부르다, 불러내다, 외치다, 초대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통곡했다[κλαίω]는 “울다, 눈물을 흘리다, 슬퍼하다, 애통해 하다”라는 뜻입니다. 본문에서 닭의 울음은 잘못된 길로 가는 사람을 부르고 초대하는 소리이고, 잘못을 알고 깨닫게 하기 위해 불러내는 외침입니다. 베드로의 울음은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는 애통이며,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발길을 돌리는 다짐입니다. 닭은 베드로를 깨우치기 위해서 먼저 울었습니다. 닭이 우는 것은 베드로가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우는 것[κλαίω]과는 다릅니다. 닭이 우는 것은[φωνέω] 소리쳐 불러내고 초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어둠 속에서 절망하고 있을 때, 새로운 일을 계획했으나 두려움 때문에 우물쭈물 망설이고 있을 때, 닭이 홰치는 소리처럼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은 우리 안에 깊이 잠겨 있다가 우리를 부르고 초대합니다. 그 소리를 듣고 깨우치고 깨닫는 일은 우리의 몫입니다. 사람들이 각자위심(各自爲心)으로 치닫는 이 시대에 닭의 홰치는 소리가 필요합니다. “오늘 걷지 않으면, 내일 뛰어야 한다.”는 말로 지금도 열심히 뛰고 있는 서민들의 가랑이를 찢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는 닭의 울음소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 땅 이곳저곳에서 먼저 울고 있는 수많은 닭들의 홰치는 소리를 따라 함께 우는 닭이 됩시다. 내 마음을 깨우치고, 내 몸을 깨닫게 하고, 세상의 어둠과 악귀를 물리치고 신새벽을 알리는 닭이 됩시다. 

“아직도 어두움은 남았는데, 검은 껍질은 그냥 남았는데, 시몬의 가슴에 불을 지른 닭의 울음은 있어야겠는데, 너와 너희들은 아직도 잠이 들었는데, 너희들끼리의 세대는 껍질 속에 묻혔는데, 방탕과 허무에 불을 지른 예루살렘의 닭은 있어야겠는데, 밤을 울어 목이 터져도 모가지에 피가 엉켜 꽉 막혀 와도 내가 인젠 닭이 되어야겠다. 깨어나지 못한 이웃을 위하여 어두움에 눌려 있는 형제를 위하여 홰를 치고 우는 닭이 되어야겠다. 주여, 가슴 속 불을 울게 하소서. 피의 온도만큼 뼈의 빛깔만큼 진실하게 하소서. 시몬의 가슴이 되게 하소서.”<안병무>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는 서로에게 때로는 닭이 되어야 하고, 때로는 닭의 부름에 응답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갈릴리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 가르침과 배움, 선포와 행동을 함께 한 공동체였습니다. 이미 온 하느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함께 활동한 공동체입니다. 그들의 활동 중에는 성공적이라 할 수 있는 일도 있었고, 분명히 실패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함께 하는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한 사람 한 사람이 따로 있다면 실패도 절망으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함께 있다는 것은 그 실패의 순간에 위로와 용기를 주는 다른 사람이 있기에 공동체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으로서 우리는 연약하고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함께 여럿이 있기에 그러한 한계와 연약함을 서로서로 채우고 보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 제자들과 제자들의 관계가 바로 공동체의 그것입니다. 예수님이 모두에게 스승이 되는 지금, 우리는 서로에게 예수님(스승)이고 제자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이끌어주고 희망이 되어야 합니다. 

“줄탁동시(茁啄同時)”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벽암록』 제16측에 나오는 공안의 하나입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닭이 알을 품었다가 달이 차면 알속의 병아리가 안에서 껍질을 깨기 위해 쪼는데 이것을 ‘줄(茁)’이라고 합니다. 그 반대로 어미 닭이 그 소리를 듣고 밖에서 마주 쪼아 껍질을 깨뜨리려 하는데, 이것을 ‘탁(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행위가 때에 맞추어 ‘동시에’ 일어나면 병아리는 알을 깨고 세상에 나올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안팎의 두 존재의 힘이 함께 알 껍질에 작용될 때라야 비로소 병아리는 온전한 생명체로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모든 생명은 그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자신의 삶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혼자일 수 없습니다. 누군가와 함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향한 여정에서 위기의 순간에 힘이 되고, 공허한 순간에 존재의 의미가 되고, 절망의 순간에 용기가 되는 공동체입니다. 그 공동체가 있었기에 “당신과 함께 죽을지라도”라는 베드로의 맹세는 훗날에 그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임 당함의 자리에서야 이루어졌습니다.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갈 것이라”는 예수님의 약속이 있었기에 제자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굳은 결심과 예수님의 약속이 조화를 이루며 우리에게 함께 하기를 빕니다. 


지난 3월 5일(목)이 날씨가 따뜻해져 초목(草木)의 싹이 돋고 동면(冬眠)하던 동물이 깨어나며, 겨우내 땅 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벌레들도 꿈틀거린다는 절기인 경칩(驚蟄)이었습니다. 얼어서 닫혀 있던 우리의 마음에도 개구리의 놀람처럼 우리를 깨우는 거룩한 영의 역사가 함께 하시길 바라면서 기도하겠습니다. 

“비 소리에 겨울잠을 자던 개구리가 놀라서 깨어난다는 경칩입니다. 이웃과 이 땅의 일에 무관심하던 잠에서 깨어나게 하소서. 지금 이 순간순간이 우리의 아이들이 살아 갈 미래를 위해서 중대하고 심각한 때인지를 깨닫지 못하는 무지의 잠에서 깨어나게 하소서. 우리의 공동체 안팎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관심을 가지고 행동하게 하소서. 겨울동안 잠을 자며 쉬던 뭇 생명들이 경이로운 비 소리에 깨어나서 새롭게 주어진 삶에 경탄하는 때입니다. 눈 녹은 계곡 물소리에 버들가지가 놀라서 깨어나고, 봄바람에 땅 속에서 꿈꾸던 씨앗이 놀라서 싹을 틔웁니다. 모든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의 놀라운 은혜를 깨닫는 시간이 되게 하소서. 낡은 껍데기와 묵은 습성을 벗어버리고 우리 곁에서 언제나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또다시 놀라며 감격하는 믿음으로 살게 하소서.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역사에 대하여 놀라움으로 가득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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