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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2-1) - "잃은 양 한 마리 구하는 길" / 김진수 목사 > 사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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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해] 사순절(2-1) - "잃은 양 한 마리 구하는 길" / 김진수 목사

longbeach 2018-02-23 (금) 14:20 6년전 2715  

잃은 양 한 마리 구하는 길

2018225일 렘31:10-14/ 벧전2:18-25/ 15:1-10 사순절둘째주일

 

라이언일병 구하기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밀러대위는 2차 세계 대전 중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아 정예요원 7명과 함께 독일 점령지인 누빌로 갑니다. 세 아들을 한꺼번에 전장에서 잃고 절망에 빠진 어머니에게 마지막 하나 남은 아들, 독일 점령지에 투입되어 생사조차도 모르는 라이언 일병만큼은 살려서 데려오라는 사령관의 긴급명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8명의 용사는 묻습니다. “얼굴도 모르는 한 병사의 생명이 우리 여덟 명의 생명보다 더 가치가 있는 것인가?” “하나를 살리기 위해 8명의 대원을 사지로 내모는 것이 과연 정당한 일인가?” 그렇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그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셔서 우리를 구하실 만큼 우리가 그렇게 가치 있는 존재입니까?

오늘 말씀은 모두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백성을 찾는 이야기입니다. 예레미야서는 목자가 어린양을 찾듯이 타락한 이스라엘을 다시 찾아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을(31:10), 베드로전서는 친히 십자가에 달려 우리 죄를 속량하시므로 길을 잃은 양 같은 사람들을 영혼의 목자에게 돌아오게 하신 예수님을(벧전2:25), 누가복음은 잃은 양 한 마리 같은 죄인들을 찾아오신 예수님(15:3-10)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난 사순절 첫 주일에 예수님은 고난과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향한 길을 걸으셨다면 사순절 두 번째 주일인 오늘, 예수님은 길은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한 길을 걸어가십니다.

 

잃은 양 찾기(15:1-4)

 

양을 치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푸른 초장으로 맑은 물가로 양을 인도하고 먹이고 쉬게 합니다. 양 스스로 초장을 찾거나 스스로 물가를 찾아 걸어가 해갈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목자는 목숨을 걸고 맹수로부터 양을 지킵니다. 양을 스스로 자기 생명을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도망가지도 못하고 싸우지도 못합니다. 그뿐 아니라 목자는 잃은 양을 찾습니다. 본래 길을 못 찾는 것이 양이기 때문입니다.

길 잃은 양은 목자가 찾아내야 합니다. 목자가 찾지 않는데 양이 제 주인을 찾아오는 법은 없습니다. 목자가 찾지 않으면 양은 결국 길 잃고 헤매다 굶거나 실족해서 죽고 맹수에게 잡아먹혀 죽습니다. 스스로 생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목자가 안 찾으면 양은 죽습니다. 그래서 목자는 길 잃은 양을 기다리지 않고 찾아 나섭니다.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법은 없습니다. 심판 받아야 할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 죄책감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예 찾지도 않고 하나님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야 마음이 편하니까요.

목자는 그 양의 주검을 확인하기까지는 결코 중단하지 않습니다. 아직 살아 있다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어이 찾아내기 까지(15:4) 찾는 것입니다. 목자는 양이 완전히 죽었다는 확증이 없이는 포기하지 않듯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중단 없는 끝없는 사랑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죽음은 절망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향한 소망이 있는 사람만이 이 절망의 병을 이깁니다.

목자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들에 두고(15:4) 잃은 양을 찾습니다. 목자들은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저녁이 되면 양떼를 우리에 넣고 양의 수를 헤아립니다. 그리고 양을 잃어버린 것이 확인이 되면 양을 울안이나 동굴 속에 몰아넣거나 다른 목자에게 부탁한 후 잃은 양을 찾아 나섭니다. 양떼를 버려두는 무책임한 목자는 없습니다. 양들을 들에(ἐν τῇ ἐρμῳ) 두었다는 것은 아무렇게나 방치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ἡ ἔρμος)은 한적한 산지에 둘러 쌓여있는 안전한 우리나 목장을 의미합니다.(J. Jeremias, 예수의 비유, 허혁 역, 분도출판사, p128-129.) 나머지 99마리의 양을 안전한 곳에 둔 후에야 오직 잃은 양 한 마리를 찾는 일에 올인(all-in)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그의 관심, 그의 사랑을 오직 그 잃은 양 한 마리에게 쏟습니다. 그 순간 아흔 아홉은 없습니다. 거기에 정신 쏟으면 못 찾습니다. 한 마리 잃은 양이 그의 전부가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70억분의 일로가 아니라 단 하나의 유일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마침내 잃어버린 양을 찾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자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찾은 양 기뻐하기(15:5-8)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잃은 양 한 마리는 단순히 길 잃은 양(플라나오, go astray)이 아닙니다. 나쁜 길로 가다가 길을 잃은, 죄지은 나쁜 양이 아니라 주인을 잃은(아포룸미, lost) 불쌍한 양이라는 사실입니다. 집을 나가 아버지 재산을 탕진한 악한 아들이 아니라 죽었다가 다시 살아온 반갑고 소중한 아들입니다.(15:24) 목자가 잃은 양을 발견했을 때 화가 났을까요? 이 고생한 것이 분해서 큰 소리치고 때렸을까요? 아니죠! 어떻게 화냅니까? 갑자기 눈물이 나서 목을 끌어안겠지요! 기쁘고 감사했겠지요! 이것이 잃었던 것을 다시 찾은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오래 전 개척한 교회 예배당 가는 길에 목욕탕이 있었고 추운 겨울, 목욕탕 옆길에 있는 맨홀뚜껑 구멍으로 새벽마다 뜨거운 김이 새어나왔습니다. 어느 날 새벽기도마치고 오다보니 목욕탕 길 건너편에 사는 아주머니가 맨홀 뚜껑을 열고 막대기고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습니다.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무얼 찾으시나요?” “수십 년 끼고 있던 결혼반지요!” “어쩌다요?” “아침 일찍 수돗가에서 그릇 닦고는 허드렛물을 버렸는데 곁에 빼놓은 반지까지 쓸려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수십 년 낀 반지는 그냥 내 몸의 한 부분입니다. 만일 맨홀을 다 뒤져서 그 반지 다시 찾는다면 왜 이제야 내 눈에 띄었느냐고 화를 낼까요? 어떻게 화를 냅니까? 입이 귀에 걸리는 것이지요! 처음 소유했을 때보다 비교할 수 없는 감격이 몰려올 것입니다.

평창겨울올림픽 개막식에는 김정은 위원장의 동생 김여정이 건너와서 정상회담 카드를 꺼냈습니다. 그러더니 올림픽 폐막식에는 김영철 북한 노동당 중앙위 부위원장이 건너온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러자 그를 천안함 사건(2010) 주범이라고 지목하며, “한국 땅을 밟으면 사살할 대상이라고 반발하는 분들이 생겼습니다. 지금까지의 분단되었던 남북관계는 쉽게 아물 수 없는 깊은 상처가 자리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그를 환영해야 할까요? 아니면 반대하며 거부해야 할까요? 아니면 국민 정서상 대표를 교체해달라고 해야 맞는 것일까요? 그러나 오늘 말씀 읽으면서 마음이 정해졌습니다. 그래 환영하자! 크게 환영하자! 그들을 집나간 악한 자들, 지금까지 행한 못된 짓 꾸짖고 집에 들어오지 말라고 할 것이 아니라, 집 나갔다가 다시 돌아온 동생, 영원히 못 찾을 동생이 살아 돌아왔다고 휴전선 너머 건너온 것만도 감사하다고 손잡고 얼싸안아 주자고요! 저런 나쁜 놈하고 상면할 수 없다고 거부하면 다시는 쉽게 손 내밀지 못합니다. 이산가족처럼 형같이 누이같이 팔 벌려 안아준다면 그래서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물까지 북받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잃은 양 훈련하기(31:10-14)

 

이 세상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입니다. 저 이스라엘이 위치한 중동지역은 강대국들이 서로 격돌하는 고대역사의 중심지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사나운 맹수 같은 강대국 사이에 끼어있는 양 같은 백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의 먹잇감이었던 이스라엘을 건져내시고 가나안 거민을 몰아내셔서 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가나안에서 목자이신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고 강한 나라를 따를 때 사자와 이리 같은 강대국의 공격을 받아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양떼를 모으셨다가 다시 흩으셨습니다.(10) 사실은 모으시기 위해 흩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때가 되어(70) 이스라엘이 범한 죄악의 값을 다 지불하게 하신 후(속량/ 11) 그들을 앗수르에서 다시 져내셨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북 이스라엘을 건지시기 위해 악한 앗수르를 무너뜨리시고 다음에는 불의한 바벨론을 멸하셔서 그의 백성을 돌아오게 하십니다. ! 우리를 흩으시고 고난 속에 있게 하시는 것은 우리를 다시 모으시고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결국 마침내 모으실 것입니다. 통일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될 일이 아닙니다. 해야만 될 일입니다. 지금까지 나누어지게 하신 것은 더 온전히 견고하게 하나 되게 하시기 위한 한 과정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마지막 일은 다시 모으시는 일이 될 것입니다.

 

너를 구하고 나를 살리는 일(벧전2:18-21)

 

사환(oiketai)은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으로 잡다한 집안일을 맡아 하도록 고용주에게 고용된 사람입니다. 바울은 크리스천 사환들은 그들의 주인에게 두려워함으로 순종하고(18-19) 심지어 잔인하고 까다로운 주인에게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고 그에게 선을 행하라고 하십니다.(20) 놀랍게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구속의 사건이 크리스천 고용인들이 주인에게 순종하고 억울한 고통을 참고 견디며 자발적인 선을 행하는 일의 본이 되는 사건이라고 합니다.(21) 크리스천 사환들이 주인에게 복종하고 억울한 고통을 당해도 인내하며 오히려 선을 행하는 것은 굴종이 아닙니다. 기쁨으로 그들을 섬기며 다른 종들보다 진실하게 주인을 존경하는 것은 오히려 그들에게 참 사랑과 헌신의 본을 보여주는 일이요 그들을 구원하고 그들의 영혼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일입니다. 크리스천 사환들은 사람들의 종이 아닙니다. 그들을 폭력과 죄의 본성으로 대하는 주인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고 그들을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만드는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우리는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지 세상에 굴복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이 세상을 건져내고 구원해 내는 하나님의 사명자입니다.

 

라이언일병구하기의 마지막 부분이 감동적입니다. 특공대원은 천신만고 끝에 라이어일병을 찾았지만 그는 되돌아가기를 거부합니다. 특공대원의 말이 오래 남았습니다. “남겠다면 우린 그냥 떠나야죠. 하지만 우리도 여기 함께 남았다가 기적처럼 살아남는다면 나중에 이 지독한 혼란 속에서 라이언 일병을 구한 게 가장 잘한 일이라고 회상하겠죠. 대위님. 싸우고 이겨서 당당하게 집으로 돌아가요.” 감동입니다. 처음에는 억지로 라이언을 구하러 왔지만 이제 자신의 희생을 통해 자신만큼 소중한 사람들을 구하는 일에 자원하여 헌신하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맞습니다. 자신들까지 구한 것입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는 일은 바로 우리 자신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전도는 교인수를 불리는 일이 아닙니다. 그 사람을 구원하고 우리 자신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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