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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해] 사순절(5-1) - " 처음부터 들은 소식 " / 김은승 목사

관리자 2019-04-02 (화) 11:20 2개월전 163  

본문) 신 6:1-15, 요일 3:11-24, 요 13:31-35

 

요한복음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 계명은 ‘사랑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3:34)” 하고 말씀하시면서, 사랑하라는 것이 새로운 계명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말씀을 들으면서 ‘사랑하라’는 말씀을 계명이라고 생각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살인하지 말고 도적질 하지 말라 했던 십계명의 한 계명처럼, 사랑하라 하는 말씀을 계명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신 적이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대개 우리는 사랑하라는 것을 계명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랑이라는 말이 추상적이고 너무 포괄적인 단어이기 때문에 어떤 하나의 행위로 인식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계명으로 생각한다면 이 계명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지 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머리 속에 그림을 그려내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이미 사랑하며 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실천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새 계명이라고 하셨지만 새로운 말씀으로도 느끼지 않습니다. 이미 많이 들어와서 익히 알고 있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간 예수님께서 용서와 사랑에 대해 지속적으로 말씀해주셨기 때문에 익숙한 말씀입니다. 만약 우리들 입장이 아니라 당시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새로울까요? 그렇지 않을겁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율법의 핵심이라고 생각하고 있을만큼 ‘사랑하라’ 하는 말씀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도 새롭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사랑하라’고 하시면서 새 계명이라고 하셨을까요?

오늘 우리는 이 본문만 읽었지만 이 본문이 놓여있는 앞뒤 상황을 보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무게가 다르게 느껴집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마지막 만찬의 자리에서였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다음에 제자들 중 하나가 자신을 팔아넘길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의아해하면서 그가 누구인지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이 빵조각을 적셔서 주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 하고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는 가롯유다에게 "네가 할 일을 어서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을 배반할 제자와 한 식탁을 대하고 또 그에게 빵조각을 주신 다음에,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말씀이 바로 ‘사랑하라’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고난 당할 자신의 운명을 바라보면서, 또 그 고난의 매개자가 될 제자의 얼굴을 들여다 보면서, 예수님의 마음은 매우 괴로웠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디 그뿐이었겠습니까? 이 장면 다음에 이어지는 본문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자기를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가장 큰 제자까지도 자기를 부정할 상황을 예수님은 이미 보고 계셨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예수님께서 계명이라고 하시면서 주신 말씀이 ‘사랑하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간 예수님께서는 율법적 태도에 대해서는 거부반응을 보이셨습니다. 율법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강화시키고 완성시키기를 원하신다고 하셨지만, 바리새인들이나 율법학자들처럼 경직되고 말 그대로 ‘율법적’인 행위에 대해서는 배격하셨습니다. 그런데 굳이 ‘계명’이라는 단어까지 쓰면서 ‘사랑하라’는 것을 강조하신 것은, 당신 자신이 세상의 미움을 받고 버림을 받으셨기 때문에 그만큼 더 간절한 심정으로 서로 사랑하며 살기를 부탁하신 것이라 하겠습니다. 너무나도 쉽게 우리 입에 붙어있는 이 ‘사랑’이라는 단어가 지금 예수님의 마음에는 너무나도 소중하고 간절한 생명 같은 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계명으로서의 사랑은 사랑할까 말까를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그런 일이 아닙니다. 계명이기 때문에 무조건 사랑해야 합니다. 그 대상이 가롯유다와 배신자 베드로라 할지라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예수님은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산상수훈에서 ‘원수를 사랑하라’ 하는 말씀을 하셨을 때, 대개는 강조하기 위한 말씀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란 것이 드러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직접 원수 사랑을 보여주시면서, 아예 계명이라고 못박아 두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무조건 이 계명을 지켜야만 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새 계명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이미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요구하셨던 말씀입니다. 신명기의 본문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쉐마’ 즉 ‘들어라’ 하고 말씀하시면서, 모든 율법을 아우르는 강령을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주님은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당신들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신명기 6:4,5)”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웃사랑을 말씀하셨고, 모세는 하나님 사랑을 말했으니, 서로 다른 것이 아니냐고 물을 수 있겠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같은 말씀입니다. 요한1서의 말씀에서 알려주시는 바와 같이 형제 사랑은 하나님 사랑을 담보하는 일이요, 하나님 사랑은 형제사랑을 통해 드러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구약시대부터 하나님께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요한서신서의 기자는 이것이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예수님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들어온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말씀을 처음 듣는 것처럼 여기면서, 서로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실패해 왔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사랑을 알려주셨는데, 우리는 그 사랑이 내 안에 살아서 형제 사랑으로 가지를 뻗게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새 계명이라 하신 것은 이 명령을 처음 선포하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일관되게 주셨던 명령이었지만, 그리스도께서 자기 목숨을 바쳐 열어놓으신 새 시대에 새 계명으로서의 가치를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사순절 절기를 보내면서 우리는 사랑하라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기고, 손에 매어 표로 삼고, 이마에 붙여 기호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왜 사랑하지 못할까를 고민해 보았습니다. 요사이 매스컴에는 자기 자식을 유기하는 비정한 사건들을 연일보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가정 조차도 사랑의 보금자리로서의 역할을 상실하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아마도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변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오늘 쉐마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명령하기에 앞서 한 가지 단서를 제시합니다. 그것은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주님은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이 자리에 기록해 놓은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한 분뿐이라는 것은 참 중요한 말입니다.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말씀과 대비하여 유일한 신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다른 신이 없다는 것은 당연한 전제이기 때문에 한 분이라는 것은 다른 신들을 염두에 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인격적 관계를 맺고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주님이시요,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관계의 대상이라는 것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시각의 특징과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바라보실 때, 여러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로 보시지 않습니다. 각자 각자와 개인적 관계를 맺으시고, 세상에 둘도 없는 사랑의 대상으로 여겨주십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목숨을 버리신 것이 온 인류를 위한 것이라 하지만, 사실은 개인 한 사람 한 사람과 일대일의 관계를 맺으면서, 그 인생의 가치를 최상의 것으로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잃은 양 한 마리는 집단 속에서는 무시할 수 있는 숫자이지만, 예수님께서 맺는 관계 속에서는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소중한 실존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소중한 한 사람으로 여겨주시기에 우리도 하나님을 나의 가장 소중한 한 분 주님으로 인정하고 관계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뿐만 아니라 형제와 이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을 대신 할 수 있는 존재는 없기에 우리의 관계는 언제나 소중하고, 마음 깊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상을 상대화 시키고 여럿 가운데 하나로 여기는 유물론적 사고가 시작되면서 우리는 사랑을 잃었습니다. 선택할 다른 신들이 있으니 하나님 만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식이라 할지라도 원하지 않던 때에 태어났으니 그저 짐으로 여겨질 뿐입니다. 친구는 필요에 따라 언제라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어떤 조건과 기능을 갖춘 사람들 가운데에서 내 필요를 가장 충족시켜주는 사람을 선택해서 배우자로 삼았으니, 더 나은 조건을 갖춘 사람이 등장하면 언제든지 마음이 바뀌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절대로 사랑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존재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외적 조건과 기능에 대한 애정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녀를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소중합니까. 그가 어떤 자질을 가졌든 못 가졌든 그를 대신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이가 못된 짓을 했더라도 버릴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차라리 그 책임을 부모인 내가 지더라도 아이는 변함없이 내 자식입니다. 자식이 의사나 선생님이라고 해서 선생님 하고 부르는 부모는 아무도 없습니다. 자식이 세상에서 제아무리 잘나도 부모의 눈에는 그저 아들이요 딸입니다. 그 존재가 가지고 있는 외적인 조건은 부모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한 사람 아들일 뿐입니다. 다른 아들이나 딸이 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각자가 다 오직 한 사람, 사랑하는 아들이요 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보아주셨고, 또 우리도 하나님을 그렇게 보아주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리고 서로를 향해서도 그런 시각으로 사랑하며 살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은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시란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아십니까? 그저 믿음으로 확신하십니까? 불안해 하지 마십시오. 확인할 방법이 있습니다. 요한일서 3:14절 말씀에 “우리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우리가 형제자매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에 머물러 있습니다” 하고 알려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잘 지키면 복과 생명이, 그렇지 않으면 사망과 저주가 기다린다 하셨는데, 우리가 사랑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면 죽음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다고 성경은 참으로 일관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생명을 약속 받은 것을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당연히 어렵습니다. 나한테 짐만 지우는 형제가 있다면 이만저만 밉지 않을 것입니다. 내 희생은 알아주지도 않으면서 힘든 일은 요리조리 피해가는 형제는 형제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습니다. 분하고 억울합니다. 그 사람이 형제가 아니라 직장에서의 상사이거나 아랫사람이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남편이거나 자식이라 할지라도 내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때에는 밉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그 사람은 그 사람 나름대로의 관계 속에서 인정도 받고 존경도 받으면서 살아갑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의 실상을 몰라서 그렇다고 폄하하지만, 분명 그 사람 자체의 가치가 있음이 분명합니다. 

어쩌면 내 눈에 미운 사람은 내 기대와 맞물려 평가되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이 많습니다. 나를 힘들게 하니까, 나를 속상하게 하니까 미운 겁니다. 그렇게 따지면 예수님은 어떻게 가롯유다를 참아줄 수 있었겠습니까? 또 배신자 베드로는 어떻게 웃는 얼굴로 대해줄 수 있었겠습니까? 존재 자체의 가치를 먼저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배신의 한 가운데에서 사랑의 새 계명을 주셨던 예수님의 심정을 생각하면서, 한 분 하나님을 사랑하듯 형제를 사랑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힘들지만 문설주에 달아놓아서라도 잊지 않기를 바라시는 말씀이기 때문이라서도 따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살리려고 처음부터 들려주셨던 말씀이기에 믿고 따르십시오. 그 앞에 복에 있고 생명이 있을 것입니다. 말이나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참 제자로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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