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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1-2) - "예루살렘으로 향해 가는 길" - 김진수 목사 > 사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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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해] 사순절(1-2) - "예루살렘으로 향해 가는 길" - 김진수 목사

longbeach 2018-02-16 (금) 15:28 6년전 2576  

본문) 욜2:12-17/ 딤후2:11-13/ 9:51-62

 

사순절 첫째 주일입니다. 올 해는 설 명절과 함께 사순절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새해의 첫 마디란 뜻이며 서럽다’, ‘낯설다’, ‘삼간다()’는 뜻을 가집니다. 늙는다고 생각하면 서럽고, 새로운 시작이라면 낯설고, 새해를 신중하게 생각하며 시작한다면 삼가는 날이 될 것입니다. 본래 설은 설날부터 정월 대보름까지를 가리키며 우리 조상들은 이 기간 동안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속되고 부정한 일을 삼가고() 거룩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새 옷을 지어입고 멀리 떨어져 살면서 그동안 소홀했던 부모님과 어른들을 찾아뵙고 세배를 드리고 동네 이웃들과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으며 온 동네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즐거운 놀이를 즐기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생애 마지막을 보내시기 위해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하십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이 길은 예수님이 가시는 마지막 길이지만 동시에 이 세상을 새롭게 하며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새 역사, 새 나라의 문을 여시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가시는 길에서 이루어진 일들은 사순절을 맞는 우리에게 이 기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 것인지, 이 세상이 어떻게 절망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참 구원의 은총을 입을 수 있는 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북에서 찾아온 사마리아인들(9:51-56)

 

유대인들은 북쪽의 갈릴리에서 남부 예루살렘을 가려면 그 가운데 위치한 사마리아를 의도적으로 피해서 요단강 건너편으로 우회해서 다녔습니다. 유대인들은 동족인 사마리아인을 이방인처럼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제자들을 앞서서 보내셨습니다. 가다가 음식도 먹어야 하고 잠도 자야하니까요. 그러나 사마리아의 마을은 앞서간 제자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습니다. 음식도, 숙소도 내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이기 때문입니다. 성격이 급한 야고보와 요한이 즉각 반응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9:54) 그렇게 격분하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제자들은 사마리아를 그냥 지나치고 싶었지만 예수님이 원하셔서, 사마리아를 긍휼히 여기셔서 왔는데 사마리아는 그들을 오히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들의 분노 속에는 사마리아에 대한 그들의 숨길 수 없는 깊은 감정이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불을 명하여!” 사마리아인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당장 하늘에서 떨어지는 벼락에 맞아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조금만 건들어도 큰 생채기가 날만큼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분노와 미움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의 태도를 마치 마귀를 꾸짖듯이 준열하게 꾸짖으십니다.(어떤 고대 사본에는 55절 다음에 너희가 무슨 정신으로 말하는지 모르는구나 인자는 사람의 생명을 멸망시키러 온 것이 아니요 구원하러 왔노라 하시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인을 꾸짖으시는 것이 아니라 분노하는 제자들을 꾸짖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셔서 이루려고 하신 일이 원수들을 대적하고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미워하는 우리의 마음을 꾸짖으셔서 그들을 사랑하고 포용하는 평화와 화해의 나라를 이루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평창 동계 올림픽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번 동계올림픽에 북한이 선수단과 응원단, 예술 공연단을 대거 보내면서 남북 간의 대화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어서 반가운 마음입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사람들은 궁지에 몰린 북한이 한미 간의 관계를 이완시키고 국제적 고립으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전략에 우리 정부가 순진하게 따라가고 있다고 비난합니다. 어리숙하게 북한에 이용만 당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우리 국민 일부의 의견이어야 하지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하나님의 백성의 생각이어서는 안 됩니다. 전략이라도 좋지요. 만나서 이야기 하고 함께 손잡을 수만 있다면 감사한 일입니다. 항상 새로운 일은 함께 만나서 손잡고 이야기하다 풀리니까요! 아무리 우리 가슴 속에 동족상쟁의 상처가 깊은 앙금으로 남아있다해도 더 이상 그 상처에 붙들려 있으면 안 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대적이 아니라 아직도 상처와 분노로 서로 대적하는 자를 크게 책망하십니다. 나를 따르는 자들이여 나를 보라! 나는 하나님과 원수 된 사람을 대적하고 싸우려고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다! 고 하지 않으실까요? 사순절은 사마리아인을 포용하고 올림픽을 맞아 어렵게 우리를 찾아 온 북녘의 사마리아인들을 따뜻하게 사랑으로 감싸는 절기로 맞아야 하지 않을까요?

 

마음을 찢는 회개를(2:12-17)

 

이번 사순절에 주님은 우리가 참 회개함으로 주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주님은 예루살렘이 돌이켜 회개하기를 원하셨습니다.(23:37) 우리는 그동안 많은 회개를 해왔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대형집회에서는 항상 두 손 들고 통성으로 기도하며 눈물로 회개했습니다. 오래 전, 장로 대통령이 참석한 국가를 위한 조찬기도회에서는 예배 인도자가 무릎 꿇고 하나님께 통회하며 기도하자고 외쳤고 단상에 있는 분들까지 다 무릎 꿇었고 마침내 대통령까지 엉거주춤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런 그림을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본 적이 없습니다. 한국교회가 정말 회개하자고 많은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참 회개가 없었던 것일까요 여전히 한국 교회는 세상의 비난거리가 되었고 부패의 온상으로 지목되고 있으니까요! 우리의 회개에는 무엇이 부족한 것일까요? 그토록 큰 소리로 울면서 소리치며 회개하는데 회개의 열매는 없을까요?

요엘은 회개를 선포합니다. 오직 회개입니다. 무엇보다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께로 돌아가라(12)”고 합니다. 금식하고 울고 애통하는 것이 회개가 아니라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회개라는 것입니다. 금식과 애통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임재가운데 나아갈 때만이 참 회개가 이루어지니까요! 우리를 압도하는 분, 살아계신 을 만나야 마음을 바꾸고 돌이킵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해야 집으로 돌아가 모든 것을 팔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그 분에게 사로잡혀 마음을 돌이킵니다. 액자에 걸린 사자는 아무 영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사자가 우리 집 방 안에 있으면 어찌될까요?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서야 인간은 완고한 마음이 깨지고 새 마음으로 설 수 있습니다. 감히 두 마음을 품을 수 없습니다. 이사야처럼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야 자신의 입술의 죄를 고백하고 숯불로 정결하게 됩니다.

참 회개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는 진정성이 있어야 합니다.(13) 옷을 찢는다고 회개가 아니라고 하십니다. 회개는 마음이 찢어질 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절망한 사람이 회개합니다. 아무 소망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돌이킵니다. 자기 자신에게서 아무 의도 발견하지 못한 사람이 그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합니다. 죽음이 목전에 와 있는 위기 중에서 사람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합니다. 완전히 절망하든지 완전히 하나님을 의지하든지! 회개는 파선된 배를 조금 고치는 것이 아닙니다. 완전히 새 배로 갈아타는 것입니다.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소집하여 온 백성이 함께 통회 자복해야 합니다.(15) 장로들도, 젖 먹는 어린이도, 신랑 신부도 나오고 제사장들까지 나와서 회개해야 합니다.(16-17) 이런 날이 과연 올 수 있을까요? 온 교회가, 온 교단이, 온 나라가 저 니느웨처럼 통곡하며 회개할 날이 있을까요? 오직 단 한 번 가능할 수 있습니다. 오직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임하실 때입니다. 성령을 부어주실 때, 그 때 외에는 이런 회개는 꿈속에서나 가능한 이상일 뿐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님만이 이 땅에 참 회개와 부흥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밤마다, 새벽마다 이 민족과 교회위에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위해 기도할 때에만 온 교회가, 온 주의 백성이 어느 날 함께 눈물로 가슴 치며 회개의 눈물을 흘릴 날이 임할 것입니다.

 

나를 따르라(딤후2:11-13/ 9:57-62)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해 가실 때 예수님을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사람들도 있었지만(51-55) 주님을 따르려 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고 순종하는 삶을 사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우리의 결단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보십시오! 첫째 사람은 스스로 자원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 했습니다.(57) 그러나 주님을 따르려는 자신의 결단과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9:58)고 하십니다. 모든 것을 다 버린 사람, 포기한 사람만이 나를 따를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내가 의지하고 사랑하고 가까이 하는 모든 것을 포기할 각오가 안 되면 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둘째사람은 예수님이 따라오라 부른 사람입니다.(59) 그런데 그 사람은 먼저 가서 아버지를 장사한 후”(59)에 따르겠다고 말합니다. 장사지내는 일보다 더 급한 일이 있을까요? 공부하다가도 장사지내러 오고 결혼 날이라도 미루고 장사지내야 합니다. 그에게 주님을 따르는 일은 차선의 선택일 뿐입니다. 급한 일 먼저 한 후에 주님을 따르려고 하는 사람은 평생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날마다 급한 일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셋째사람도 자원하여 주님을 따르려 한 사람입니다.(61) 그러나 먼저 가족을 작별하려 합니다. 자신의 가족들을 양해시키고 정당한 작별의 과정을 거친 다음 주님을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의 동의를 구하고 양해하고 납득시킨 후 따르려고 하는 사람은 주님을 따르는 무리 속에는 영원히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여전히 양해를 구하고 있을 것이니까요! 뒤돌아보면 안 됩니다. 주님만보고 나가야 합니다.

오직 주님과 함께 죽은 사람만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딤후2:11-13)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이미 군인으로 징집된 사람이요, 운동장에서 운동시합을 시작한 사람(딤후2:3-5)입니다. 이미 돌이킬 수 없습니다. 주사위는 던져졌습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살고 주님과 함께 죽을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나라의 뱍성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죽고 우리 안에 주님이 살아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서 부터 사순절은 시작됩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은 편안한 길이 아닙니다. 부귀영화의 길도 아닙니다. 그 길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무덤으로 내려가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 좁은 길 끝에 부활이 있고 승리가 있으며 참 하나님 나라의 성취가 있습니다.

 

고대 올림픽은 성화 채화로부터 시작된다고 합니다. 전쟁을 중지하고 모든 주변의 도시국가 시민들이 경기장에 모입니다. 이 때 집에 간직하고 있던 소중한 불씨들을 다 끄고 옵니다. 그리고 새로운 불, 하늘로부터 받아 온 성결한 성화를 밝히고 경기를 했습니다. 전쟁대신 정정당당하게 경기의 룰을 따라 경주를 했습니다. 성화가 밝게 빛나는 동안 평화는 지속되었고 올림픽이 끝나면 참여한 모든 사람은 새 불씨를 받아 집으로 돌아와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이번 동계 올림픽에 모처럼 찾아온 북녘의 사마리아 동포들이 따뜻한 환대를 받고 평화 통일의 불씨를 받아가는 사순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한국교회가 통회 자복하고 하나님을 만나는 사순절,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셔서 오직 주님만을 따라 순종하는 사순절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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