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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5-1) - " 모든 영혼은 나의 것이다. " / 총회순교자기념주일 / 서재경 목사 > 사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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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해] 사순절(5-1) - " 모든 영혼은 나의 것이다. " / 총회순교자기념주일 / 서재경 목사

관리자 2026-03-20 (금) 10:00 11시간전 13  

본문) 겔 18:1-4, 21-32, 눅 23:39-43, 갈 2:15-21


석가모니가 수행하는데, 독수리에게 쫓기던 참새 한 마리가 황급하게 품에 날아들었습니다. 독수리는 참새가 제 거라며, 내놓으라고 했지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수행자가 품에 날아든 생명을 내줄 수는 없지요. 석가모니는 참새 무게만큼 자기 살을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뭐 이 정도면 독수리도 손해 볼 게 없지요? 협상이 원만하게 타결되어서, 천칭(天秤)을 놓고 한편에 참새를 올렸습니다. 참새는 20g 정도밖에 안 나가지요. 참 가벼운 새입니다. 석가모니는 넉넉하게 살을 베어서 반대편에 올렸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저울이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살을 좀 더 올리고 또 올려도 저울은 요지부동입니다. 할 수 없이 석가모니가 저울 위에 올라앉았지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제야 저울이 서서히 움직이더니, 마침내 수평을 이루었답니다. 무슨 얘기일까요? 모든 生命의 무게는 다 ‘똑같이’ 무겁다. 생명은 귀하고 또 귀하다, 그 말씀입니다. 불교의 모든 가르침의 알짬이지요. 어디 불교뿐이겠습니까? 모든 宗敎의 가르침(敎)의 우두머리(宗)가 바로 ‘生命 敬畏’입니다.


“모든 영혼은 나의 것이다!” 오늘 우리가 에스겔서에서 들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은 이 말씀을 함께 마음 깊이 새겼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영혼’은 나의 것이다!” 먼저, 여기서 ‘영혼’이라고 번역한 히브리말은 ‘네페쉬’(נפשׁ)입니다. 목숨, 영혼, 생명, 존재라는 폭넓은 의미를 지닌 말이지요. 중요한 것은, 分離되는 어떤 한 部分이 아니라 全部, 온새미로 ‘全存在’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창세기 2장 7절에 보면,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했지요. 이 ‘생명체’가 바로 ‘네페쉬’입니다. 이 말은 구약성서에 750회가 넘게 나옵니다. 그러니까 ‘모든 영혼은 나의 것이다’ 이 말씀은, 내 部品 중에 ‘영혼’만 하나님의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나의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다’, ‘나는 온전히 하나님의 것이다’, 더 나아가 ‘모든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다’, 그 말입니다. 나는, 우리는, 모든 생명은 오롯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나는 오롯이 하나님의 것이다.’ 참 귀한 말씀입니다. 나는 참으로 귀하고 귀한 존재라는 말씀이지요. 하나님이 지으셨는데, 세상에 이보다 더 귀하고 값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정말 귀합니다. 참으로 소중합니다. 나의 영혼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이 진실, 내 생명이 참으로 귀하다는 이 진리를 깨달아 아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의 始作이요 根本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마가복음 8장 36절) 하셨지요. 내 생명은 천하보다 귀합니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天上天下에 唯我獨尊입니다. 

그런데, 내 생명이 하나님의 것이고, 내 생명이 天下보다 귀하다면, 그것을 깨달아 안다면,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마땅히 내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고, 귀하게 살아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아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 이것이 나의 生命의 召命입니다. 오늘 우리가 받은 에스겔서 18장의 말씀은 바로 이 ‘생명의 소명’을 말합니다.


에스겔은 속담 하나를 화두로 삼고 말문을 엽니다.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으면, 아들의 이가 시다.” 바로 이 속담입니다. ‘속담’은 그 시대의 사람들의 세태를 짧은 문장으로 기막히게 짚어내지요. 그렇다면 이 속담이 풍자하는 사람들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스스로 자기 삶을 책임지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남 탓’입니다. 내 이빨이 시린데, 이게 내가 아니라 아버지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내 가족이 불행한데 그게 내가 아니라 부모 탓이다, 자식 탓이다, 그놈 탓이다, 그렇게 내 책임을 바람개비처럼 빙빙 돌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탓하며 불평하고 원망하고 분노하는 것이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정의가 바닥에 떨어지고, 거짓이 판을 치고, 민심은 흉흉하고, 미래는 불안하고, 마음은 각박하고, 살림은 팍팍한데, 그게 다 조상 탓이고, 운세 탓이고, 그게 다 반국가세력 탓이라고 떠넘겼습니다.

에스겔은 구체적 실례를 들면서 뭐가 문제인지 깨우쳐줍니다. 어떤 사람이 법과 의를 실천하며 살았다면, 진실하게 살았다면, 그는 의로운 사람이니까, 그는 반드시 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낳은 아들이 아비와는 정반대로 개망나니로 살았다면, 그 아들은 어떻게 될까요? 의로운 아비의 덕으로 선처받을까요? 아니랍니다. 그는 절대로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그가 아들을 하나 낳았는데, 그 아들은 아비와 달리 하늘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바르게 살았다면, 그는 또 어떻게 될까요? 의롭게 살았지만, 악한 죄인의 자식이니까, 벌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아니랍니다. 아비의 죄와 상관없이 그는 반드시 산다는 것입니다. 에스겔은 ‘반드시’라는 말로 거듭 강조하면서, 의롭게 산 그 사람은 살 것이고, 악하게 산 그 사람은 죽을 것이라고, 엄중하게 선포합니다. ‘아버지’가 의롭게 살았든 악하게 살았든 상관없이, 아들은 그 ‘아들 자신’이 의롭게 사느냐 악하게 사느냐 따라서, 죽고 산다는 것입니다.

에스겔은 이렇게 3대에 걸친 父子間의 사례를 든 다음, 21절부터는 한 사람의 일생을 예로 들면서 ‘個人’의 책임성을 더욱 강조합니다. 어떤 한 사람이 악하게 살아가다가, 어느 때에 이르러 회개하고 착하게 살았다면, 그는 어떻게 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악인이었는데 돌이켜서 의인이 된 사람,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가 지은 죄와 의를 저울에 달아보고 판결해야 공평하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의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신답니다. 또 반대로, 참 의로운 사람이었는데, 살다가 변해서 악하게 살았다면, 의인이었다가 악인이 된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은 그의 의를 전혀 기억하지 않으신답니다. 그 사람이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가 아니라, 그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사느냐 죽느냐 하는 것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天秤에서 가장 무거운 것은 ‘회개’입니다. 

 

오늘 우리는 누가복음에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한 ‘죄인’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본문을 좀 살펴보면, 누가복음은 다른 복음서와 두 가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두 사람이 있었지요. 누구입니까? 마가복음은 그들을 ‘강도’라고 합니다. 마태복음도 마가복음을 따라 ‘강도’라고 하지요. 그런데 누가복음은 그들을 (‘죄수’‘죄인’ 또는 ‘악인’)라고 부릅니다. ‘강도’라는 특정한 죄목을 포괄적인 의미의 ‘죄수’로 일반화했습니다. 둘째로,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서는, 두 강도가 다 예수님을 모독합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는, 한 죄수는 비난하지만, 다른 죄수는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으냐고 그를 나무라면서, 주님 나라에 들어갈 때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누가복음은 먼저 기록된 마가복음을 자료로 삼았는데, 왜 ‘강도’를 ‘죄인’으로 일반화했을까요? 또 왜 누가복음은 한 ‘죄인’이 구원받는 모습을 부각했을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속 시원하게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누가복음은 이 ‘용서받은 죄인 이야기’에서, 우리에게 뭔가 중요한 것을 보여주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죄인’ 한 사람을 찾으시고, 그 한 사람을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시고, 한 사람을 잊지 않으시는 예수님입니다. 다른 복음서도 그렇지만, 특히 누가복음은 죄인 한 사람을 찾으시고 그 한 사람을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톺아서 보여줍니다. 

누가복음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서, 소아시아와 그리스와 로마에 이르기까지, 저 땅끝에 이르기까지, 온 세상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 선포되는 원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봅니다. 그런데 그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는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온 인류의 구원은 어디서 시작되어야 하겠습니까? 누가복음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잃어버린 한 사람의 구원’에서 시작됩니다. 아흔아홉 마리 양을 들판에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기까지 찾는 목자처럼, 예수님은 한 사람을 찾고 또 찾으십니다. 그리고, 그 고통스러운 마지막 십자가에서도, 예수님은 ‘죄인’ 한 사람을 보시고, 그 한 사람을 용서하시고, 그 한 사람을 구원하십니다. 예수님은 고난의 십자가에서 한 죄인에게 낙원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합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먼 훗날’이 아니라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렇다면 이 죄인은 그날, 그 십자가의 날에 구원받았습니다. 이 ‘죄인’은 십자가의 예수님에게 구원받은 ‘첫 사람’인 셈이지요. 이 죄인은 뭘 했기에 낙원에, 하나님 나라에, 그것도 예수님과 함께 들어갔을까요? 무슨 대단한 善行을 했나요? 아닙니다. 사형 선고를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힌 죄수가 무슨 선한 일을 했겠습니까? 그는 어쩌면 평생 잘못 살았을 게 뻔합니다. 이제 곧 죽을 테니, 개과천선할 기회도 없지요. 그의 손과 발은 십자가에 못 박혀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할 수 없는 죄인’이니, 그저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은총을 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죄인’이 십자가에서 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그 마음과 생각을 바꾼 것입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돌이켜 회개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하나님 두려운 줄’ 깨달아 알았습니다. 그는 다른 죄수에게 ‘너는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으냐’고 나무랐지요. 여기서 ‘두려워한다’(ϕοβεω), 이 말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50여 회나 쓰이는,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사도행전 2장 43절) 그것이 바로 ‘신앙’의 알짬입니다. 특히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곧 ‘신앙인’을 말합니다. 

하나님 두려운 줄 알게 된 이 ‘죄인’은 예수님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무슨 짓을 했습니까? 병정들은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의 옷을 제비뽑아 나누었지요. 辛苦를 겪고 있는 사람에게 신 포도주를 들이대며 조롱했습니다. 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은 어디 저 자신이나 구원하나 보자며 비웃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머리를 흔들며 혐오했고, 함께 달린 죄수조차 모독했습니다. 사람에게, 고통당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요? 그들은 그 고통당하는 사람에게 하는 그 참담한 짓이, 그게 바로 그 사람의 영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짓이라는 것을 알기나 했을까요? 그들이 조롱하는 그 ‘고통당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그들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한 사람의 ‘죄인’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고통에 共感했습니다. 

사실, 세상 그 누가 자신의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받을 뿐이지요.(갈 2:16) 생각해 보면, 에스겔이 말했던 ‘의로운 사람’도 그리 대단한 특별난 의인이 아닙니다. 모든 생명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기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에 공감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굶주린 사람을 보고 마음이 짠해서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사람을 보니 등골이 서늘해서 입을 것을 주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가난한 사람의 영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진정한 제물’을 드렸습니다. 사람에게 함부로 하지 않고, 모든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 그것이 바로 모든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지요. 두려워하는 마음, 그것이 바로 믿음이요 사랑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은 어떨까요? 에스겔은 그 시대의 세태를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으면, 아들의 이가 시다’, 이 속담으로 짚어냈지요.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떤 속담이 어울릴까요? 어쩌면,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어도, 아들의 이는 끄떡도 없다!’ 이런 시린 속담이 아닐까요? 에스겔의 속담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함부로 살아가면서 스스로 책임지지 않고 남 탓하는 세태를 꼬집었지요. 그렇지만, 그래도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共感은 하고 있습니다. 왜 다른 사람이 설익은 레몬을 먹으면, 나도 이가 시린 듯 몸서리치며 저절로 침샘이 터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의 세태는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의 슬픔과 아픔에 도무지 전혀 共感하지 못하는 無感과 斷切, 그것이 아닐까요?

지난주에 술에 약을 타서 다른 사람들을 살해한, 흉악한 범죄자의 얼굴이 논란 끝에 공개되었습니다. 이제 스무 살밖에 안 된 여자아이가 남자들에게 같이 술 먹자고 만나서, 약 탄 술을 먹였답니다. 그걸 먹여보면서, 얼마나 타야 죽는지 검색했다지요? 그렇게 여럿을 기절시키고 두 명을 살해했답니다. 왜 그랬을까요? 어째서 같이 즐기자며 사람을 죽였을까요? 돈? 원한? 쾌락? 그걸 잘 모르겠답니다. 사람을 살해하면서도, 먹을 걸 잔뜩 시키고, 남은 건 검정 비닐에 싸서 가져가고, 도무지 그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게 도대체 뭘까요? 수사를 통해 더 밝혀지겠지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이 아이는 다른 사람과 공감할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이 황폐하고 무참한 마음을 ‘사이코패스’라 하지요. 사람의 영혼을 좀먹고 파괴하는 무서운 질병입니다.

그런데, 이 참담한 사건은 한 ‘사이코패스’ 병자가 저지른 하나의 사건에 그치는 것일까요? 아니지요? 이미 ‘사이코패스’는 한 개인의 질병을 넘어서, 우리 사회의 돌림병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중동 이란 전쟁은 사이코패스의 집단 광란과 같지 않습니까? 수많은 사람이 처참하게 죽어 나가도 아랑곳하지 않는 얼굴, 참혹한 전쟁의 지옥문을 열고도 무슨 평화의 사도인 양 기고만장하는 얼굴, 이 阿鼻叫喚 중에도 자기 이익만을 계산하기 바쁜 얼굴들, 이것이야말로 사이코패스의 얼굴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미사일 버튼을 그저 게임기처럼 눌러대는, 그 무심한 손가락들은 또 얼마나 서늘합니까? 그런데 이런 사건과 전쟁이 어쩌면 앞으로 온 세상이 앞다투어 펼쳐나갈 이른바 AI 시대의 서막이라면, 얼마나 섬뜩하고 얼마나 끔찍합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 시대는 어떤 사람이 필요할까요?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우리 시대의 회개는 무엇이어야 하겠습니까? 하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 절실하지 않을까요? 내 생명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아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 너의 생명 또한 하나님의 것임을 알아 존중하고 사랑하는 사람, 모든 생명이 하나님의 것이기에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나타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긍휼하신 마음에 共感하며, 다른 사람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고 기쁨을 함께 기뻐하는 마음, 그 가난한 마음으로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이 깨어나야 합니다. 무심하고 파괴적인 기계신(器械神, deus ex machina)을 숭배하는 좀비들이 아니라, 측은지심(惻隱之心)을 지닌 사람의 딸과 아들들이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따뜻하고 행복한 미래를 열어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하나님 두려워하는 마음을 깨달아 알 수 있도록, 지금 우리가 돌이켜서 ‘돈과 함께’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가 오늘 예수님과 함께 파라다이스에서 살아가도록, 성령께서 우리의 영혼을, 우리의 생명을 은총으로 감싸 지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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