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 11:45~54
1. 부활의 전조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중심인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 죽음으로 몰아간 사건은 예루살렘에 가기 직전 베다니에서 일어난 한 기적이었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일입니다. 예수님과 평소에 가깝게 지낸 제자라고 할 수 있는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의 오빠인 나사로가 젊은 나이에 죽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예수님이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의 집을 방문했을 때는 이미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난 때였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병약해도 숨이 붙어 있으면 혹시라도 다시 살아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게 됩니다. 그러나 일단 숨이 넘어가서 죽은 다음에는 어떻게 달리할 도리가 없기때문에 죽음의 현실을 인정합니다. 평소 예수님을 신뢰하던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이 조금 더 일찍 오셨다면 오빠가 죽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과 약간의 원망 섞인 울음을 터뜨립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아무리 예수님이라도 이미 죽은 지 나흘 되는 시신을 다시 살리신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현실 인식이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울고 있는 자매를 향해 놀라운 선언을 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한 11:25~26)
그리고는 이미 나흘 동안 무덤에 묻혀 있는 나사로를 불러냅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죽었던 나사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에 응답해서 무덤을 열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기적을 바라보면서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것은 이 세상 모든 생명의 권한은 창조주 하나님께 있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같은 권한과 능력을 부여받은 분이라는 것을 세상에 보여준 것입니다. 나아가 예수님 본인도 십자가에 달려 죽겠지만 죽음에 갇혀 있지 않고 부활함으로써 생명의 주관자이고 예수를 따르는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소망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준 사건입니다.
2. 선행에 대한 악의 대응
요즘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준 사건은 대통령실 시민사회수석이 MBC 언론을 향해서 잘 들으라고 하면서 1988년 경제신문 기자가 압구정 현대아파트에서 허벅지에 칼 두 방이 찔렸다고 말한 사건입니다. 1988년 중앙경제신문 오홍근 기자가 군사 문화에 대해서 비판적인 칼럼을 썼는데 이에 대한 앙심을 품고 육군정보사령부대 장군의 지시에 따라서 현역 부대원들이 오흥근 기자를 습격해서 회칼로 허벅지를 찌른 테러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있어서도 안 되고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오점입니다. 결국 당시 군부독재 정권이라 하더라도 이를 실행한 현역 군인 7명을 처벌했습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 대통령실의 시민사회수석이 공영방송인 MBC를 향해서 이 사건을 상기하는 끔찍한 경고를 했다는 믿을 수 없는 언행이 벌어졌습니다. 이 말을 한 뒤 시민사회수석은 농담이라고 했고 사과했다는데 참 어이없는 일입니다. 민주사회의 근간은 언론의 자유입니다. 내 의견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고 또 상대방의 의견을 경청하는 것이 민주사회의 근본입니다. 이것이 무너지면 독재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언론은 해직되고 구금되고 폭행당하면서 이 언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근래 입틀막(입을 틀어막았다)이 유행입니다. 권력이 싫어하는 말을 하면 국회의원이든 학생이든 시민이든 심지어 공적 언론사까지 입을 틀어막으려 하고 시민사회수석이 칼로 테러하겠다는 의미를 담은 말을 한다는 것은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엄정하게 처벌해야 합니다. MBC는 그동안 현재 여러 언론 중에서 정론을 전달하기 위해서 최고 권력과 각을 세우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언론의 자세입니다.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은폐된 진실을 밝혀내고 특별히 힘없는 서민들보다 권력을 가진 이들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 그래서 그 권력의 비리를 밝히고 예방하는 것이 언론의 기본 사명입니다. 현 정부에서 MBC가 그래도 제일 잘하고 있는 언론입니다. 이런 언론은 우리가 지지하고 응원하고 격려하고 상을 줘야 합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끔찍한 경고와 공포였습니다. 여러 가지 불이익이 뒤를 따라옵니다. 대통령 해외 순방 비행기에 MBC 기자만 탑승하지 못하도록 불이익을 주거나 여러 가지 핍박을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죽었던 나사로를 살렸습니다. 엄청난 사건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힘든 사람을 격려하고 아픈 사람을 치료하고 나아가서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은 당연히 칭찬과 격려를 받아야 할 선행입니다. 그러나 당시 종교 권력자들은 예수님의 선행에 대해서 전혀 반대되는 대응을 했습니다.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요한 11:53)
선행하고 표창이나 칭찬을 바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최소한 그 선행에 대해서 악으로 갚아선 안 되는 겁니다. 내가 선한 일을 했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비웃거나 가짜 뉴스를 만들어서 모욕하고 공격하고 폭언하고 폭행을 한다면 그것은 아주 잘못된 세상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생명을 살리고 평화를 만들고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뜻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이웃과 사회와 역사를 사랑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죽어 있는 나사로를 살렸습니다. 예수님이 칭찬받는 걸 원한 것도 아니고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기 위해서 한 것도 아닙니다. 그저 사람을 살리는 사랑을 실천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을 향해서 돌아온 것은 테러 위협을 넘어서서 죽임의 위협이었습니다. 예수님 정말 놀라고 또 절망했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는 두려워했을 겁니다. 예수님은 힘도 없는데 경호원도 없는데 보호막도 없는데,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현실 권력을 내세워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한다니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3. 부조리한 현실 앞에서
대제사장과 바리새파라는 현실 종교 권력과 부딪힐 수밖에 없는 예수님은 이 현실에 어떻게 대응했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예수께서 다시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거기를 떠나 빈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와서 제자들과 함께 머무르시니라. (요한 11:54)
에브라임은 이 사건이 있었던 베다니와 예루살렘으로부터 북쪽으로 떨어져 있는 한적한 곳이었습니다. 거의 광야에 가까운 마을, 예루살렘은 대도시고, 그 옆에 베다니는 위성도시 같은 곳이라면 에브라임은 동떨어져 있는 곳입니다.
티솟, 에브라임으로 가는 예수님, 22*15cm, 1896년,
뉴욕 브루클린 미술관
프랑스 화가 티솟이 에브라임으로 서둘러 가고 있는 예수님 일행을 그렸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한적한 곳 에브라임으로 떠나오고 있습니다. 지나온 저 멀리 뒤로 산과 들만 보입니다. 집‧건물‧사람‧사건‧풍요‧쾌락‧질투‧음모 가득한 도시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향하는 곳에는 돌밖에 없습니다. 돌‧바위‧흙뿐인 곳을 향해서 예수님이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깁니다.
일행 중 가장 열심인 사람은 바로 예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보다 체력이 더 좋거나 제일 젊거나 산을 잘 타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예수님이 제일 앞장섭니다. 어떤 제자들은 저 뒤에서 헉헉거리며 따라오고, 더 뒤처져서 이 화면에 등장하지 않는 제자도 반이나 됩니다. 그만큼 예수님은 이 길의 의미와 목적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나사로를 살리는 놀라운 기적을 행하여 사람들이 놀라고 칭송하는데, 왜 굳이 거기를 떠나서 이 고생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을 겁니다. 나사로를 살린 후 거기 있으면 사람들이 환대하고 편하게 지닐 수 있는데 왜 예수님은 거기서 빠져나와 이렇게 산 넘고 물 건너 아무것도 없는 촌구석으로 우리를 데리고 힘들게 가시는지 하는 원망과 불만이 화면에 묻어나 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앞장서서 광야와 가까운 한적한 마을로 갑니다. 이 부조리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 한 발 후퇴합니다.
가끔 우리 삶에서 현실에 매몰되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치‧경제‧사회‧관계 등 여러 가지 일에서 때로는 자신을 분리해서 객관적으로 돌아보면서 스스로 정리해야 합니다. 한 발짝 떨어지는 이 거리(距離)가 중요합니다. 물론 사회 현실과 담을 쌓고 관심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무책임한 자세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관점을 생각하지 않은 채 현실에 녹아 들어가 버리면 그것은 또 다른 불행을 가져옵니다. 거리(距離)의 아름다움을 회복할 때입니다.
오늘 예수님도 한 발 떨어져 거리를 두었습니다. 정치‧경제‧문화‧종교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예수님이 아주 가까운 베다니에서 놀라운 기적을 행했고,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그 힘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진격하는 것이 효과적인 전략일 텐데 예수님은 한 발을 떼서 전혀 다른 방향인 에브라임으로 가셨습니다. 현실에 참여하되 적정한 거리를 만드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루살렘은 관광이나 사람들 만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죽으러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적절한 때에 나 자신을 객관화시킬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사람이 붙어 다니면 힘들어집니다. 연애와 결혼의 차이는 연애는 적절하게 만나는 것이지만, 결혼은 같은 집에서 가깝게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리가 없어질 수 있습니다. 적당한 거리가 무너지면 오히려 관계가 파괴되기도 합니다.
사순절은 한발짝 물러서서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내 신앙을 차분하게 비춰보는 시기입니다. 이 과정이 우리에게 깊이를 만들어 줍니다. 거리의 아름다움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