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막 11:1~10, 삼하 6:12-19, 히 12:18-24
시작하는 이야기
1. 오늘은 사순절 여섯째주일이자 종려주일입니다. 오늘부터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교회력으로서는 참으로 중요한 주간이자, 우리 주님을 믿는 크리스챤으로서는 의미있게 지내야 하는 하루하루입니다.
2. 사순절의 마지막 주간에 주님의 말씀과 십자가를 묵상하며 부활의 주님을 기대하고 고대하면서 부활의 기쁨을 모든 가족들과 교우들이 나누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3. 예수님의 삶 자체가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행적 자체가 말씀이고, 예수님의 생각 자체가 우리가 영접해야 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2-3년의 마지막을 보내게 되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과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행적은 이 시대 속에서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할 우리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이자 외침이요, 권면입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1. 그때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우리 주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기 전에 두 번이나 수난예고를 합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붙잡혀서, 고난을 당하고 모욕을 당하여 끝내는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 말씀하셨고, 사흘 후에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주님의 수난예고를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2.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십니다. 마지막 사역의 공간이자 결전의 장이 될 예루살렘을 올라가시는 예수님의 얼굴은 비장했을 것입니다. 흔들림이 없는 모습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보다 앞장 서서 가셨습니다. 담담하게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올라가셨습니다.
3. 보통 때와는 다른 모습과 몸에서 우러나오는 힘으로 제자들은 놀랐습니다.(막 10:32) 뒤따라 가는 사람들은 두려워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한 번 더 말씀하십니다. “보아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넘어갈 것이다. 그들은 인자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이방 사람들에게 넘겨줄 것이다. 그리고 이방 사람들은 인자를 조롱하고 침 뱉고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흘 후에 살아날 것이다. ” 그러나 제자들은 이 예수님의 말씀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원래의 예루살렘
1. 예수님이 올라가시는 예루살렘,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시간을 보내게 될 예루살렘, 십자가의 싸움을 해야 할 것을 마음 속 깊은 곳에 결단하고 올라가시는 예루살렘은 거룩한 성,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성이었고, 성전이었습니다.
2. 다윗왕은 이스라엘 전체를 통일하고 왕이 되었을 때, 여부스 사람들이 살고 있던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기로 결정을 합니다. 예루살렘 산성을 점령하고 나서 그 산성에 살면서 다윗성이라고 불렀고, 성을 쌓았습니다. ‘만군의 주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다윗이 점점 강해졌다“고 합니다.(삼하 5:9)
3. 두로왕 히람이 다윗에게 고급 나무인 백향목과 석수와 목수를 보내어 다윗에게 궁궐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때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이 번영하게 될 것을 깨달았습니다.
4. 그런데 다윗왕에게 한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성전이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법궤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상징의 법궤가 빠져 있었습니다. 그때 법궤는 전에 법궤를 옮기다가 죽는 일이 있었기에, 이방인 오벳에돔의 집에 있었는데, 오벳에돔의 집이 법궤로 인해 축복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윗왕이 기쁜 마음으로 가서, 법궤를 다윗성, 예루살렘으로 옮겼습니다.
5. 우리나라에는 삼보일배가 있는데, 다윗은 육보일배, 주님의 법궤를 옮기는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옮겼을 때, 행렬을 멈추고 소와 살진 양을 제물로 잡아서 바쳤습니다. 더욱 대단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법궤,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가 올라올 때, 왕이었던 다윗은 너무 너무 기뻐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습니다. 너무 기뻐 옷이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춤을 추었고, 사람들에게 빵과 고기를 나누며 잔치를 했습니다.
6. 법궤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게 되었을 때,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엄숙하고도 장엄한 법궤의 예루살렘 입성이었습니다. 이때부터 하나님의 범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예루살렘은 거룩한 도시가 된 것입니다. 거룩한 성전이 있는 거룩한 곳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거룩한 곳이었습니다. 세상과 다른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거룩한 땅이었습니다.
7. 하나님만이 경배의 대상이 되는 거룩한, 구별된 도시가 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경배의 대상이 되는 예루살렘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전적인 주인이 되는 땅이었습니다. 그러하였기에 하나님은 그 예루살렘의 주인이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과 늘 함께 하였고, 복을 주셨으며, 이스라엘 민족을 지키시는 능력이었습니다.
변질된 예루살렘
1.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그 거룩한 도시는 변질이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꽃이 떨어지면 추해지듯이, 거룩한 도시가 추해지니 더 이상 거룩한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그곳에서 성전을 섬기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종교지도자들이 세상의 물질과 권력의 맛에 길들여지니 인간탐욕이 지배하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2. 종교적 권력으로 인하여 냄새가 나는 재물이 흘러 넘쳤고, 세상의 성공을 위해 권력 다툼과 음모가 있는 도시가 되어갔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경건의 모양은 있는데, 그 능력이 없는 곳이 된 것입니다. 예배의 형식은 남아있지만, 그 진리와 핵심은 공허해진 껍데기뿐이었습니다.
3.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야 하는 곳에 세상의 영광이 빛나는 곳이 되었고, 세상의 영광을 위해 의롭게 살아가는 삶을 외면하고, 의로운 사람들이 오히려 고난을 받아야 하는 회칠한 무덤과 같은 곳이 된 것입니다.
4. 예루살렘 성전에서 경배의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찬양과 영광을 받아야 할 경배의 대상은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재물과 권력 그리고 탐욕이 세상을 지배하게 되자, 경배의 대상이 바뀐 것입니다. 하나님이 경배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데,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경배의 대상은 재물이었습니다. 그들에게 경배의 대상은 권력이었습니다. 그들에게 경배의 대상은 쾌락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배금주의 mammonism는 강력한 신이었고, 세상의 성공을 여는 부정한 열쇠였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1.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하며, 거룩해야 하는 예루살렘이 가장 거룩하지 않다는 것을 아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예루살렘 가까이에 오셨을 때, 거룩해야 하는 예루살렘이 거룩하지 않은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마음이 아프셔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눅 19:41) 하나님이 계셔야 하는 성전에 인간의 권력과 재물이 가득한 것을 보시고 마음 아프셨던 것입니다. 땅바닥에 떨어져 짓밟히고 있는 생명의 예배와 삶의 윤리를 보시고 마음 아프셨던 것입니다.
2. 위선적인 세력들과 거짓 세력들이 판을 치는 예루살렘을 무너뜨리고, 진정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고, 하나님이 경배를 받으시는 세상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셨습니다. 제자들보다 앞장 서서, 흔들리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입성하셨던 것입니다.
3. 예수님은 그 예루살렘을 심판하고 무너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거룩한 성 예루살렘의 회복을 위함이었습니다. 새 건설을 위한 창조적 파괴였습니다. 모든 것을 제자리에 회복시키기 위한 예수님의 결단이었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위한 주님의 간절한 마음이었습니다. 세상 어느 곳에서든지, 어떤 시대이든지 인간의 탐욕으로 만들어질 수 있고, 변질될 수 있는 세상의 예루살렘은 다시 거룩하게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주님의 헌신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방법
1. 주님은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을 합니다. 이스라엘의 왕들은 평화와 왕의 권위를 동시에 상징하는 나귀를 탔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나귀를, 새끼 나귀를 타셨다는 것은 예루살렘과 세상에 평화의 왕이심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2. 예수님이 입으셨던 옷은 왕들이 입는 화려한 옷이 아니었습니다. 로마 황제가 입었던 품위가 있는 옷이나, 로마의 총독이 입었던 강력한 갑옷도 아니었습니다. 가난한 갈릴리 사람의 옷 그대로였습니다.
3. 예수님은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가죽 안장 위에 앉아 계신 것이 아닙니다. 남루한 제자들의 겉옷을 안장 삼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타고 가시는 새끼 나귀가 가는 길은 붉은 색 카페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환영 나온 사람들이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 주님이 가시는 길에 깔았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다가 길에다 깔았습니다. 왕들처럼 수많은 신하들이나 무장한 군인들이 뒤따라 오는 것이 아니라, 초라한 모습의 갈릴리 사람들, 12제자들이 뒤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4. 왕을 상징하는 나귀를 타고 입성은 했지만,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왕의 행렬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다렸던 사람들은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복되도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더 높은 곳에서,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그들은 ’당신은 승리자요, 구원자입니다. 진정한 이스라엘의 왕입니다.‘외친 것입니다.
5. 길가에서 환호를 했던 예루살렘 사람들, 그들은 주님의 실상을 전혀 알지 못했기에 그토록 지축이 흔들릴 정도로 주님을 환영했습니다. 진정한 평화를 위해 오셨다는 것과, 진리와 참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인간 탐욕의 예루살렘성을 무너뜨리고 회복하시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들은 열광적으로 환호했습니다.
6. 그러나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자신들의 욕망과 본능을 채워주시지 않았기에, 주님을 향해 목이 터져라 환호한 지 불과 닷새만에 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외치며 다시 지축을 흔들었습니다.
7. 평화의 왕으로 오신 우리 주님은, 예루살렘의 회복은 평화의 길과 방법이어야 한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은 강력한 힘과 돈이 있어야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예루살렘 사람들과는 다른 방법으로 예루살렘의 진정한 회복을 위해 겸손하게 새끼나귀를 타고 평화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8. 그리고 예루살렘의 회복과 세상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과 복음을 외치셨고, 어느 세상의 방법보다 강력한 방법인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함으로 예루살렘의 회복과 세상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입성해야할 우리 시대의 예루살렘
1.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종려주일은 부활주일을 앞두고 앞서가신 예수님(막 10:32)을 따라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할지를 고민하게 하고 결단하도록 도전합니다.
2.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의 뜻이 아닌 세상의 탐욕과, 하나님이 주인이 아닌 인간이 주인이 되어 경배받는 예루살렘의 회복을 향하여 제자들과 함께 입성하였듯이, 지금 여기 (here and now) 우리 시대에서 주님과 함께 입성해야 할 세상의 예루살렘이 어디인지를 깨닫고 결단을 해야 합니다.
3. 인간탐욕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가 무너진 곳을 향하여 우리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짊어지고 행진하여야 합니다.
4. 하나님의 창조세계에서 인간 이기주의로 인해 신음하고 고통을 받고 있는 세상의 자연환경을 향하여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짊어지고 행진하여야 합니다.
5. 교회와 종교가 변질된 예루살렘이라고 생각한다면 세상의 회복과 구원을 위해 입성하신 주님을 따라 십자가를 짊어지고 행진하여야 합니다.
6.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과 가정입니다.
만약 내 몸과 내 삶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고, 변질된 예루살렘성이라고 생각하다면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믿음안에서 회복과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삶으로 행진하여야 합니다.
7. 주님은 입성해야 할 우리 시대의 예루살렘을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삶을 살아가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