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막 11:1~10, 삼하 6:12~19, 히 12:18~24
1. 새 봄을 반기며 곳곳에 새순과 꽃들이 피고 있습니다. 곳곳에 피어나는 꽃들을 보며, 지난 날 아무리 추웠어도 봄은 우리 곁에 선물처럼 오고 있음에 감사합니다. 온 지구촌은 코로나19로 인해 여러 분야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감염자 수가 1억 2천만명을 넘었고, 이 중에 사망자는 약 2백 70만명 정도입니다. 두렵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이 또한 코로나19 백신과 치료제 개발로 속히 회복되리라 믿고 소망합니다. 연일 군부의 유혈진압으로 소중한 생명들이 희생당하는 칼바람이 부는 미얀마 소식을 듣습니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국민들의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바탕으로 반드시 따뜻한 봄날이 올 것을 믿고 소망합니다. 아무리 방해해도 반드시 이뤄질 일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반드시 이뤄야 할 일입니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반드시 이뤄내야 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2. 오늘은 사순절 여섯째주일이요, 종려주일입니다. 사순절기는 예수께서 이스라엘의 북쪽에 위치한 갈릴리 지역에서의 활동을 마무리하시고, 남쪽인 예루살렘을 향해 40일간의 여정에 오르신 기간입니다. 예수께서는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가시면서, 잃은 양, 잃은 아들, 잃은 백성들로서 소외되고 버림받은 이들을 원래 상태로 회복시키고자 하셨습니다. 아픈 역사를 지닌 사마리아를 지나고자 하셨습니다. 집을 나간 탕자를 애타게 기다리시는 아버지와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걸음걸음마다, 당신의 사명은 인류의 구원과 회복임을 분명히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산헤드린 공회의 공개 수배령이 내려지는 엄혹한 상황에서도, 예수께서는 오늘 그 마지막 종착지인 예루살렘으로 향하십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의 입성이 당신에게 부여된 지상 사역의 마지막인 인류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3. 그러면, 예수께서 인류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시기 위한 최종 목적지인 예루살렘은 어떤 곳입니까? 예수께서 입성하시는 당시의 예루살렘은 위선적인 세력들과 거짓 세력들이 판을 치는 도성이었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을지 모르나, 그 능력은 사라진 곳입니다. 진짜 주인은 배척되고 객들이 가짜 주인이 되어 판을 치는 어처구니 없는 현장이었습니다. 하지만 본래의 예루살렘은 이런 곳이 아닙니다. 어떤 곳입니까? 구약의 사무엘하 6장에서 다윗 성, 즉 첫 예루살렘의 본연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윗 왕은 십계명이 들어있는 하나님의 법궤가 오벧에돔의 집에 있는 동안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그러니 오벧에돔에 법궤가 있었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오벧에돔의 집에 계셨다는 말이요, 오벧에돔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오벧에돔의 집이 복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일찌감치 골리앗과 전쟁을 할 때부터 사울의 위협에 도망치면서도 다윗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 말씀에 청종하며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오벧에돔의 집이 복을 받은 이유의 핵심을 파악하고 하나님의 법궤를 메고 다윗 성(예루살렘)으로 모시고 옵니다. 다윗 성, 즉 예루살렘을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이 되는 도성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이에 법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갈 때마다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며 모든 정성을 다했습니다. 또한 다윗은 온 힘을 다해 춤을 추었고, 온 이스라엘 족속은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야말로 국가적인 큰 행사로 치렀습니다. 그리고 준비된 장막에 법궤를 두고 다윗은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립니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후에 여호와의 이름으로 온 백성을 축복하고, 모든 백성에게 떡 한 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 떡 한 덩이씩 나누어 줍니다. 그야말로 하나님께는 무한한 영광과 감사의 제사를 드리고, 모든 백성들에게는 빠짐없이 기쁨을 누리는 큰 축제판을 벌인 현장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윗 성, 예루살렘의 본연의 모습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현장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마음이 가득한 곳이요,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서는 곳이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곳이 예루살렘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감사와 찬양과 기쁨으로 가득한 곳이 예루살렘입니다.
4. 이제 드디어 예수께서는 바로 그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원래의 예루살렘을 회복시키면서, 온 인류의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마음을 알리고자 하십니다. 인류 구원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이 벌어집니다. 하늘이 열리고, 땅이 흔들릴 일입니다. 그런데, 그 주인공의 행색은 전혀 예상치 못한 모습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는 전혀 화려하지 않습니다. 전혀 위엄이 있어 보이지도 않습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예수를 환영하기는 했지만, 온 인류의 구원자 치고는 초라하기까지 합니다. 예수께서는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새끼 나귀를 타고 입성하십니다. 새끼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시는 구원자십니다. 세상의 왕들이나 영웅들이 선택하는 화려하고 멋진 말이 아닙니다. 고작 새끼 나귀 한 마리였습니다. 그러니 아무런 힘을 느낄 수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데에는 분명한 이유와 목적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세계, 즉 새 예루살렘은 무력과 군림이 아닌 평화와 겸손의 세계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자 예수의 선택은 전쟁이 아니라,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회복시키실 새 예루살렘은 다툼이나 군림이나 정복에 의한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강한 군마나 군병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또한 그 옛날 스가랴 선지자는, 공의롭고 구원을 베푸시는 메시야는 겸손하여서 나귀 새끼를 타신다고 예언했는데, 그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예수께서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께서 새끼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의 예언이 이뤄진 것이요,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 진리와 평화, 그리고 겸손으로 다스리실 새 예루살렘을 보여주시는 행보였습니다.
5. 이에 예루살렘에 있는 백성들은 새끼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시는 구원자 예수를 어떻게 맞이합니까? 그리고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법궤)을 중심으로 하나님께서 통치하실 새 예루살렘을 회복시키러 오시는 구원자 예수를 어떤 자세로 맞이해야 할까요? 분명 저들이 취했고, 취해야 할 자세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겸손한 자세입니다. 맞습니다. 죄임됨의 자세입니다. 그 자세로 저들은 예수 주변에서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 나귀 등에 얹어 놓고, 길에 펴기도 합니다.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호산나! 호산나!” 외치며 앞서거니 뒷서거니 합니다. 호산나는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구원은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할 때 가능합니다. 자신이 의인이라고 여기는 자는 결코 구원을 요구하지도, 할 수 없습니다. 겉옷은 자신을 꾸미거나 포장하는 외모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이들의 겉옷은 침구로 겸하여 활용했다고 하니, 자신의 전부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겉옷 하나가 전부란 말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겉옷을 벗어 입성하시는 예수께 드렸다는 것은, 곧 자신을 의인으로 포장하는 겉치레를 벗어 버리고, 내면으로부터 자신이 죄인임을 드러냈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긴다는 의미도 될 수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궤를 다윗 성으로 모시는 중에, 춤을 출 때 자신의 베 에봇이 벗겨지는 다윗의 상황과 흡사합니다. 구원자 예수 앞이기에, 자신의 죄와 허물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저들은 비록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시지만, 그 크신 분께 “호산나 호산나, 구원하소서”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새 예루살렘의 회복을 구하는 죄인의 자세이기에 “호산나 외친다. 구원하소서”라고 외칩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이 죄인이요, 구원받아야 할 존재임을 진실로 고백하고 회개할 때, 그리고 예수가 구원자이심을 확신할 때에 비로소 “호산나, 호산나”라고 외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어땠나요? 인간적으로는 왕의 신분이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어린 아이요, 죄인이요, 약한 자요, 구원받아야 할 존재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구원하심과 다스리심이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고 고백하고 믿으며 그 분 앞에서 한없이 낮아졌습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며 회개하고, 예수께서 구원해 주시길 간절히 바라는 이들의 환호 속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께서는 구원하시는 길로 행하셨습니다. 그 길은 바로 갈보리 십자가의 대속 제물이 되시는 길이요, 그 길을 가심으로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는 사명을 완수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스스로 번제와 화목제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번제는 죄를 사함 받기 위한 제사요, 화목제는 감사의 제사입니다. 친히 번제와 화목제의 제물로 모든 백성의 떡과 고기와 건포도인 생명이 되셔서, 죄인들을 구원해 주시고, 죄인들은 구원받음에 기쁨과 감사의 이유가 되셨습니다. 할렐루야!
6. 2021년 종려주일 아침에,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고 구원의 대상임을 인정하며 예수를 향해 “호산나”라고 외쳤던 자들을 다시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예루살렘을 다스리고자 법궤를 옮긴 다윗을 다시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과 신앙의 현주소를 돌아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도 죄인이라는 인정과 고백에 이은 회개, 그리고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번제와 화목제의 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인들은 히브리서 기자가 알리듯이, 땅의 예루살렘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새 예루살렘을 소망하는 자들입니다. 그 성은 바로 하늘에 준비된 새 하늘과 새 땅으로서의 예루살렘입니다. 영원한 도성이며 영적인 새 예루살렘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 영원한 새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행진해 가고 있는 중입니다.
7.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는 당신이 마땅히 해야 할 사명, 즉 모든 인류를 살리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셨습니다. 예수가 가지 않으면 안 될 길이었습니다. 예수가 거부하시면, 모두가 멸망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외에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행 4:12). 구원의 진리를 아시는 예수는 그 길이 십자가에 달려 번제물과 화목제물이 되는 것임을 알면서도 모두를 구원하시려고 거부하지 않으시고 가셨습니다. 그 누가 방해해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로 죄인된 우리가 마침내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주님 앞에 서는 그 날까지, 은혜 입은 자임을 잊지 맙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영원한 도성인 하늘의 새 예루살렘을 소망하며 하나님께는 더욱더 순종하고, 이웃에게는 한없이 겸손한 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