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 58:1~9, 고후 7:2~13, 마 6:16~18
[1]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눅 14:34~35)
가게에서 소금을 산 후 집에 와서 맛을 보니 짠맛이 나지 않는다고 합시다. 사람들은 먼저 자신의 미각을 의심했다가 이상 없음을 확인한 후에는 구입한 것이 소금이 아니라는 판단을 할 겁니다. 인간의 문화에서 짠맛은 소금의 기본인 셈입니다. 짠맛이 안 나는 것은 소금이 아닌 것이지요. 하지만 이 말씀은 그것이 가능한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옛날에는 소금거름이 있었다고 합니다. 최대한 불순물을 제거하고 농축한 하얀 소금이 아니라, 소금기가 있는 거친 입자의 흙이 소금거름으로 쓰였습니다. 그런데 이 소금거름을 잘못 보관하여 소금기가 다 빠져버리면 소금이 없는, 즉 짠맛이 없는 물질이 되고 맙니다. 비료가 되는 소금기가 없어 거름으로 쓸 수 없고 남아있는 거친 입자도 밭에 좋을 것이 없어서 길에다가 버려지게 된다는 것이 이 말씀의 배경입니다. 이 말씀 역시 짠맛이 소금의 기본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 것이지요.
[2]
신앙생활에서 행하는 금식(禁食)의 기본은 무엇일까요? 형식적으로는 굶는 것입니다. 굶지 않는 금식은 없습니다. 그러나 내용적인 것이 더 중요합니다. 신앙적 금식의 기본을 명시하고 있는 말씀이 레위기 16장 29~30절입니다.
“너희는 영원히 이 규례를 지킬지니라 일곱째 달 곧 그 달 십일에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말되 본토인이든지 너희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이든지 그리하라 / 이 날에 너희를 위하여 속죄하여 너희를 정결하게 하리니 너희의 모든 죄에서 너희가 여호와 앞에 정결하리라”
‘괴롭게 하고’와 관련된 원어 ‘아나’에는 “스스로를 낮추다”는 의미가 있으며 이 말씀에서는 구체적으로 금식 및 이와 관련된 행동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금식이 추구하는 것은 속죄와 정결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적 금식의 기본은 자신의 원초적 욕구를 포기함으로 주님 앞에 자기를 철저히 낮추고 죄와 허물을 깨닫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외의 금식 목적들은 이 기본을 바탕으로 파생된 것입니다. 짠맛이 없는 소금은 소금이 아니듯이 이러한 기본이 빠진 금식은 참된 금식이 아닌 것이지요.
[3]
오늘 이사야 58장 말씀은 신앙적 금식의 기본에 입각하여 당시의 부실한 금식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철저히 낮추고 죄와 허물을 깨닫는 금식의 기본을 갖추지 못한, 형식만 갖춘 금식이었습니다.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지 않고 주님을 위해 무슨 대단한 희생을 하는 양 당당합니다(2-3절). 당연히 자신의 죄와 허물은 되돌아보지 않습니다. 금식은 하지만 회개는 없습니다. 천둥 비슷한 소리는 나지만 벼락은 없는 격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러한 금식을 주님께서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레 16:29) 금식의 기본을 갖추지 못해 금식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 질타합니다(5절).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의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그러면서도 금식으로 어떤 소원을 이루려고 하지만 주님께서는 부실한 금식으로는 그 목적을 이룰 수 없다고 하십니다(4절).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금식 즉 죄와 허물을 깨닫고 고치는 회개가 수반되는 기본을 갖출 때 금식으로 이루려는 소망도 술술 풀릴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8-9절 상반절).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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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도 오늘 마태복음 6장에서 그 당시 행해지는 금식의 부실함을 같은 원리로 지적하십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신앙적 금식의 두 요소는 첫째, 주님 앞에 자기를 철저히 낮추고 둘째, 죄와 허물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 시대 때 금식하는 자들이 상대적으로 후자를 소홀히 했다면 예수님 시대 때 바리새인의 금식은 총체적으로 부실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엄격히 말해 하나님을 바라보고 행한 금식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예수님은 금식하는 자들에게서 사람에게 향하는 마음을 원천적으로 차단함으로써 그들이 오롯이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인도하십니다(18절).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거룩한 하나님만을 바라볼 때 자신의 죄성을 직시하게 되고 허물이 발견되고 그것을 고치려는 회개의 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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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하면 금식이 떠오릅니다. 사순절에 금식의 의무를 성도들에게 부과한 기독교 전통의 영향입니다. 지금은 성도 개인이 금식을 자발적으로 정하기 때문에 사순절과 금식의 관계가 느슨해졌지만 앞의 말씀들에서 강조된 “금식의 기본”은 여전히 사순절을 관통합니다. 사순절은 자신의 죄와 허물을 깨닫고 고쳐나가는 회개의 절기인 것입니다.
감사주일을 정하고 감사신앙을 위해 애쓰는 것이 필요하듯이 사순절을 회개의 절기를 정하고 회개신앙을 위해 애쓰는 것은 필요합니다. 신앙생활에서 긍정(肯定)의 감사가 중요하듯이 부정(否定)의 회개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고린도후서 7장에서는 비록 회개가 슬픔이라는 부정적 감정을 유발하지만 성도가 구원의 길을 가는데 매우 중요하다고 역설(力說)하고 있습니다. 마게도냐에 있는 바울은 디도의 방문을 받고 위로를 받는데 디도가 전해준 고린도교회의 소식을 듣고 더욱 기뻐하게 됩니다. 그중 바울을 가장 기쁘게 한 것은 그들의 회개(애통함)였습니다. 비록 회개의 이르는 과정이 고린도 교회에 괴로움을 주었지만 회개는 결코 손해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구원의 길에서 이탈하지 않게 하는 변화이기 때문입니다(7-10절).
그가 온 것뿐 아니요 오직 그가 너희에게서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고함으로 나를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 /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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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야 사순절기를 회개의 계절로 보낼 수 있을까요? 감사신앙처럼 회개신앙도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감사 훈련처럼 회개 훈련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감사 훈련 중에 “매일 100가지 감사 이유를 적어보기”가 있습니다. 무리한 요구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렇게 해야만 우리 삶 구석구석에서 감사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회개 훈련도 이렇게 하십시오. 사순절기를 보내며 그동안 살아오면서 범한 나의 잘못과 오류, 실수, 허물 등을 100가지 찾아 적어보십시오(누구든지 100가지는 나오기 마련입니다). 천재 물리학자 아이작 뉴톤의 ‘회개 노트’처럼 암호나 약어로 적어도 좋으니 하나님 앞에서 진솔하게 반성해 보십시오. 마음을 철갑처럼 두른 교만의 때가 조금씩 벗겨지고 겸손의 살이 드러나는 경험을 하시게 될 것입니다. 회개의 영성이 살아나고 주님께서 용서와 회복의 은혜 베풀어주시고 화해와 수습의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사순절에 회개의 영성을 회복하셔서 성도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새로운 지평이 열리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