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 30:8~18, 계 3:1~6, 마 23:13~28
코로나 역병 환난의 날이 깁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코로나 팬데믹을 선언한지 2년이 지났지만 아직 그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3월 20일 기준, 세계 코로나 19로 인한 사망자 수가 6백만 명이 넘었습니다. 실제 사망자는 훨씬 더 많을 것이라 합니다. 더 근본적이고 심각한 위기는 기후 생태환경 위기입니다. 나라사이의 분쟁과 전쟁 위기도 높아갑니다. 이래저래 지구촌은 환난의 날이고 위기의 때입니다. 종말론적 위기입니다. 위기 담론이 많지만 문제의 본질을 놓치는 듯합니다. 가죽신을 신고 가려운 발을 긁는다는 말(격화소양, 隔靴搔癢)이 생각납니다. 오늘의 위기는 단순히 환경 위기, 보건 위기나 국제 정치적 위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 파괴하는 인간의 만행, 물신주의 우상숭배로 인한 인간의 영적 위기입니다. 신학자 P. 틸리히는 이를 ‘흔들리는 터전’ 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사야 24:19를 인용합니다. “땅이 깨지고 깨지며 땅이 갈라지고 갈라지며 땅이 흔들리고 흔들리며” 이사야는 ‘흔들리는 터전’ 위기 시대에 예언활동을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사30:8-18은 천하대란의 위기 상황에도 죄악의 늪에 빠져 있는 패역한 유다를 향해 선포된 예언입니다. 본문 계3:1-6도 흔들리던 터전과 같은 로마 기독교 박해 시대, 사도 요한이 본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마23:13-28은 격동의 시대, 사망의 그늘진 땅 갈릴리 세리 마태가 예수의 제자로 거듭나 기록한 복음의 말씀입니다. 위기 시대를 사는 우리에 주시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위기 시대는 계시를 보고 들을 때입니다. 그것이 위기 시대의 은총입니다.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라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마16:1-4) 시대의 징조를 깨닫지 못하는 자들을 향한 주님의 질책입니다. 요나의 표적이 뭘까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쳤던 요나, 바다에 수장되는 위기와 곡절을 겪고 회개하고 죄악의 도성, 니느웨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으니 회개하라’(욘3:4). 요나의 표적은 가치관과 삶의 방향의 전환, 회개의 표적입니다. 오늘 코로나 팬더믹 시대, 깨달아야 할 표적도 전환이요 회개입니다. 인간들이 물질적 표적만을 구하다가 절벽을 만났습니다. 그것이 오늘의 코로나 위기를 비롯한 지구촌 위기입니다. 인류는 길을 잃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절벽 앞에서 탄식하고 절망할 때가 아닙니다. 위험한 절벽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새로운 표준과 가치관을 세우고 방향 전환할, New moral의 때입니다. 코로나 팬더믹 위기의 본질은 위기의 때를 깨닫고 그 위기의 본질이 영적 위기임을 깨닫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물신주의 탕자 문명에서 돌아설 때, 위기는 위대한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강대국들이 우는 사자처럼 입을 벌리고 달려오는 격동의 시대, 풍전등화의 위기시대, 예언자로 소명을 받습니다(사6:1-7). 이사야는 시대의 징조를 분별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의 핵심 메시지는 심판과 구원입니다. 오늘 본문입니다. “이제 가서 백성 앞에서 서판에 기록하며 책에 써서 후세에 영원히 있게 하라.....이 죄악이 너희에게 마치 무너지려고 터진 담이 불쑥 나와 순식간에 무너짐 같이 되리라 하셨은즉 그 이 나라를 무너뜨리시되 토기장이가 그릇을 깨뜨림 같이 아낌이 없이 부수시리니 그 조각 중에서 아궁이에서 불을 붙이거나 물웅덩이에서 물을 뜰 것도 얻지 못하리라....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사30:8, 13-14, 18). 하나님은 심판하시지만 심판 중에도 새로운 출구를 준비하시고 은혜를 베푸십니다. 오늘 이 시대의 위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지만 그 속에 탕자의 귀향을 고대하는 하나님의 은총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위험하지만 분명 위대한 기회입니다. 믿으시길 바랍니다.
새 시대를 준비하라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창6:11) 노아 홍수 심판 전, 세상은 부패와 포악이 범람한 죄의 팬더믹 시대였습니다. 네피림이라는 거인족들이 자신의 힘과 덩치만 믿고 안하무인으로 갖은 불법과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마구 파괴한 황야의 무법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홍수로 심판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심판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고 하나님은 노아에게 새 시대를 준비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 섭리는 놀랍습니다. 악의 팬더믹 시대에서도 그 죄악의 탁류에 휩쓸리지 않는 ‘남은 자’(The remnant)를 예비하시고 심판 가운데서도 새 시대의 그릇을 예비하십니다. 마태도 새 시대, 새 역사를 위해 준비된 하나님의 그릇입니다. 본문 마태23:13-28 타락한 종교인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한 예수의 심판의 신탁을 마태가 기록한 것입니다.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23:27-28) 마치 맛 잃은 소금 같고 열매 없는 무화과 같고 생명의 생기를 잃은 오늘의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질책으로 들려 모골이 송연합니다. 신탁의 기록자 마태가 누구입니까? 바리새인들에 의해 정죄 받고 저주 받던, 죄인 세리였습니다. 그가 새 시대의 하나님의 그릇으로 쓰임 받은 사실, 놀라운 은혜의 사건입니다. 마태 본명은 레위입니다. 이름으로 보아 제사장 가문 출신으로 보입니다. 제사장 가문 출신이 어떻게 갈릴리 세관의 세리가 되었을까? 알 길이 없습니다. 단지 그가 살았던 세월이 얼마나 땅이 흔들리는 격동의 위기 시대였던가를 짐작하게 할 뿐입니다. 또 세리였던 그가 어떻게 예수의 제자가 되었을까요? “예수께서 그곳을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마9:9) 아무 부연 설명이 없지만 예수의 ‘나를 따르라’는 한마디에 마태는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나 예수를 따랐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문자만 보지 말고 행간을 읽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세리 마태만 보고 비난하고 정죄하였지만 예수님은 인간 마태의 중심을 보셨습니다. 제사장 가문 출신으로서 로마의 앞잡이 세리가 된 마태는 ‘내가 누구인가?’ 자신의 정체성을 물으며 잠못 이루는 밤을 지냈습니다. 세리의 삶에 대한 환멸과 감옥 같은 현실에서 해방될 출구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청년 마태의 내적 위기, 그 중심을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나직한 부르심은 번뇌하던 그의 가슴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는 좌석에 끌리듯 예수를 따랐습니다. 새 시대를 위해 준비된 하나님의 그릇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새 역사를 위한 또 다른 하나님의 그릇이었습니다. 로마 대박해로 베드로와 바울 등 대부분 사도들은 다 순교하고 교회는 그 존립이 위협받고 있었는데 더 큰 위기가 닥쳤습니다. 영지주의 등 이단들이 교회의 정체성을 뒤흔들고 교회의 뿌리를 갉아먹는 내적 위기였습니다. 그 내우외환의 위기 시대, 새 역사의 준비된 하나님의 그릇이 사도 요한이었습니다. 자신도 밧모 섬에 유배되어 대리석 채석장에서 죽음 같은 강제노역 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계시를 보았고 그 계시를 기록했습니다. 오늘 본문 계3:1-6은 그가 본 계시 중, 사데 교회에 보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사데교회는 계시록에 나오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의 하나입니다.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교회’라고 불렸던 사데교회, 어쩌면 이 시대의 교회의 다른 이름인지 모릅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은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계3:1, 4-5) 그런데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교회’ 사데교회에도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하나님의 ‘남은 자’(The remnant)들이 있었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 섭리입니다.
사순절, 그리고 총회 순교자 기념주일입니다. 터전이 흔들리는 지구촌 위기 시대, 교회도 그 터전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위기의 때는 변화와 회개를 위한 절호의 기회이고 은총의 때입니다. 탕자 자리에서 아버지 집으로 귀향할 때입니다. 시대의 어둠을 넘어 새 시대의 그릇으로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들을 귀 있는 자가 되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