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마6:16-18, 사58:1-9, 고후7:2-13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기독교는 수난의 종교입니다. 꽃길만을 바라고 고난을 회피한다면 그것은 진정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이제 자본주의에 편승하여 고난을 싫어하고 번영만을 추구하는 종교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마치 사업을 하듯이 교회를 운영하는 방식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맘몬주의에 무릎을 끓고 말았습니다.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본문은 금식과 회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금식이라고 하는 것은 남에게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참된 금식은 금식하면서 싸우는 것이 아니다. 형식적인 금식은 주님께 열납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참된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주린 자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다. 그러면 네 빛이 새벽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그때에 내가 네 기도에 속히 응답하겠다고 합니다.
사막의 교부나 한국의 교회는 금식과 금욕을 강조해 왔습니다. 인간의 욕망을 죄악으로 강조하며 죄의식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먹기를 탐하고 마시기를 즐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전도서3:13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로 또한 알았도다. 그러므로 육체를 학대하고 금식 금욕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늘 주님의 수난을 생각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자본주의와 번영신학에 의해 욕망의 브레이크가 없이 질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의 이익이라면 하나님도 교회도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회는 교회를 배격하게 되고 교회는 빛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정신은 살신성인의 마음입니다. 나를 희생하면서 남을 살리는 것입니다. 나의 이익을 위해 남을 제물로 삼는 일은 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삶이 이처럼 나를 죽이면서 온인류를 구원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의 삶을 닮아가야 하고 마음에 담아야 할것입니다.
우리는 제20대 대선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기독교가 정치권력에 기생하고 아부하여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한국의 민주화의 걸림돌은 한국의 침묵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강한자에게는 침묵하고 약한자를 무시하였습니다. 억강부약(抑强扶弱)이 되어야 하는데 억약부강(抑弱扶强)이 되었습니다. 기장은 엄혹한 군부독재에 제일 앞장서서 역사의 외침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오직 이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여 공정과 평화가 임하는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거짓과 불의 앞에 몸을 던져서 민주화를 이루어왔습니다. 불평등과 소외와 차별을 없애고 모두가 잘사는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남북의 통일을 위해 기도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의미에서 금식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금식이란 나의 욕망을 절제하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너무도 풍요로운 세상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간의 욕망의 끝은 코로나와 같은 재앙을 초래하고 욕심이 잉태하면 결국 죽음을 가져오게 됩니다. 야고보서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금식은 곧 자신의 회개하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회개를 기뻐하고 있습니다. 고후7:9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 합니다.
우리 역사에서 철저한 회개가 없이 지내왔기에 부패가 계속 되고 있습니다. 교회도 철저한 회개가 필요합니다. 개인도 회개의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재를 무릎쓰고 회개하여야 합니다. 내 잘못을 인정하고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는 주님의 용서를 받을 수 없고 긍휼을 입지 못합니다. 회개의 잣대를 남에게만 재고 자기에게 관대하면 내로남불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날마다 자신을 성찰하고 회개할 때만이 우리의 앞길에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순절은 이처럼 금식과 회개의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때로 남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시위를 합니다. 그러나 나를 참회하는 회개의 고백이 우선 되어야 합니다.
금식하면서 오락을 추구하지 말라고 합니다. 철저한 고독속에 나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자신에 대한 회개의 충격이 있어야 합니다. 어찌할꼬 탄식이 있어야 합니다. 시편에는 이처럼 많은 회개의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에게 유쾌하게 되는 날을 준다고 합니다.
저는 목회 40년을 하면서 나 자신을 보지 못했습니다. 내가 하는 모든 것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 자신의 허물과 죄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모든 것이 교인들의 잘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는 바로 나의 허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기도의 본질입니다. 참회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매일 일기를 쓰면서 나를 성찰하고 있습니다. 새벽마다 기도하면서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회개는 돌아서는 것이요 새롭게 탄생하는 것입니다. 고후5:17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옛것으로는 새 세상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과감한 개혁과 혁명이 필요합니다. 회개하기 위해서는 아픔과 진통이 필요합니다. 대가와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나이가 먹어가면서 사람이 바뀌지 않습니다. 자기가 산 방식대로 고집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꼰대가 됩니다. 그러나 새로워지지 않으면 아무 것도 이룰 수가 없습니다. 패러다임의 전환(paradigm shift)이 되어야 합니다.
고난의 터널을 통과하지 않으면 부활의 찬란한 빛을 볼 수가 없습니다. 애벌레의 긴 과정이 있어야 나비가 되는 영광을 얻게 됩니다. 회개는 그러므로 나를 돌아보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늘 남을 판단하고 정죄했던 생각을 나 자신에게로 향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양 진영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확증편향이 되었습니다. 남의 의견은 듣지를 않습니다. 지혜란 남의 의견을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통합을 이루어야 합니다. 진보와 보수의 두날개가 있어야 날 수가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강단의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소리를 말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교회의 주인이 아니라 내가 교회의 주인이 되어버렸습니다. 교회가 사리사욕을 위한 수단이 되고 자기의 욕심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시정잡배, 양아치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설교를 하면서 교인을 향해서만 선포합니다. 목사는 나 자신에게 설교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현대판 바리새인이 됩니다. 회칠한 무덤이 됩니다. 글을 쓸 때도 자기 자신을 향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인으로 길을 걸어갈 때만이 교회도 새로워지고 사회도 밝아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사순절에 주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개혁을 외치면서 변화가 되지 않는 것은 바로 회개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회의 변화나 교회의 변화의 근본은 바로 회개운동 입니다. 개인이든 단체든 나라든 회개가 전제되지 않고는 모래위에 지은 집처럼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회개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의 변화입니다. 감정적인 차원의 눈물이 아닙니다. 그러면 도로 원위치로 돌아가게 됩니다. 삭개오처럼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고 토색한 것의 4배를 갚겠다는 결단을 말합니다. 야고보서2:17 이와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행동하는 양심을 말합니다.
이러한 회개가 없는 개인이나 교회는 세상에 감동을 주지 못하고 미래에 소망이 없습니다. 아무리 큰 교회와 유명한 목사일지라도 소리없는 메아리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무소유의 법정스님은 우리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 정신이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한국교회와 목사도 이처럼 회개의 표징이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는 이 사순절에 금식과 회개의 의미를 더욱 깊이 되새기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슈바이처는 말하기를 자기가 만든 피조물을 심판한다는 것이 이해할 수 없다고 했지만 하나님은 의인과 악인을 심판하십니다. 회개하지 않는 자를 심판하십니다. 우리는 선거라는 투표행위를 통해 정당과 정치인을 심판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질주하는 삶을 중단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회개와 금식을 해야 합니다. 사순절에 우리가 깊이 묵상할 기도의 제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