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마 6:16-18, 사 58:1-9, 고후 7:2-13
<경건>은 하나님이 옳게 여기시는 신앙생활의 바른 자세입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3가지 경건생활의 교훈이 있습니다.(마 6장) 그 첫째는 구제요(마6:1-4), 둘째는 기도이며(마6:5-15), 셋째는 금식입니다(마6:16-18). 이 세 가지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행하는 모든 삶의 기본원칙입니다. 구제는 이웃을 향한 성도의 올바른 삶,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삶, 금식은 자신을 향한 올바른 삶의 원칙입니다. <경건>은 이 세상적 삶의 방식과는 구별되는 거룩한 삶의 방식입니다. 사람들이 옳다고 인정하는 것과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하는 것은 다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환호한다고 옳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온다고 의(義)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옳다고 하셔야 옳은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세계적인 위기의 상황을 맞고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떠나 끝없는 욕망을 따라 살다 코로나시대를 맞이했습니다. 지금도 소련군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촉발된 전쟁으로 세계는 점점 거대한 갈등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남북관계도 한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시계 제로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금주 수요일에 맞이하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선거는 향후 세계적인 위기와 갈등 속에서 우리나라의 미래를 이끌어갈 리더십을 결정해야하는 중요한 선거가 될 것입니다.
2022년 사순절 첫 번째 주일, 우리에게 주신 세 본문의 말씀은 모두 “금식”에 대한 말씀이거나 그와 연관된 내용이 포함된 말씀입니다. 어떻게 하는 금식이 온전한 “금식”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입니까? 바른 금식이 과연 오늘 대통령 선거를 앞둔 우리의 상황과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이 시대에 우리는 어떤 정치 지도자를 세워야 합니까? 이 위기의 시대를 바르게 이끌어갈 지도자는 어떤 사람이어야 합니까?
금식은 자기자랑이 아닙니다(공의와 정의의 영성/ 마6:16-18)
금식은 사람들에게 자랑할 것이 아니며 그것이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을 감수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결코 하나님 앞에 내세울 “공로”가 아닙니다. ‘금식이란 값’을 지불하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받는 “대가”는 더욱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하나님 앞에 올려드린 유일한 “공로”이며 우리 죄를 위해 대신 치르신 유일한 “대가”입니다. 그러므로 “금식”은 사람에게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버리고 우리의 의지대로 살았던 교만을 던져버리고 하나님을 향해 겸손히 낮아져 그의 다스림을 받고 그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내가 의지하던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온전히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입니다.(마6:16-18)
“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17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18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오직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 앞에 바로서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위해 금식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은 자신의 제사나 기도나 금식을 내가 원하는 것을 받아내는 “대가”나 “복채”로 여깁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 450인과 더불어 불로 응답하는 참 신이 어떤 신인가를 놓고 대결합니다(왕상18:20-40). 바알선지자들은 제단에 제물을 얹고 주위를 뛰 놀며 큰 소리로 바알신의 이름을 부르며 제사 드립니다. 그래도 응답이 없으니 그들의 규례에 따라 칼과 창으로 피가 흐르기까지 몸을 상하게 했습니다. 무언가 신이 흡족할 만한 수고와 특별한 희생의 “대가”를 치러야 바알신이 응답한다고 생각한 바알의 선지자들은 하루 종일 뛰면서 큰 소리로 신의 이름을 부르고 칼과 창으로 몸을 상하게 했지만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규례와 말씀대로 무너진 제단을 수축합니다. 저 시내산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던 이스라엘 12지파를 따라 12돌을 취하고 그 돌로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제단을 쌓았습니다. 다시 하나님의 계명과 말씀 앞에 돌아와 그의 언약의 말씀을 따라 저녁 소제드리는 시간에 맞추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불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번제물과 나무와 흙과 돌, 도랑의 물까지 다 태웠습니다.
금식의 영성은 우상 신을 섬기는 자들처럼 우상에게 빌어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 요행수가 아니라 하나님께로 돌아와 내 의지대로 산 것을 회개하고 이제부터 그의 법과 규례와 명령을 따라 공의와 정의의 법대로 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통령의 영성은 매우 중요합니다. 대통령이 그 중심에 무엇을 믿고 의지하느냐는 것은 나라의 운명에 깊은 영향을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속신앙이 어려움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고, 절망 중에 있는 이들에게 잠시 소망을 주는 긍정적인 면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 지도자는 다릅니다. 한 개인이나 집단의 유익을 위한 자리가 아닙니다. 5천만 국민의 삶과 온 나라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반드시 국민 모두를 바르게 이끌어갈 공명정대하고 정의로운 삶의 원칙과 가치관을 지녀야 합니다. 내 개인적인 욕망을 얻기 위해 우상의 말을 듣는 지도자는 위험합니다. 개인적인 사익이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온 국민모두를 이롭게 할 공의로운 법과 원칙을 따라가는 지도자를 세워야 합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을 믿습니까? 그 이유도 나와 내 편에게만 복을 주는 분이 아니라 공의와 정의의 원칙에 따라, 모두에게 평화와 인애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 아닙니까?
금식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희생의 영성/ 사58:1-9)
오늘 구약본문 사58:1-9에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거짓된 금식과 참 금식을 구별하여 말씀해주십니다. 거짓된 금식은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금식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마음은 없고 정해진 금식기간동안 모든 일과 의무는 일꾼들에게 떠넘겨서 업무를 가중시키고 자신은 그 시간을 오락과 향락으로 채우며, 이웃들에게는 나는 이렇게 금식을 하는데 너희는 뭘 하느냐며 다투고 싸우며 폭력까지 서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이기적인 금식은 주변 사람에게는 고통의 시간이 되는 것이지요.(사58:3-5절)
“3 우리가 금식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 주지 아니하시나이까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구하며 1)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4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가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의 목소리를 상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5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의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금식을 자신의 죄에 대한 통회와 괴로움의 날로 삼지 않는데 어찌 하나님께 인정받는 금식일 수가 있겠는가? 모양만 ‘머리를 갈대처럼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깔고 앉는다’ 해서, 그게 하나님이 받으셔야할 금식일 수 있겠는가?고 물으십니다.
그러나 참 금식,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은 자신의 정욕과 죄악을 회개하며 주변의 이웃들에게 고통과 아픔을 주었던 일을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참 금식은 동족을 노예로 삼고도 7년이 지나도록 풀어주지 않았던 “흉악의 결박과 압제를 풀어 자유케” 해주고, 그들의 진 빚을 탕감해주며 잃었던 땅을 회복시켜 “멍에를 꺾고 묶은 줄을 끌러주는 것"입니다. 나아가 주린 자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고 거처 없이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고통 중에 있는 골육친척을 회피하지 않고 사랑으로 섬기는 일을 행하는 것”이 참 금식이라고 하십니다(사58:6-9).
“6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7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8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9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우리는 대한민국의 지도자를 선택해야 합니다. 14명의 후보자들 중에 어떤 분을 지도자로 선택해야 할까요? 우리는 지금 눈앞에 있는 14분의 모습이 아니라 그동안 살아온 그분들의 삶의 족적을 보아야 합니다. 눈 쌓인 길을 걸을 때, 눈앞을 보면 흰 눈외에는 아무 것도 안보입니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 뒤를 보면 선명한 족적이 또렷하게 보입니다. 사람이 걸어간 족적을 보면 크게 두 종류의 족적으로 나뉩니다. 한 편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자신에게 속한 집단을 위해 살아온 족적이 있습니다. 대단하고 능력은 있는데 자신과 자기 집단만 위해 산 사람입니다. 이웃을 위해 자기를 희생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지도자로서의 덕목을 가진 분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동안 어렵고 힘든 이웃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흔적이 있는 삶을 살아온 사람은 좋은 지도자의 자질이 있는 분입니다. 항상 약한 자들을 돕고 억울한 사람들 편에 서주고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으로 서민들과 힘든 사람들의 숨통을 터주는 삶의 족적이 있는 사람은 선한 지도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금식은 원수를 품는 것입니다(화해와 평화의 영성/ 고후7:2-13)
서신서 본문 고후7:2-13은 자신에 대한 온갖 음해와 의혹과 선동에 흔들려 잠시 오해에 빠졌던 고린도교회를 향해 사도 바울의 성실하고 진정성 있는 대처로 인해 고린도교회가 모든 오해와 거짓선동에서 벗어나게 된 것을 기뻐하는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개척하고 목회하던 교회들로부터 많은 불신과 비판을 받았습니다. 12제자도 아닌데 자신을 스스로 사도라고 칭한다는 공격, 교회들로부터 생활비를 받으려고 개척과 목회에 열심 한다는 의혹, 그리고 글보다는 말이 약하다는 비판 등, 뒷이야기들이 그를 꾸준히 괴롭혔습니다(고후11-12장). 그는 이러한 비난과 공격 앞에서도 쉬지 않고 선교사역에 힘을 쏟았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그를 공격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말에 부화뇌동하는 고린도교회에 서신을 보내기도 하고, 사람을 보내서 때로는 사랑으로 감싸고, 때로는 엄격하게 책망하기도 하면서 그들을 바로잡고 회개하도록 돌이켜 끝에 하나님 나라의 복음사역에 함께 동참하는 영적 동지로 삼았습니다. 서신서 본문에 금식이라는 말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자신의 대적들과 원수를 품어 함께 화해와 평화의 길을 가는 “금식의 영성”으로 충만합니다(고후7:8-11).
“8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9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들을 대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그들을 갈라 쳐 대적으로 몰아 공격하거나 그들을 외면하고 다른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대적들을 넓은 아량으로 품고 그들을 돌이켜 한 마음으로 함께 길을 걷게 하는 것이 위기 시대의 지도자의 덕목입니다. 한반도를 이끌어갈 미래의 리더십은 다름 아닌 “화해와 평화의 리더십”입니다. 무력이나 선제타격으로 적을 압도하려는 생각은 위험합니다. 저 오랜 분단의 땅을 열어젖힐 포용의 리더십, 강대국들의 이해가 첨예하게 맞물려있는 이 한반도를 오히려 조정자의 역할을 통해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화해와 평화를 만들어 갈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아름답고 성숙한 차선의 선택
이번 선거는 매우 혼탁할 뿐 아니라 그 결과를 조금도 예단할 수 없는 혼전의 상황입니다. 무엇보다 유력한 후보들에게 따라온 도덕적 자질 논란은 과거의 어떤 선거보다도 건강하고 적극적인 선거참여를 망설이게 하고 무관심으로 몰고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거에 대한 무관심은 이 나라의 미래를 아무에게나 맡겨도 된다는 가장 큰 죄악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완전하고 궁극적인 공의와 평화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이 지상의 나라는 궁극적인 선이 아니라 차선을 통해 발전을 이루어야 합니다. 세네카는 그의 인생론에서 “최악의 결정은 어떤 결정도 내리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려운 시대일수록 하나님의 백성은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에 그 미래를 맡기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