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스가랴 9:9-12 빌립보서 2:1-11 요한복음 12:12-19
제사장 스가랴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던 시절은 이스라엘의 재건이라는 엄중한 시대적 사명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초토화되고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 간지 70년 만에 이스라엘 백성은 영어의 몸에서 풀려나 조국으로 돌아옵니다. 한 세대가 지나간 세월로 돌아온 예루살렘 성은 들짐승들이 노니는 황무한 상태였습니다. 피폐한 조국의 현실과 흩어진 백성들의 몸과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예배의 중심지인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 중심으로 백성들을 결속시키는 일이 절실했습니다. 하지만 성전건축은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성전건축에 동참하고자 했던 사마리아인들을 배척하는 바람에, 그들의 방해로 14년 동안 건축이 중단되었습니다. 바사의 다리오 왕에 이르러서야 공사가 재개 되었지만 백성들의 마음은 차갑게 식어있었습니다.
이를 본 학개와 스가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돌이키고자 했습니다.(스 4:1-5:2) 특히 스가랴는 예루살렘 성전재건의 새로운 의미를 언급하였습니다. 성전재건은 이스라엘의 회복은 물론이거니와 만민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 위해 모이는 곳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다시 여러 백성과 많은 성읍의 주민이 올 것이라 이 성읍 주민이 저 성읍에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속히 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자 하면 나도 가겠노라 하겠으며 많은 백성과 강대한 나라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리라”는 스가랴 8장 20-22절의 말씀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새로운 구원의 시대가 열릴 것을 말합니다. 이는 곧 힘에 의한 약육강식의 시대가 지나가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평화의 새 시대가 도래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본문을 읽을 때에, 우리는 전쟁에 능한 왕이 아니라 공의와 겸손의 왕을 보내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 9:9) 서두에 언급했듯이 작금의 이스라엘의 상황은 소실된 성전을 재건하고 무너진 성벽을 다시 쌓고 그리고 나약해진 백성들을 결속할 강한 지도력을 가진 왕이 필요했습니다. 어쩌면 바벨론의 창과 칼에 무너졌으니 강하고도 튼튼한 국력을 요구했을런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보내실 왕은 겸손하여 작은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신다고 하였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은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슥9:10)고 하면서 아예 이스라엘에게는 전쟁을 치를 병거도 말도 활도 모두 꺾어 버려서 무기를 없이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왕이 말이 아닌 나귀, 그것도 새끼 나귀를 타고 오셔서 겸손으로 통치한다는 것은 화평의 시대를 열겠다는 것입니다. 화평의 시대는 말과 병거와 활이 필요 없습니다. 이제 화려하고 웅장한 성전으로 세를 과시하는 왕이 아니라,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가는 나귀처럼 백성들의 무거운 세상 짐을 대신 져주는 왕으로서 통치하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공의와 겸손으로 섬기는 왕이었습니다.
스가랴의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성취가 되었습니다. 종려주일에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그러했습니다.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이는 기록된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요 12:12-15) 종려나무 가지는 승리를 상징합니다. 백성들이 손에 종려나무를 잡고서 예수님을 맞이한 것은 승리를 염원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달라고 “호산나”(지금 구원하소서)를 연호하였습니다. 그런데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그리스도(메시아)는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일점일획도 어김없이 스가랴의 예언 그대로 오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었던 다윗은 한번 전쟁터에 나가면 만명을 물리친다고 해서 “다윗은 만만이요 사울은 천천이라”고 했었는데, 육적 혈통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직 겸손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겸손의 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까? 역시 화평의 시대를 열기 위해서였습니다. 칼과 창의 통치로 이룬 평화는 불안하고 유한합니다. 굴복당한 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거짓 평화입니다. 마음의 분노와 증오가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겸손으로 이룬 평화는 참 평화입니다.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하였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성자 예수는 성부 하나님과 동등되나 그 동등됨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종의 형제를 가지고 오셔서 자기를 낮추셨다고 합니다. 종으로서 주인의 명에 복종하여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라는 이름을 땅위의 모든 이름보다 높여서 그 이름 앞에 세상이 무릎 꿇게 하셨습니다.(빌 2:9-11) 이는 곧 예수의 이름만이 구원의 능력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구원을 받은 자는 어떤 자입니까? 그는 공의를 행하는 자요, 겸손으로 세상을 섬기는 자입니다. 바울은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으로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라”(빌 2:2-3a)고 했는데 그것은 공의의 삶을 사는 자의 모습입니다. 모두가 같은 마음, 같은 사랑, 한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니 다툼이나 허영이 없습니다. 차별이 없고 소외가 없습니다. 그것이 공의입니다. 그리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라”(빌 2:3b-4a)고 하였으니 그것은 겸손입니다. 공의와 겸손은 세상을 이기는 힘이요 능력입니다. 공의와 겸손으로 세상을 이기니 원수맺음이 없고 다툼이나 허영이 없습니다. 오직 평화만이 있을 뿐입니다.
종려주일, 이는 승리의 주일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세상을 이겨야 합니까? 병거와 말과 창으로 세상을 이겨야 합니까? 그러한 왕, 그러한 그리스도를 앙망해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병거와 말과 전쟁하는 창을 끊겠다고 했습니다. 공의와 겸손으로 이방에게 화평을 전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어린 나귀의 등에 태워 예루살렘으로 보내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성을 뜻합니다. 예루살렘은 나귀 타신 왕이 다스릴 때만이 그 이름값을 합니다. 우리는 어느 때보다 샬롬의 도성이 필요한 시대를 살아갑니다. 공의와 겸손으로 삶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화평을 전하는 믿음의 백성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