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마23:13-28, 사30:8-18, 계3:1-6
창조주이신 아버지 하나님의 특사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행보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그가 막상 세상 현장에 내려오셔서 그 내면을 살펴보니, 아버지께서 처음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느끼셨던, ‘보시기에 참 좋았더라’라는 그 모습이 전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아들 되신 예수님의 마음은 아팠습니다. 그러면 그가 보신 이 세상은 대체 어떤 곳이었고, 어느 정도였습니까?
거의 모든 전 영역이 비정상적이었습니다. 건강하고 신선한 곳이 없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가짜들이 진짜를 누르며 주인 노릇하고 있었고, 형식과 외식이 내용과 실질을 누르고 판을 주도하고 있었으며, 비본질적이고 부분적인 것들이 본질과 전체를 장악해서, 큰소리치고 있었습니다. 껍데기와 가짜들의 천국이었습니다. 영역(領域)으로는 유대교와 그의 지도자들이 그랬고, 유다 정치 지도자들과 백성들도 그랬으며, 심지어 교회들까지도 그랬습니다. 그것도 하루아침에 갑자기 된 상황이 아니라 오랜 관행의 뿌리를 가진 것이어서, 적패(積敗)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토록 망가지고 변질된 아버지의 세계를 확인하신 예수님의 마음은 긴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이번 예루살렘에 가시는 길은 당신의 마지막 길이었기에, 더욱 철저한 마무리 작업이 필요했습니다. 우선은 오직 당신만이 친히 해결하고 가셔야할 부분도 있지만, 그러나 당신 이후에 당신의 일들을 계승(繼承)할 제자들이, 이 어두운 세상의 적패들과 싸우면서 그들의 변화와 구원 사역을 지속적으로 이끌어갈 로드맵(길잡이)도 필요하다고 보셨습니다.
나는 이번 사순절 매주일에, 예수께서 당시의 적패세력들과 치열하게 싸우시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현재의 적패청산에 힘쓰고 있는 우리나라의 모습과도 일치하고 있음에 크게 놀랐습니다. 현 정부는 어떤 정부입니까? ‘나라를 나라답게 만들자’는 취지로 일어난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정부입니다. ‘공의와 정의, 법치주의와 민주주의가 바로 작동하는 건강한 나라와 백성 되게 해달라’는 역사적 소명을 부여받고 태어난 정부입니다. 따라서 현 정부의 어깨는 무겁습니다. 이전 정부와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최소, 두 가지 소명들이 부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오랜 적패들에 회개(悔改)와 청산(淸算)을 이루는 일입니다. 이 일을 지금 못하면, 우리의 역사는 한발자국도 앞으로 못갑니다. 야당에서는 ‘적패청산 그만하고, 민생(民生)부터 돌보라’라며 정부를 압박하지만, 그들의 요구대로라면 우리의 역사는 또 다시 옛날로 돌아가고 맙니다. 우리 역사는 해방이래, 부패.친일.독재,불법,성접대,반통일,정경유착,뇌물,국민패가르기,국민무시 등등을 주도해온 적패 세력들에 의하여, 나라다운 나라를 제대로 가져보지 못했습니다. 촛불혁명은 이제 그것들을 청산하고서, 새로운 역사로 나아가자는 요구가 아닙니까?
둘째는 이전보다 더 높은 수준의 가치와 삶의 질을 마련하여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정부는 다양한 새로운 실험들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특정 세력이 아닌, 전 국민 모두를 함께 잘 살게 해 줄 것인가’. ‘소득주도 성장론’은 대표적입니다. 그리고 본 교회 최 장로께서 서울시와 함께, ‘청년 50만원 무상지원’ 제도를 실험해보면서, 이 시대 청년들의 망가진 자존심을 고양시키고 삶의 여력을 주자고 제의한 일도 그 일환입니다.
이런 미래를 향한 일들은 결코 간단하지 않습니다. 국민 모두의 인내와 협력이 필요한 일입니다. 우리의 기도와 힘과 지혜를 모아야만 새 시대를 함께 열어갈 수 있습니다. 막10장에서 만난 저 부자 청년처럼, 자기 것을 희생하려고 하지 않으면, 그 세계는 열리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부여하신 좋고 선한 것들을 하나님과 세상을 위하여 나눌 수 있어야만, 우리는 꿈의 새 세상과 통일한국을 선사 받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기에, 본 사순절기는 우리 외부와 내 안에 쌓인 많은 적패청산에 집중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먼저 회개와 변화를 깊이 원하여야 합니다. 부활의 새 아침은 그 때 열리기 때문입니다. 마침 오늘은 총회가 제정한 순교자(殉敎者)기념주일인데, 순교자들이 대체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그런 개혁과 새 시대를 열고자 하신 높은 뜻을 좇아, 자기를 희생하신 이들입니다. 그 순교자들을 대하는 우리의 과제도 분명합니다. 그들의 믿음과 삶을 계승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적패세력에게서 인간의 생명들을 살리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배웁시다.
복음서를 더 깊이 봅시다
복음서는 유대교 지도층인 율법학자와 바리새파 사람들을 확실한 적패 대상으로 보고 있습니다(13,15,16,23절) 그들은 위선적인 행동과 잘못된 교육으로, 하늘나라의 문을 막고 있었고, 자기들을 따르는 자들을 자기들보다 더 악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드는 제조업자(製造業者)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에 대한 심판 없이는 그 밑에서 짓눌려 살아온 숱한 대중들을 구원해낼 수 없음을 아신 주님이, 그들을 향하여 이미 결별을 각오해서 나온 ‘막말 저주들’을 쏟아내셨습니다. 소위 ‘7화(禍) 선언’이라 불리는 예수의 저주 선언은 그런 연유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들을 들여다봅시다. 네 가지 큰 죄악의 덩어리들이 보일 것입니다.
1) 저들은 믿는 사람들로 하여금 아예 하늘나라에 못 들어가도록 막았습니다. 자기들은 물론,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했습니다(13절).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사람들이 눈먼 목자들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자기들의 욕망을 채우는 일에만 열중하였습니다. 그 바람에 자신들은 물론, 자기에게 배우고 따르는 사람들에까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종국에는 하나님께 버림당하게 하는 완전 ‘빈껍데기 신자’가 되게 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2) 자기 제자들을 자기들보다 더 악한 ‘지옥(地獄)의 자식’이 되게 했습니다. 그들은 본래 대단한 종교적 열심과 집중력과 교육열을 가지고, ‘개종자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닐 정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15절,중).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해서 만들어낸 제자들을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기들을 위한 하수인들을 만들었습니다. 최악의 비극적인 일은, 입교한 자들이 예수를 비난하고 대적하게 하는 일에, 그들 선생의 앞잡이가 되어 뛰게 된 일입니다. 그 바람에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죽이는 지옥의 자식들’이 된 것입니다(15절).
3) 내면의 의식과 판단구조가 아주 잘못 형성된 자들입니다. 본질보다는 비(非)본질에 열중했습니다. 핵심을 못보고 지엽적인 것에 흥분했습니다. 큰 것은 못보고 작고 지엽적인 것에 집중했습니다. 하위법으로 상위법을 거스르는 짓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크신 하나님에는 눈이 멀고, 적은 제물과 헌금에만 민감했습니다(16-22절). 진짜 ‘눈먼 인도자’들의 전형이었습니다!
4) 말씀의 부분적인 구절에는 민감하지만, 그 말씀이 뜻하는 의미와 내용에는 무지했습니다. 신앙은 있으나 신학이 없었지요. 그러다보니, 그들 신앙은 자기 이익과 욕망중심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사랑의 면모는 있어도, 인간 사랑의 모습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 바람에 물질의 십일조만 드리면 구원 받을 사람처럼 가르치지만, 하나님이 진짜 원하시는 정의, 자비, 신뢰성과 같은 더 중요한 이웃 사랑과 세상 섬김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 바람에, 그들의 신앙은 공공성을 상실한 것이었고, 하나님의 백성을 생산 못한 죽은 신앙이 된 것입니다(23절).
예언서를 다시 봅시다
이사야서는 타락한 국가 지도자와 종교지도자, 그리고 그것에 맹종하는 유다 백성들 모두를 적패대상으로 보았습니다. 여호와는 당신에 대한 이스라엘의 배신에 크게 분노하셨습니다. 그들은 나라가 아수르 제국의 위협에 시달리자, 애굽에 사절단을 보내 도움을 간청하면서도(30:1-7참조),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는 마치 원수진 듯한 태도를 보이며,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왜 아수르에게 당하고 있는지에 대한 성찰도 없었고, 그저 무능하여 도울 힘도 없는 애굽의 바로에게 매달린 것입니다. ‘여호와를 찾으라’고 권고해도 막무가내였습니다.
유다의 여호와에 대한 그런 경멸행위는 마치 부모를 무시하고 경멸하는 자식과 흡사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런 그들의 반역하는 모습들을 서판(書板)과 책에 기록하여, 후대들에게 영원한 증거가 되게 하라고 선지자에게 명하셨을 정도였습니다(8절). 그들에게 따라붙은 별칭들은 이것이었습니다. -‘반역하는 백성’, ‘거짓말하는 자손’, ‘주의 율법을 전혀 들으려 하지 않는 자손’이었는데(9절), 이제 그 어긋난 모습을 다시 확인해 봅시다.
1) 여호와에 대한 그들의 경멸은 그의 종을 향한 다음과 같은 막말들에서 들어났습니다-‘환상을 보지 마라, 바른 것도 보이지 마라, 듣기 좋은 말만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 정도를 버리라, 바른 길에서 벗어나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우리에게서 떠나시게 하라’(10-11절)
2) 하나님은 그러한 그들에게 심판을 예고하시는 것으로 응수(應酬)하셨습니다. 마치 붕괴될 성벽과 같이, 깨어져 산산조각 날 항아리처럼, 그들이 사라질 것을 선고하신 것입니다(12-14절). 그러면서도 그들의 구원을 바라시는 여호와께서는 따뜻한 메시지를 남기셨습니다. ‘회개하라. 마음을 편안히 하라. 고요히 여호와를 신뢰하고 지내라. 힘과 구원을 얻으리라’(15절)
3) 그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발악(發惡)이었습니다! 완전히 관계를 끊고 등을 돌린 자와 같은 절교 선언을 날렸습니다! 주님도 더 이상 어쩔 수 없게 한 것입니다(16,상 절). ‘그러지 않겠다. 차라리 (더 날센) 말을 타고 도망하겠다’. 감히 자기과대망상으로 주께 맞선 것입니다!
4) 결국 여호와께서는 다음의 두 가지 차원으로 그 상황을 정리해 주셨습니다(16.하-18절).
① 저들에게 ‘처참(悽慘)한 운명’을 선고(宣告)하셨습니다-‘그들은 적군의 압도적인 짓밟힘으로 망하고 흩어져서, 그들이 살았던 곳에는 오직 외로운 깃발의 흔적만 남게 될 것이다’. 그 결과가 북 왕국 이스라엘이 망하여 사마리아인이라는 흔적으로 남은 족속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② 구원의 문은 여전히 열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믿고 찾는 자들에게는 끝까지 영접해 주시려고 하셨습니다(18절). 결코 인간들에게 당하신 대로 맞대응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서신서는 어떻습니까
이번에는 소아시아 7교회 중에 사데(Sardis) 교회(敎會)가 그 적패 대상에 올랐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그 교회를 평하신 결정적인 한마디는 이것입니다. ‘네가 살아 있다는 평판은 있으나, 내용은 죽은 교회이다’(1절). 어서 깨어나야만 하고, 회개해야할 교회였습니다(2-3절).
사데는 본래 남다른 강점이 있었습니다. 그곳은 금화(金貨)의 생산지여서, 지역 경제가 부유했습니다. 그 바람에 그곳은 부와 철학, 법률과 예술, 모직과 금은 세공 산업이 일찍부터 발달했습니다. 처음엔 그런 축복들이 그곳 토속신인 아데미 여신의 은혜라 여겼으나, 복음이 들어온 이래는 충돌이 발생하면서 순교자들이 나올 정도의 영적 전투력을 가진 곳이었습니다(4절). 오늘은 순교자기념주일이기도 한데, 우리는 이 영광의 흔적이 사데교회에 있었음을 주목합시다.
그런 사데가 지금은 왜 주님의 경고를 받았습니까? 그것은 교우들이 순교의 전통과 정신을 계승하지 못하고, 세속의 부요를 즐기고 누리는 데에 몸과 영혼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일부 신앙의 정절을 지키고 있는 ‘흰 옷 입은 이들’을 귀하게 보신 주님은, 변질(變質)된 신도들도 어서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2,4-5절).
사데 교회의 변절과 그 위기의 실상을 접하면서, 우리는 지금의 한국교회와 우리의 영적 상황을 다시 봅니다. 사데교회가 우리 한국교회의 현재의 일그러진 모습을 대변한다는 느낌이 일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아직은 폭 망한 것은 아닌 듯하지만’, 그러나 세속의 풍요와 이전의 전통을 자랑하는 수준에 머물면서, 한 발자국도 주님 앞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는 허약한 우리의 모습들, 게다가 성적 타락과 세속의 향락이 주는 쾌감에 빠져서 주님의 십자가 고난을 계속 외면하고 나태와 안일의 늪에 빠져든, 우리의 영적 취약함을 생각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한국 개신교의 역사이래, 지금처럼 교회가 부끄럽고, 목사인 것이 부끄럽고, 교회의 신자인 것이 부끄러운 시대가 없습니다. 3.1정신을 선도한 그때의 교회 정신에 비하면 더더욱 부끄럽습니다. 맘몬의 앞잡이가 되었고 성적 유혹에 빠져서, 한국교회가 적패대상이 된 것도 한없이 부끄럽습니다. 비록 일부지만, 극우 태극기부대를 양산하고 반통일 세력들과 한 통속이 된 모습이 참 부끄럽습니다. 살았다는 이름은 남았으나, 사실은 죽은 교회여서 부끄럽습니다.
주의 심판을 대비합시다. 십자가 신학이 다시 필요한 때입니다. 주님의 불같은 호령과 책망을 다시 들어야 합니다. 시인 고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라는 지적대로, 어서 껍데기 신앙과 인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겉치레와 자기중심의 신앙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과 그의 말씀중심의 신앙으로 갑시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건강한 두 핵심 축을 어서 구축하여, 예수의 하늘 구원을 펼쳐 나갑시다. 예수 냄새가 가득한 신자, 교회, 세상을 이루는 일에 앞장섭시다.
우리가 입을 옷은 천상의 영광이 서려 있는 흰 옷이지, 지옥의 상징인 검은 옷이 아닙니다(5절). 우리 교회는 세상의 클럽이나 동호회 같은 친교단체 수준에 머물면 안 됩니다. 모이면 모일수록,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맞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인간 자랑이나 냄새가 아닌 예수 자랑과 예수와의 만남이 가장 큰 자랑이요 기쁨이 되게 해야만 합니다. 적패 인생의 굴레에서 완전 벗어나 새 세계의 주역이 됩시다. 아직 시간이 좀 남았을 때, 어서 깨어납시다!